영화기생충의 전반부에 기택의 아들 기우가 가정교사를 하려고 대저택에 들어선 장면이 있다. 정확히는 가정교사 채용 면담 차 가슴 조이며 대저택의 뜰로 혼자 들어서는 장면이다. 그 때 하늘의 햇빛이 기우를 조명하듯 내리쬐었다. 정면으로 말이다.

나는 이 장면이 여태 생생하다. 햇빛 한 점 받기 어려운 반 지하 셋집의 기우가 느닷없이 엄청난 햇빛을 받게 되다니!

그 햇빛은 가짜로 대학재학 증명서까지 만들어 왔는데 들통 나거나 해서 면접에 실패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의 투영이었다. 찬란하다기보다 두려운 빛의 뭉치였다.

기우가 어찌 될까?’

짧은 순간이지만 두려움 속에 두리번거리는 기우 모습은, 가난한 청춘시절을 보낸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디테일한 장면 연출로 소문만 봉준호 감독이기에, ‘기우가 대저택 뜰에 들어설 때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 장면에 공을 들였을 게 분명하다. 햇살이 기우를 엄습하는 시간대에 촬영기를 돌리려고 여러 번 현장 연습을 했을 거라는 내 확신이다.

흔한 햇빛까지 자신의 작품에 요긴하게 쓴 봉 감독. 그의 재능에 재삼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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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옛 중도 선착장에서 녹슨 폐선을 보았다.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아

아무 바람이라도 만나면 포근히 실어주었더라

바람은 잠시 쉬다가 이마에 미열만 남기고

싸늘히 돌아갔더라

(중략)

아련하기만 한 나의 사랑은

저기 떠나는 자의 모습으로 서 있더라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 자의 모습으로 서 있더라

(하략)

 

조현정시인의 시폐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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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식력이 좋은 놈들끼리 만나 새끼들을 낳은 건가?

얼마 전부터 주방에 콩알처럼 작은 놈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아내가 두어 번 외마디 소리를 지를 때만 해도 나는 그런가 보다 하다가, 직접 여러 마리를 목격하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방치했다가는 주방을 넘어 거실, 나아가서는 안방 건넛방까지 놈들이 득실거릴 것 같은 불안감과 공포.

한 때 식당 사장이었던 친구가 술자리에서 한 말이 기억났다.

때가 되면 식당에 바퀴벌레들이 들끓기 시작하는데 놈들을 단번에 말살시키는 방법이 있지. 하루 날을 잡아, 식당 문이란 문은 테이프로 단단히 붙여 철저히 밀폐시키고 나서 연기를 자욱하게 피우는 거야. 그런 연기만 피우는 물건을 문방구 같은 데에서 팔지. 연기를 매캐하게 피우면 구석구석 숨어 있던 놈들이 그 연기를 못 견뎌 밖으로 기어 나와서는 다 죽어 자빠지지. , 그런 날은 미리 소방서에연기를 피울 거라고 연락해 둬야 해. 그렇지 않으면 화재가 발생한 줄 알고 소방차가 달려오는 일이 생기거든.”

그렇게 나도 우리 집에 연기 한 번 피워볼까 생각했지만소방서에 신고하는 절차도 그렇고 조용한 동네에 괜한 소란을 피우는 듯싶어 단념했다. 대신 바퀴벌레 잡는 약을 사서 해 보기로 했다. 그런 약을 약국에서 판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았다. 약국에 갔더니 과연 그런 약을 팔았다. 한 갑에 7000원이다. 약사가 내게 말했다.

이 약, 아주 잘 듣습니다. 바퀴벌레들이 잘 다니는 길목을 찾아놓기만 하면 됩니다.”

 

그의 말을 따랐다. 그렇게 주방 곳곳에 약을 놓고서 20여 일 지났다. 과연 놀랍게도 놈들이 씻은 둣이 사라졌다. 신통하다는 생각에 갑에 쓰인 설명을 찾아 읽어보았다. ‘특유의 냄새로 바퀴벌레들을 유인한다는 것. ‘약을 먹은 바퀴벌레가 그 약을 다른 바퀴벌레들과도 나눠먹음으로써 함께 죽는다는 설명이 있었다. 놀라운 구충약이었다. 다만 세 달에 한 번은 새로 약을 놓아야 한다는 당부가 첨부돼 있었다.

그렇다. 놈들을 완전히 없앤다는 건 무리였다. 한 번 없앤다 해도 새로 외부에서 유입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놈들과 나는 평생 세 달에 한 번 새로 약을 놓아가며 사는 숙명의 고리로 이어져 있는 게 아닌가. 이 반갑지 않은 깨달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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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영악한 놈들인지 모른다.

그저께만 해도 그렇다거실 바닥에서 놈을 목격한 순간 나는 가까이 있는 걸레로 잽싸게 후려쳤다괜히 파리채 같은 것을 찾아 후려치려고 우물대다가는 놈을 놓치기 십상이다놈이 내 걸레에 맞아 단번에 죽어 자빠졌다.

나는 그걸 휴지를 찾아 싸서 버리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혹시 죽은 체하고 있는 줄도 모르니까 다시 한 번 걸레로 후려치자

내 생각이 맞았다다시 후려치려고 걸레를 쳐드는 순간 놈이 후다닥 달아나려 했기 때문이다하마터면 놓칠 뻔했던 놈을 확실하게 때려잡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놈들은 이제 사람의 심리까지 파악하는 경지에 이르렀다한밤중에 갑자기 주방의 전등을 켜면 가까운 틈 같은 데로 쏜살같이 피하는 놈들도 있지만 그런 틈이 멀면 꼼짝도 않고 제 자리를 지킴으로써 마치 바닥에 떨어진 하찮은 물건처럼 보이는 술수를 부리기도 한다그럴 때 그것을 쓸어버리려고 방비를 찾는다든가 하면 그 순간 놈은 잽싸게 달아나는 것이다.

언젠가는 욕조 바닥에서 놈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적도 있었다그 때 욕조 바닥에 작은 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놈이 그것을 엄폐물로 삼아 피하기 시작했다놀랍게도내가 항아리 왼쪽으로 발을 옮기면 얼른 오른쪽으로 피하던 것이다사람과 바퀴벌레가 항아리 하나를 가운데 두고 술래잡기하듯 빙빙 돌던 그 기괴한 시간결국은 내가 돌기를 중단하고서 신은 슬리퍼를 하나 벗어서 항아리 너머 놈을 냅다 후려침으로써 일단락을 지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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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박효규 또한 이정규처럼 나와 같은 초중고를 다녔다. 그에 관한 기억은 초등학교(교대부속초등학교) 3학년 때 어느 날이 첫 번째다. 햇빛 화창한 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귀갓길에 그의 집에 들르게 됐는데 놀랍게도 작은 아코디언을 꺼내 내 앞에서 연주해 보이는 게 아닌가!

1960년이던 그 시절 음악교과서의 사진으로나 보던 귀한 악기 아코디언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주까지 하다니,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어릴 적 친구 얘기를 쓸 때마다 놀랐다!’는 표현을 나도 모르게 한다. 하긴 어릴 적 눈앞의 사물이나 사건은 경이로울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 일이 있더니 세월이 흘러 친구는 음악선생으로, 나는 국어 선생으로 한 학교에서 만났다. 모 고등학교에서, 1994년이다. 우리는 어언 마흔 살 넘은 중견교사였다. 특유의 우렁찬 음성으로 재미난 얘기하기를 즐기는 친구, 50명 넘는 교직원들의 차 중 친구의 차가 가장 낡은 차였다.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새 차로 바꿀 만한데 오히려 그 고물차를 자랑스레 끌고 다녔다. 그뿐 아니다. 어느 날은 뒤 범퍼를 새로 간 모습으로 나타나 동료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면서 하는 친구의 말이 너무 재미가 있어 오랜 세월이 지난 이제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저께 어디 다녀오다가, 뒤로 오던 어떤 사람의 차가 내 차 뒤를 받았지 뭐야. 그래서 내 차 뒤를 자기 돈 들여 새로 갈아주었다니까? 이제 내 차는 앞부분만 누가 받아주면 돼. 그러면 내 고물차가 돈 한 푼 안 들이고 새 차로 탄생하는 게 아니겠어? 하하하.”

그러더니 이듬해 여름방학 때 미국으로 이민 가 버렸다.

 

그 박효규 친구 역시 미국에서 내가 올리는 페북의 글을 재미나게 보고 있다는 얘기를, 어제 모 행사장에서 만난 후배한테 전해 들었다. 정말 놀라운 세상이다.

박효규. 자네, 미국에서는 어떤 차를 몰고 다니나? 괜히 궁금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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