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따라 웃지 않았다. 당연했기 때문이다. 걔 말고 누가 감히 창밖으로 양동이 물을 내버릴 수 있을까? 벌써 교실청소는 책걸상도 나르다 말고 대충대충 쓸고 닦는 등 엉망으로 되돌아왔다.
7교시 수업 종이 울리자 걔가 어슬렁거리며 들어와 앉았는데 담배냄새와 화장실 냄새가 같이 따라왔다. 청소시간 내내 화장실에 틀어박혀 담배를 피우다 온 듯했다.
수업이 끝나고‘종례사항 없음’이란 실장의 전달을 받은 뒤 각자 책가방을 챙겨들고 교실을 나서는데 다른 때와 달리 조용한 까닭이 있었다. 복도에 웬 3학년 선배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바짝 마른 몸매에 머리 한가운데 주먹만 한 흉터가 허옇게 파여 있어 살벌해 보이면서도 정작 표정은 온화했다.
그 선배는 교실에서 나온 걔를 맞아 다정하게 팔짱을 만들어 끼고 함께 복도를 걸어갔다. 걔 체구가 워낙 커서, 바짝 마른 선배가 마치 걔한테 매달려 가는 모양처럼 보였다.
그 후로도 흉터 선배는 우리 반 복도에 자주 나타나 걔와 어울렸다. 점심시간에는 걔와 같이 밖으로 나가길 자주했는데 목격한 애들의 말로는 ‘화장실 한 칸에 둘이 들어가 담배를 함께 피우는 것 같다’고 했다.
얼마 후 흉터 선배의 정체가 알려졌다. 폭력 써클 ‘독수리’의 데빵(‘우두머리’)이었다. 교내에 있다는 양대(兩大) 불법폭력 써클 ‘독수리’와 ‘청룡’중 한 써클의 데빵이 우리 반을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전설 속 인물 같은 존재를 현실로 보게 된 데 놀랐다. 그런 인물이 2년이나 후배인 걔와 어울리는 소탈한 모습이라니.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은 걔를 보호해 주는 모습이었다.
먼젓번 하극상 사건 뒤 칼침 선배가 속한 ‘청룡’써클에서 본격적으로 걔한테 다구리 놓을(‘집단으로 폭력을 구사하다’)채비에 나서자, 독수리 써클의 데빵이 재빨리 걔의 보호막을 자임한 것이다. 무서울 게 없어 보이던 걔가 낯선 선배의 보호를 받아들인 것은, 아무리 유도 2단의 실력이라도 쌍룡 써클 전체가 다구리 놓기에 나선다면 당해낼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청룡 측에는 칼침 선배 말고도 잭나이프를 쓰는 애들이 두엇 더 있어서 걔 혼자 감당하기란 무모한 일인 게 분명했다. 바로 몇 년 전인 1963년에, 세계 최강의 레슬러 ‘역도산’이란 분이 일본의 조무래기 야쿠자의 잭나이프에 찔려 허황되게 목숨을 잃은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 후 깡패세계에서 ‘역도산이 뭐, 힘이 부족해 죽었나?’하며 자신에게 치명적인 잭나이프가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 유행어처럼 돈다 했다.
한 달쯤 지나, 걔가 독수리 써클에 정식으로 가입했다는 소문이 교내에 파다하게 나돌았다. 영화의 장면처럼, 열댓 명의 독수리 회원 모두 중화요리 집에 모인 가운데 걔가 ‘회원들이 각자 새끼손가락의 피 한 방울씩을 보태어 만든 소주 한 잔을, 무릎 꿇고 받들어 마시며 신의를 다짐하는 식’을 가졌다 했다.
놀라운 것은 1학년인 걔가 뎁빵인 흉터 선배의 후계자로 정해졌다는 사실이다. 파격적인 대우에 우리는 놀랐는데, 전후사정 얘기를 종합해 보면 그럴 만했다. 근년 들어 독수리 써클이 청룡 써클에 비해 회원 수에서 뒤지는 등 열세였기에 걸출한 인재를 파격적인 대우로 영입해서라도 판세를 역전하고자 한 속사정이었다.
피비린내를 머금은 먹구름이 교내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독수리에서 걸출한 인재를 영입해 우세를 점하려는 시도를, 청룡에서 수수방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걸출한 인재가 자기네 칼침 선배를 망신시키면서 떠오른 인물이었으니 이래저래 독수리와 한 번은 맞붙어 승부를 결정지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