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닷새 만에 밭에 왔더니 작물들이 부쩍 자라나 있었다. 비닐멀칭 한 두둑들에서 이십 센티 가까이 치솟은 옥수수들과 연보라색 꽃을 일제히 피운 감자들. 설레는 가슴으로 잘 자란 작물들 모습을 구경하며 내려오다가, 아래쪽의 땅콩을 심은 맨땅 두둑들에 이르러서 맥이 빠졌다. 어느 새 잡초들이 무성하게 되살아나 있었다.
나흘간의 비에 되살아난 잡초들. 땅콩의 싹들을 찾아봤지만 흔적도 없었다. 아내가 뇌까렸다.
“잡초에 작물이 녹아버린다더니…….”
‘녹아버린다’는 말, 정말 실감났다. 뜨거운 물에 떨어진 얼음 조각처럼, 극성맞은 잡초들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땅콩의 싹들. 아내가 다시 뇌까렸다.
“그냥…… 잡초 밭으로 내버려둘까?”
순간 나도 모르게 외쳤다.
“무슨 소리야? 잡것들, 마저 검정비닐로 다 씌워야 돼.”
나는 성큼성큼 고랑을 걸어서 밭 꼭대기, 차 있는 곳으로 갔다. 트렁크를 열어서 남은 검정비닐 두루마리를 찾았는데 당체 보이질 않았다.
“비닐, 어디 뒀지?”
화가 나서 물었더니
“베란다에 두었잖아요.”
“그냥 차에 두질 않고, 왜 옮겼어?”
“당신 성질도 참. 내일 갖고 오면 되죠.”
아내는 밭에서 농로 쪽으로 가더니, 금낭화 주변의 되살아난 잡초들을 김매기 시작했다. 나흘간의 비에, 농로 가의 잡초들도 온통 되살아났다. 나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아내가 김매다 말고 일어서며 물었다.
“갑자기 어디 가려는 거야?”
“농협 가는 거야. 검정비닐 두루마리와 ‘방초 부직포’라는 것도 사 오려 해. 열 고랑인데, 까짓 거 부직포가 비싸 봐야 얼마나 들겠어? 사 갖고 올 테니까 그리 알아.”
내 스스로 생태환경론을 부정했다. 얼떨떨하게 서 있는 아내를 룸미러로 보면서 밭을 벗어나, 이번 비로 질척거리는 구거로 들어섰다. 바퀴가 하천바닥에 빠지지 않게 조심해서 차를 몰고 내려가면서…… 아무리 보아도 이해하기 힘든 아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농사에 정진하자며 앞장설 때는 언제고 수시로 금낭화 주변이나 김매는 모습이라니. 이미 밭의 작물들에는 관심 없는 여자 같았다.
농사 처음에는 수동적이었던 내가 이제는 능동적으로 바뀌었는데, 아내는 그 반대가 된 듯했다. 구거를 내려와 가까운 농협 쪽으로 차를 몰면서‘아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럴까?’하는 의구심을 어쩌지 못했다.
농협에서 검정비닐 두루마리와 ‘방초 부직포’두루마리, 다 사 왔는데 검정비닐은 활용 못했다. 김매 놓고 비닐을 씌워야지, 그러질 않고 비닐부터 씌운다면 잡초들이 결국은 그 비닐을 뚫고 나올 거라 했다. 그토록 사나운 잡초였다. 아내가 밭농사를 잘 아는 도시농업센터 교육 동기한테 휴대폰으로 물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열 두둑의 잡초들을 다시 김매야 한다니, 나도 모르게 몸서리쳐졌다. 아내와 의논한 끝에‘잡초들을 그대로 둔 채 옥수수나 심기’로 결론을 내렸다. 아내가 배운 지식에 의하면 ‘비닐멀칭을 안 해 줘도 잘 자라는 게 옥수수’란다. 그를 믿고 잡초 밭에 그냥 옥수수를 심기로 했다.
오랜만에 아내도 밭일에 나섰다. 우리는 다섯 두둑씩 맡아서, 삼십 센티 간격으로 옥수수를 두 알씩 심었다. 잡초들 속에서 싹을 내면 다행이라는, 지친 심정에 가까웠다.
잡초 무성한 고랑들 차례였다. 농사 초기에 아내한테 얘기 들었던, 전설의 방초 부직포가 고랑에 깔릴 순간이었다. 잡초들을 삽날로 쳐내고 부직포를 깔아야 하나 망설이는데 아내가 말했다.
“여보. 방초 부직포는 무거운 데다가 햇빛도 차단하기 때문에 잡초들이 그 밑에 깔리면 저절로 죽는다고 배웠어. 그냥 방초 부직포를 깔아도 돼.”
나는 또 다시 열 고랑을 옮겨 다니면서 망치질깨나 해댔다. 낱장인 현수막들과 달리 방초 부직포는 검정비닐처럼 두루마리로 되어 있어서, 그 점 하나는 편했다. 고랑에 두루마리화장지처럼 풀어 깐 뒤 대략 삼사 미터 간격으로 고정 핀들을 때려 박았다. 얇은 천인 현수막들과 달리 두꺼운 합성수지 재질이니까 망치에 맞아 고랑 바닥에 박히는 고정 핀의 감각이 남달랐다. 현수막의 경우는 가볍게 박히는‘탁 탁’느낌이었다면 합성수지 재질의 방초 부직포는 둔중하게 박히는 ‘터억 터억’ 느낌이었다.
아내는 맨드라미씨앗들을 관정 주위에 심고 있었다. 그곳이 살풍경해서 심는다고 변명했는데…… 사실 그럴 시간이면 작물들에게 관심을 쏟았어야 했다. 감자 작황에는 물 공급이 절대적이라는데 관정에 연결된 호스로 물 줄 생각은 않고 관정 주위에 화초씨앗이나 파종하다니, 도대체 아내는 뭣 하러 밭에 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