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날이었다.
2교시 수업이 시작되자 과목 담당선생이 판서부터 하는데, 걔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웬 쪽지를 건넸다. 공책종이를 한 장 찢어 만든 그 쪽지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꼰데가 날 찾걸랑 설사 때문에 화장실에 급히 갔다고 해.’
나는 필기하는 자세를 유지하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잠시 후 걔가 뒤 출입문을 살며시 여는 소리가 났고 얼마 후 다시 닫히는 소리가 조용히 나더니, 나지막한 발걸음 소리로 사라져갔다. 그것이 ‘사건’의 직전 모습이었다.
걔는 그 길로 학교 옥상에 올라가 ‘사건’에 참가한 것이다.
독수리와 청룡, 양대 폭력 써클이 학교 옥상에서 승부를 가리는 패싸움을 벌이려다가 직전에 발각됨으로써 미수로 끝난 사건이었다. 지방 신문의 사회면에 대문짝만하게 ‘○○고 다수 학생 집단 폭력……’이라 실리기도 했는데 “유혈 참극이 벌어지기 직전에 발각됨으로써 학교의 명예를 지킬 수 있었다”고 선생들은 ‘천만다행’이란 표현을 거듭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피비린내 활극이 성사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만 컸다.
두 달 가까이 교내에 드리워지던 시커먼 전운이 어이없이 흩어지다니.
무더워져만 가는 날씨 탓에 수업받기가 점점 힘들어지면서‘독수리 대 청룡’의 피비린내 활극을 기다리는 낙 하나로 버텼는데 그리 되다니.
불발로 끝난 ‘사건’이라도 그에 대해 주워들은 데까지, 아는 데까지 떠들어대며 아쉬움을 달래는 우리들.
사건 참가자들이 학생과 사무실 앞 복도에 무릎 꿇고 대기하고, 보호자들이 속상한 얼굴로 삼삼오오 학교로 소환되는 가운데 우리들은 ‘사건’의 전후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사건의 전후 사정은 이러했다.
사건 전날 청소시간에 사소한 일로 ‘독수리’와 ‘청룡’에 속하는 두 학생이 주먹질을 벌였다. 화장실의 좁은 입구에서 어깨들을 부딪친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자 싸움을 지원하기 위해 각 써클의 회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그 중 누군가 “
좁고 더러운 곳에서 이럴 게 아니라 제대로 날을 잡아 넓은 장소에서 써클 간 대결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이 즉각 받아들여짐으로써 일단 휴전이 이뤄졌고 다른 회원들은 수업에 들어가고 데빵끼리 따로 남아 대결을 벌일 장소와 날짜, 규칙까지 의논했다. 그 결과 대결 장소는 널찍하고 호젓한 학교 옥상으로, 날짜는 이튿날 2교시로 정해졌다. 규칙은
첫째; 각자 알아서 2교시에 교실을 빠져나와 써클 별로 성원이 되면 곧바로 대결에 들어간다.
둘째; 대결 시 다치거나 잘못되어도 그 책임을 상대에게 묻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처리한다.
셋째; 이번 일은 절대로 외부에서 모르도록 비밀리에 치른다. 부모한테도 말하지 않는다.
넷째; 이런 합의 사항들은 자기 써클의 명예를 걸고 지킨다.
이상의 내용들을 합의한 뒤 양 써클의 데빵은 각기 자기 써클 회원들을 긴급히 소집하여 ‘합의 사항 전달 겸 다음 날 결전 대비 전략 회의’에 들어갔다. 우리 반에서 임시 담임이 일장 ‘종례 말씀’을 할 때 누군가 교실에 있는 걔를 찾아와 급하게 뒤 출입문을 노크했던 게 그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