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은 나만 변화시킨 게 아니다.

우리 곡마단 전체를 변화시켰다. 아니, 세상사람 모두를 변화시켰다. 이런 놀라운 사실조차 텔레비전을 통해서 안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처음 곡마단이 등장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환호했다. 나라에 큰 잔치가 베풀어질 때마다 초대받고 가는 단체가 곡마단이었다. 그런 잔치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너나없이 곡마단을 찾아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맛보았다. 말 그대로 만백성의 사랑을 독차지한 곡마단이었다. 하지만 곡마단의 영광은 근대에 이르러 된서리를 맞는다. 과학문명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영화에 세상 사람들이 매료되기 시작한 때문이다. 곡마단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반 이하로 줄어들었으나 그래도 필름으로 보여주는 착시현상에 불과한 영화에 맞서 생생한 눈앞의 현장이라는 장점 하나로 곡마단은 가까스로 버텨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등장하여 각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하자 영화를 상영하던 극장이란 공간은 물론, 곡마단까지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 소수로 남은 곡마단조차 문 닫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내가 있는 곡마단이 그 소수로 남은 곡마단 중 하나일 줄이야! 식자우환이라더니, 텔레비전을 통해 세상일을 알면 알수록 더욱더 깊어지는 나의 절망감이었다.

그래서 내게 주는 먹이가 점점 더 열악해지는 걸까? 사과나 감은 늘 주지만 파인애플이나 벌꿀 같은 별미 먹이는 사라진 지 오래다.

예전에는 말들이 둥근 마당을 도는 공연순서가 있었는데 그조차 사라진지 오래다. 물론 말들의 행방도 보이지 않는다. 말들뿐인가, 간단한 숫자 더하기 게임을 보여주던 염소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거꾸로 서서 두 발로 통을 굴리던 사람도, 입에서 석유 불을 내뿜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우리 곡마단이 문 닫는 수순에 들어간 것이다.

나는 애써 탈출을 꾀하지 않아도 이 곡마단을 벗어날 판이 아닌가?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 내 앞날은 어떻게 될까? 탈출은커녕 불확실한 앞날을 걱정할 판에 내가 처해 있었다.

알면 알수록 요지경 속인 세상의 가장자리에 내가 엎드려 있었다. 내가 엎드려서 철장 밖에 놓인 텔레비전을 보는 굴속이 바로 세상의 가장자리였다. 내가 곰이 자전거를 타는 유서 깊은 곡마단의 마지막 모습으로 사라질 참이었다.

텔레비전이 태풍처럼 휩쓸면서 변해버린 세상의 가장자리에 곡마단 천막이 놓여 있고 그 가운데에 내가 누워서 문제의 낡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곡마단 사람들의 거동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언어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고 나는 본능적 생각을 가진 짐승이니까 나는 그들의 떠드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떠들고 있을 때 그 억양이나 어조, 내 쪽을 우울하게 보며 말하는 표정, 깊은 탄식 소리 등등을 종합해서 나는 그 뜻을 파악하였다.

그건 이런 뜻이었다. ‘저 곰 새끼를 팔아치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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