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대학생들이야 남녀가 거리낌 없이 어울려 다니는 모습이지만 그 시절 1970년경에는 그렇지 못했다. 강의실에 앉을 때에도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이 마치 휴전선이라도 중간에 둔 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앉았다. 심지어 하나뿐인 난롯가에 모여 불을 쬘 때에도 반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었다. 돌이켜보면 어처구니없지만 여하튼 당시는 보수적인 분위기였다.
그러한 때 최봉석, 그 녀석은 과대표가 되자마자 과의 통솔에 앞장섬은 물론이고 여학생들과 어울리기도 잘했다. 과대표라는 자리를 적극 이용해, 쉬는 시간마다 몇몇 여학생들을 ‘거느리며’ 캠퍼스를 누볐다. 당시의 남녀유별한 분위기 탓에 녀석 뒤로 여학생들 몇이 한 걸음 정도 떨어져 같이 다니는 모습이었지만 심기가 불편한 우리 눈에는 녀석이 여학생들을 ‘거느리며’다니는 것처럼 고깝게 보였을 게다.
치졸하지만 ‘텃세’가 엄존했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녀석을 외진 곳에 따로 불러다 놓고 ‘너 좀, 설치지 말고 조용히 지낼 수 없겠니?’하며 겁을 줘 기를 꺾어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질 못한 까닭은 녀석이‘딱히 뭐라고 트집 잡을 만한 허물없이’맡은 과대표 일을 잘 해냈기 때문이다.
편치 않은 눈길로 지켜보는 ‘우리’를 의식한 것일까, 녀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과대표라는 위상을 다지며 생활하는 모습이었다.
우선은 그 복장이다. 녀석은 처음 등장하던 날부터 검남색 외투를 걸쳤다. 우리는 잦은 신입생 환영 모임 탓에 옷에 막걸리 국물자국 등이 흔했으나 녀석은 그 외투에 국물자국은커녕 밥풀 하나 묻히지 않았다. 입학 기념으로 부모님이 사 줬을 그 외투를 정갈하게 걸치고서 마치 ‘충신 원천석의 후손이라도 된 양’ 점잖은 선비 걸음으로 강의실 사이의 복도나 캠퍼스 정원을 누볐다. 혼자도 아니고, 뒤를 따르는 여학생들한테 간간이 고개를 돌려 뭐라 한 말씀해서 고개들을 끄덕이게 하거나 깔깔깔 웃기거나 하면서.
그런 광경이 부럽지만 우리는 애써 관심 없는 척 담배나 열심히 피워댔는데 그조차 서툴러서 ‘컥, 컥 ’기침들이 잦았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 하찮게 맺어지기 일쑤라는 깨달음처럼 또 하나의 깨달음이 내게 있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별스럽던 것도 얼마 후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기 마련이라는 깨달음이다.
녀석의 별스런, 여학생들의 인기를 끌던 모습도 얼마 후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