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키스는 본과 2학년 때였다.

당시 나는 과커플이었다.

재벌2세라 당연히 차도 있었다(당시만 해도 캠퍼스는 넓었고, 차는 거의 없었다).

모든 조건이 구비되었으니 키스만 하면 됐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열지 않아 날 애태우게 했다.


그녀는 부산 여자였고, 내가 본 여자애 중 가장 예뻤다. 예과 2년간 그녀에게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했지만, 수업 시간에 내 눈은 늘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사실 그녀 말고도 두루두루 봤다).

본과 와서도 달라진 건 없었다. 다들 공부하느라 바빴고, 말 붙일 기회는 더더욱 없었다.


중간고사 기간 중 생리학 시험을 보는데 그녀가 갑자기 울면서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바로 휴학계를 냈다. 본1의 스트레스를 감당하기에는 그녀가 너무 여렸었던 거다. 급우가 그런 처지에 빠지면 당연히 안타깝지만, 그녀를 은근히 좋아하고 있었던 터라 내 안타까움은 더더욱 컸다.

난 다른 여자애에게 그 안타까움을 호소했고-좋아한단 얘긴 안했지만-그녀의 주소를 받아냈다.

당시 내 취미 중 하나가 편지쓰기였고,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그녀가 울면서 뛰쳐나가던 장면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예쁜 애가 왜 울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녀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다시 복학할 때까지 일년간 내가 쓴 편지는 대략 200여통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녀에게서도 심심치 않게 답장이 왔다.

우린 그렇게 친해졌고, 여름방학 때는 내가 부산에 가서 그녀를 만나기도 했다.

어느 주말엔 그녀가 올라왔고, 아쉬움을 남긴 채 부산에 내려갔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이듬해 2월, 개강을 앞두고 그녀가 서울에 올라왔다.

난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싫다고 했다.

순진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없었던 난 그 말을 진짜로 믿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같이 다니는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좋건 싫건간에 그녀와 난, 그간의 헤어짐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매일같이 만났다.

영화보고 밥도 먹고, 수다도 떨었다.

난 그녀에게 계속, 좋아한다는 얘기를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가 싫다고 했다.

그래서 난 팔짱 한번 끼어보지 못했다.


그날 난 키스를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차 안에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원했던 것은 그저 팔짱 정도였다.

늘 하던대로 난 그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가 “나도 좋아해.”란 말을 했다.

난 놀랐다.

잠시 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나는 지금이 키스를 해야 할 순간이란 걸 깨달았다.

난 말했다. “나 키스 한번도 안해 봤는데.”

그녀가 대답했다. “나도야.”

하지만 그간 봤던 영화들이 좋은 교과서가 되어 주었는지 우린 능숙하게, 그리고 오래도록 키스를 했다.

첫키스를 했다는 건 이변이 없는 한 키스를 또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어둠은 우리에게 힘을 줬고, 인적이 드문 곳은 우리가 키스할 장소였다.

우린 그렇게 사랑했다.


첫키스의 감미로움과 달리 우리의 끝은 좋지 않았다.

개강을 하자마자 우리는 과커플로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그 기간은 불과 몇 달이었다.

과커플의 좋은 점은 매일 볼 수 있다는 거지만, 헤어지고 나면 그 장점은 엄청난 단점으로 바뀌게 마련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우리가 커플이었다 헤어진 걸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이 참 힘들었던 것 같다. 사귈 때보다 더더욱.


1학기 때, 그녀는 어느 과목에서 F를 받았다.

의대생에게 F는 그 학년을 다시 다녀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그녀는 유급을 해야 했다.

그 다음 해에 그녀는 복학을 하지 않았다.

그 다음 해에도.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 졸업하고 나서도 난 그녀의 소식을 모른다.

누구보다 좋은 미녀 의사가 될 수 있던 그녀가 그렇게 된 데는 내 책임이 크기에, 그녀 생각을 할 때마다 미안함을 느낀다.

가시장미님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내가 첫키스에 관한 글을 섣불리 쓰지 못했던 건 그 미안함에서 기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쓴 것은 내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자, 그러면 덜 미안하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써놓고 보니 여전히 미안하다.

 

* 저와 곱창을, 그리고 아구찜을 같이 먹어주신, 하지만 지난 번개 때 저한테 한마디도 건내지 않으셨던 파비아나님이 바통을 이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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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5-11-01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그녀 말고도 두루두루 봤다.
아. 이렇게나 가슴아픈 이야기를 읽는데, 왜 제 눈길은 저 한 줄에 머물러 숨이 차도록 웃어버리고야 만 것일까요? ^^a
- 번개에 회비내는 것도 잊어버려 마태님께 떠 넘겨버린 주제에 할말도 많은 판다 올림-

마태우스 2005-11-01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 판다님.... 역시 유머는 한줄이라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골을 집어넣는 천재적 골게터 반 니스텔루이
어떤 상황에서도 판다님을 웃기는 마태우스...

가시장미 2005-11-01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ㅠ_ㅠ 이렇게 솔직하게 써주다니.......... 흠.... 좀 미안하네...... 고마워. 형!

sweetmagic 2005-11-0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너무 진지해서 삼류소설인지 아닌지 몇번이나 확인했어요
그나저나 미녀는 역시 부산미녀라는

퍽퍽퍽 ....매직 ! 분위기 파악 좀 하시지 ?

줄리 2005-11-0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과 2학년이면 몇살이예요? 첫키스 나이 설문조사중이어요^^

마태우스 2005-11-0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아 네...사실 삼류소설 쓰려다가 잘 안됐습니다...
줄리님/대학 4학년 나이죠. 스물한살.
매직님/맞습니다. 부산미녀가 최고죠. 그 담에 만난 여자도 역시 부산미녀였다는...
장미님/고맙긴!!! 몇잎으론 안되겠죠 아마^^

야클 2005-11-01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군요.
키스를 해 보셨네요. =3=3=3

mong 2005-11-01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가슴찡한 이야기네요
마태님의 솔직함에 한번더 감동하고 갑니다

세실 2005-11-0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예쁜 사랑 하셨네요. 마태님 때문에 잘못되신건 아닐듯...
저도 궁금합니다. 그 미녀분은 뭐하고 계실까?
근데 왜...그 미녀의 엄마가 떠오르는 걸까요?
보림이가 만약 그랬다면....워..어...어.....
추천 합니다. 제가 요즘 바빴어요~~~ 히

플레져 2005-11-01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키스의 축복을 받으셨군요.
따뜻한, 찡한...러브 스토리에요.

울보 2005-11-01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 첫키스보다 200여통의 편지내용이 궁금하네요,,,

이네파벨 2005-11-01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안하시면 찾아내셔서 책임지시죠~

moonnight 2005-11-01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커플이다 헤어지게 되면 입장이 곤란하지요. 게다가 의대 본과생들의 경우 한 교실에서 하루왼종일 붙어있어야 하니 더 그렇겠죠. 저의 과도 역시 그런데다 분위기도 정말 보수적이어서(요즘은 안 그렇겠지만) 옛날엔 커플이다 헤어지면 여자는 시집 못 간다 뭐 이렇게 말하는 인간들도 있었다는. -_-;

로드무비 2005-11-0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의 바통을 은근히 기대했는데...=3=3

야클 2005-11-01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듣고싶어요~~~해주세요해주세요해주세요 ^^

비연 2005-11-0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꼬마요정 2005-11-01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정말 저도 카테고리 확인했어요..^^;; 그런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계셨군요.. 역시 매직님 말씀처럼 미녀는 부산미녀라는...=3=3=3

2005-11-01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날개 2005-11-01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이 미안해 하실일은 아닌 것 같은데......(혹시 미녀라서 미안해 하시는 건? ^^)

페일레스 2005-11-0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뻬빠를 읽으니 또 찬바람과 함께 메가톤급 외로움이 텍사스 소떼처럼 몰려오는군요. -_-; 마태님 글 잘 읽었습니다. ^ㅡ^

플라시보 2005-11-02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첫키스라. 기억이 나긴 하는데 매우 떨렸다 이외에는 생각나는게 거의 없네요. 흐흐. 님의 첫키스의 추억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마태우스 2005-11-02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하는 순간은 떨리셨겠죠. 저도 그랬답니다. 여러가지로 고맙습니다
페일레스님/그죠? 저도 다른 분 첫키스 추억 읽으니까 갑자기 외롭단 생각이 들었어요. ^^
날개님/미안해 하긴 해야죠...저 때문에 그 학기 공부 못했잖아요...
속삭이신 분/어머나 서교동! 저희 동네군요! 제가 알지도 모르겠네요. 전공의 아니면 펠로우 아닐까요?
꼬마요정님/부산미녀 화이팅. 멍든사과님도 부산미녀예요....
비연님/네........
야클님/이런이런, 제가 바톤터치 했어야 하는데..
로드무비님/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제정신이 아니라서... 왜 로드무비님 생각을 못했을까..

2005-11-02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5-11-03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나이트님/맞습니다. 하지만 절세미녀라면 또 얘기가 다르더이다. 어떤 과커플이 깨졌다고 하니까 선배들이 우우 하고 대쉬를 했고, 그 중 한명이 영광을 안았지요... 미모 앞에선 그런 통념도....^^
이네파벨님/죄송합니다. 사실 돌이켜보면 제가 죄를 지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랍니다...
울보님/편지 내용은 그냥 제 얘기였어요. 편지는 내용보다 그 자체가 중요한 것 같아요. 하여간 그땐 술을 별로 안마셨을 때라 술 얘기는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플레져님/네........찡하긴 하죠....
세실님/님도 바쁘셨군요. 저도 요즘, 바쁜 게 뭔지 실감하고 살아요.
몽님/솔직함 빼면 제게 남는 게 별로 없죠...
야, 야클님/저를 많이 견제하시네요^^ 저도 견제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