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당일 2교시가 되자 써클 회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옥상 위에 나타났다. 써클의 명예가 걸린 패싸움이라 여겨, 조퇴 외출 뺑소니 등 갖가지 방법으로 모두 수업을 빠지고 나타난 것이다. 각자 마련해 온 무기들을 꺼내들고 한판 벌일 찰라, 뜻하지 않게 교장선생이 나타나 “이런 고얀 놈들!”이라 소리치는 바람에 모두가 무기들을 버리고 달아났으나 그 중 한 명이 붙잡히면서…….

‘사건’의 전후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우리는 실망이 컸다. 야구 방망이, 각목, 자전거 체인, 잭나이프 등 갖가지 흉기까지 준비하고 나선 패싸움이 어떻게 교장선생의 고함소리 한 마디에 시작도 못하고 흩어질 수 있을까? 아쉽다기보다는 이해 못할 사건이었다. 더욱 이해 못할 일은, 25개 학급의 큰 학교라 교장실에서 도장 찍는 일 하나만으로도 바쁠 교장선생이 그 날 따라 ‘학교 옥상에 우연히 올라갔다가 패싸움 벌이려는 현장을 목격했다’는 사실이다. 이게 말이 되는 얘기인가? 써클 회원 중 누군가 ‘사건’ 직전에 몰래, 급히 교장실에 알린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등등의 추측으로 쉬는 시간마다 떠드는데, 나 혼자의 생각이지만 이해 못할 게 더 있었다.

그것은 ‘사건’ 뒤의 참가자들 모습이었다. 학생과 사무실 바깥 복도에 시커멓게 무릎 꿇고 앉아들 있다가, 학생과장 선생의 지시대로 반성문을 제출하고 야단맞고 하면서 순순히 징계 절차를 밟아나가는 ‘준법적 태도’들이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상자가 나올 수도 있는 패싸움을 벌이려던 불법 폭력 조직원들의 행동치고는 너무 모순되지 않은가?

한 마디로 ‘겉 다르고 속 다른 무리들의 짓거리’라고 보아야 했다. 겉으로는 자기 써클의 명예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듯 나섰지만 속으로는 두려움에 벌벌 떨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교장선생이 ‘우연히’ 그 시간에 옥상 위로 나타나 소리칠 때까지 무기들을 꺼내들고 을러대고만 있었다거나, “이런 고얀 놈들!” 한 마디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무기들을 내 버리고 달아나기 바빴다는 일 등이 비로소 해명되는 것이다.

‘상대편 써클과 언제 한 판 맞붙는다.’고 예감하여 수시로 단합을 다지며 지내왔지만 늘 불안들 했으리라. 그러니 이제 양순하게 학생과장의 지시대로 처벌에 순응하는 것은, 한 달 넘는 무거운 불안에서 벗어나는 마음 편한 행동이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해 보면서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세상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정도는 알고 있는 나이였다. 학교 선생들은 늘 “내가 너희들을 위해 백묵가루를 마시며 이 고생이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당신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실, 그런 정도는 다른 애들도 다 알고 있지 않을까? 말들을 안 할 뿐이지.

나도 모르게 달나라의 토끼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걔의 달나라 토끼 그림이 생각나 뒤돌아보니 그 공책이 그대로 책상 위에 있었다. 주인이 사흘째 자리를 비웠는데도 공책은 별 일 없었다. 공책 주인이 무서워서 보존되었다기보다는, 맨 뒤쪽의 책걸상은 그대로 둔 채 청소하는 게으른 분위기 덕분이라 보아야 했다. 나는 공책을 내 책상에 갖다놓고 앞에서부터 넘겨보았다. 삼분의 일쯤 되는 분량까지는, 서너 장씩 과목 별 이름을 첫줄에 적고 구분돼 있었다. 어떤 과목은 몇 줄 판서 내용이 적혀 있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그냥 비어 있었고 심지어는 침 흘린 자국인지 눅눅했다. 그러다가 낯익은 그림들을 보았다. 비 내리는 거리를 바바리코트 차림으로 걷는 사내의 모습, 바람 부는 언덕에 서서 치맛자락을 흩날리는 소녀의 모습……. 학기 초에 내가 그려 준 것들이었다. 남의 공책에서 발견된 내 그림은 생소해 보였다. 마치 놀러간 남의 집에서 우연히 만난 내 동생들을 본 느낌?

공책은 중간 분량을 지나면서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고 쪽지 용도로 찢겨나간 흔적들이다가 다시 온전한 장들이 몇 장, 뒤로 남아 있었다. 역시 맨 끝장에는 걔의‘달나라에서 토끼들이 절구질하는 그림’이 있었다. 나는 내가 그린 것과 비교해 보았다.

당연히 중학교 때까지 미술반 활동을 했던 내 그림이 더 세련되고 구도도 잘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왠지 걔 그림이 더 와 닿았다. 토끼 귀도 지나치게 길고 달도 타원에 가까운 촌스런 그림이었지만 이상하게 내 것보다 더 눈길이 끌리는 까닭은 뭔지.

“종례 사항 없다아!”

실장이 전하는 소리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종례시간이라 임시 담임인 노인네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누군가 실장한테 큰 소리로 씨부렁거렸다.

“니미, 종례 안 할 거면 진작 집에 보내 줄 것이지!”

노인네 임시 담임은 그 동안 조회, 종례시간마다 빠지지 않고 나타나 출석 점검이라도 해 왔다. 당신의 고루한 성격 탓인지, 아니면‘사건’ 후에 학생들 출석 점검에 철저를 기하는 학교 분위기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종례시간이 돼도 나타나지 않아 10분 이상 기다리다가, 애들이 실장한테 교무실에 가 보라 했더니 그렇게 ‘종례 사항 없다’는 걸 전하는 것이다.

애들이 우당탕 교실을 빠져나갔다. 나도 책가방을 들고 뒤따라 나서다가, 실장이 자기 책가방을 챙기면서 ‘교무실에서 본 일’을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어떤 아주머니가 담임선생과 있는 거야. 담임은 웃으면서 ‘그만 가셔도 됩니다’ 하는데 아주머니는 연실 눈물까지 흘리면서 뭘 부탁드리느라 떠날 줄 모르는 거야. 무슨 부탁인가 귀 기울여 봤더니 ‘애비 없이 키운 새끼, 이번에 사람 좀 만들어 달라.’는 거더라고. 바로 걔네 엄마더라니까. 글쎄 걔네 엄마도 딱하지, 잠시 며칠 담임 맡는 노인네한테 그렇게 울면서 자식을 부탁하면 뭐하나? 커다란 꿀 한 병까지 선물로 들고 온 모양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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