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젯밤, 아내가 그에게 제의했다.
“여보. 내가 내일 하루, 먼 데 출장가야 하는데 운전해줄 수 있어요?”
머뭇대는 그에게 눈치 빠른 아내가 단서를 달았다.
“당신이 하는 일에 지장이 없다면 말이죠.”
그제야 그는 고개를 끄덕여 제의를 받아들였다. 사실, 그는 한가했다. 아내의 직장 출퇴근 시간에 맞춰 거실 컴퓨터를 켰다 껐다 하는 게 그가 하는 일의 전부라면 지나친 말일까? 물론 세 달 전 시작하다 만 장편소설의 첫머리가 컴퓨터에 한글 파일로 내장돼 있긴 했다.
종일 직장에 나가있는 아내로서는 당연히 그가 아파트에 틀어박혀 컴퓨터로 소설을 쓰며 지내리라,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소파에 앉아 졸며 종일을 보낼 때 켜놓은 컴퓨터의 바탕화면도 껌껌해진 꼴로 주인을 따라 함께 존다는 사실이다. 절전기능 때문이었다. 아내가 귀가했음을 알리는, 현관문이 찰칵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그는 부리나케 컴퓨터의 자판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려 껌껌하게 졸던 화면을 생생하게 깨워 놓았다.
‘거리의 끝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휴지와 라면 봉지와 빈 캔과 짝 잃은 양말 한 쪽까지 훑으며, 사내가 멈춰 서 있는 데까지 끌고 오고 있었다.’
두 줄 나가다 만 장편소설의 첫머리가, 환하게 깨어난 컴퓨터 화면에서 커서 불빛까지 깜빡이며 세 달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현관으로 들어와 하이힐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면 그는 늘 한 마디 물었다.
“별 일 없었어?”
그러면 아내는 거실 구석에서 커서를 반짝이는 컴퓨터 화면을 힐끗 보며 말했다.
“별 일 없었어요. 당신, 소설은 잘 되요?”
“잘 되다 말다 하지, 뭐.”
사실, 그가 아내한테 거짓 광경을 연출할 필요는 없었다. 컴퓨터를 꺼 놓고 텔레비전이나 종일 보는 모습이라 해도 뭐라 그럴 아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무위도식하지 않는다.’는 자존심 때문에 그는 단 하루도 ‘아내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 컴퓨터를 켜고 끄는 ’짓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쑥스런 짓을 내일 하루 안 해도 되었다.
아내는 길눈이 어두웠다. 출장지인 모 관광호텔이 이백 리쯤 되는 먼 지방에 있자, 그에게 운전을 부탁한 것이다. 당신 혼자 이른 새벽에 일어나 시외버스라도 타고 가면 될 일인데 굳이 자가용 운전을 부탁한 것은 ‘답답한 아파트에 틀어박혀 소설 쓰느라 고생 많은 남편’이라 여겨 바깥바람 한 번 쐬어주기 위함일 수 있었다.
그는 소풍 가기 전 날 밤의 초등학생처럼 마음이 들떴다.
인터넷으로, 아내가 출장 가는 지방에 대한 갖가지 정보부터 검색했다. 그 지방은 태백산맥이 가까운, 인구 삼 만이 조금 넘는 시골 군이었다. 지방자치제의 성과인 듯 홈페이지까지 마련해, ‘우리 고장의 음식’‘우리 고장의 역사’‘우리 고장이 낳은 위인’ ‘우리 고장의 자연’등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 고장의 명소’에 주목했다. 참나무 숯 공장, 삼국시대의 산성 유적, 향토박물관, 행복 생태학교 순으로 나열된 자료를 프린트로 뽑았다.
아내의 출장은, 그 지방에 있는 모 관광호텔 컨벤션홀에서 ‘오전 열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받는 업무 관련 교육 때문이었다. 아내가 교육을 받는 동안 그는 호텔 밖에서 혼자 여섯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는 그 시간 동안 차를 몰고 ‘우리 고장의 명소’를 들러보거나, 이웃한 대관령을 넘어 동해 바닷가에서 회라도 한 접시 먹고 돌아오거나, 둘 중 하나를 내일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선택에 따라, 다르게 전개될 내일 하루다!’
아내는 벌써 안방에서 잠들었는데 그는 괜히 들떠 혼자 거실을 서성이다가 늦게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