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바빴다. 일도 많았고 술 마실 일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월요일 강의준비를 거의 못했다. 하지만 난 걱정하지 않았다. 왜? 일요일이 있으니까.

“일요일날 테니스 치고 바로 내려가서 밤을 새워가며 강의준비를 하는거야”

이 생각만으로도 강의준비가 다 완료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일이 잘되지 못했다. 테니스를 치고 10시쯤 온 건 좋았는데, 밥을 먹으면서 TV를 켰더니 US 오픈 테니스 여자결승을 해주는거다. 봤다. 끝나고 할머니를 모시고 왔고, 짐을 약간 날랐다. 그러고 났더니 남자 준결승을 해준다. 봤다. 세상에, 세시간을 한다. 결국 난 4시 기차를 탔고, 내 연구실에는 오후 6시가 다 되어서 도착을 했다. 버릇처럼 관리하는 사이트를 둘러보다 ‘이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강의준비를 시작한 건 6시 40분,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공복감 때문에 난 얼마 못가서 준비해온 샌드위치를 먹어야 했다. 밥을 먹었으니 한 십분 쉬어야지. 친구랑 전화해서 수다를 떨었다.

나: 나 천안이야! 대단하지 않니? 나 너무 열심히 하는 거 같아

그녀: 니가 드디어 마음 잡았구나. 열심히 해라.

지금까지 슬라이드를 24장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한 게 4분의 1 정도는 될까 모르겠다.


학교에 와서 자려고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속옷도 챙기고 양말과 와이셔츠도 한 벌 더 챙겼다. 그런데 모르고 반바지를 안가져왔다. 소파에 널부러져 있는 걸 ‘가져가야지’ 하다가 그냥 왔다. 어제부터 시작된 더위 탓에 학교 안은 무지하게 덥고, 내 방 역시 덥다. 할 수 없이 난 선풍기를 틀어놓고 빤스 바람으로 방에 앉아있다. 문을 잠구어 놓았으니 들어올 사람은 없지만, 이 차림으로 자다가 청소아주머니의 기습을 받을까 걱정이다. 이건 관계없는 말이지만, 팬티 아래로 드러난 내 허벅지는 정말이지 눈이 부시다. 인간의 피부가 어쩌면 이렇게 하얄 수가 있을까, 난 원래 참치에서 진화된 놈이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뽀얀 피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피부 하나는 잘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


밤을 새운다는 것, 그건 나로 하여금 한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원인이다. 내일 아침 8시까지의 시간이 모조리 내게 주어진 거라고 착각을 하기 때문.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난 자야 하고, 요 며칠 무리한 여파로-술마시느라-벌써부터 졸음이 쏟아진다. 12시부터 잔다고 가정해도 내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세시간, 시간이 그리 많은 건 아니다.


생각해보면 지난 7년간 내가 휴일날 이곳에 있었던 경험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그래도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스스로 대견하고, 이제야 제대로 된 인간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불이 다 꺼진 텅 빈 건물에 나 혼자 있다는 건 무척이나 뿌듯한 일이다. 혼자 있으니 심심하단 생각이 들고, 좀 더 어두워지면 복도를 걷는 발자국 소리에, 혹은 화장실에 갈 때 무서워할 수도 있지만, 이런 것들이 다 내일 강의를 잘하기 위한 밑거름이 될 터, 열심히 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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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11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5-09-11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쁘셨군요. 밤에 화장실 가는거 무서워 하시다니 위로가 됩니다^^ 아자~

2005-09-11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5-09-11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화장실 어떻게 가요?

인터라겐 2005-09-11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정말 열심히 하시는 교수님!!! 학생들이 그 마음을 십분의 일이라도 알아 줘야 할텐데...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피부 하나는 잘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에서 심하게 부러움을 느꼈답니다...

날개 2005-09-11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의 그 뽀얀 허벅지를 한번 보자고 하면 제가 이상한 아줌마가 되는 거겠죠? 히히~

클리오 2005-09-11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허벅지 자화자찬에.. 참치라... 인어는 어디가구요?? ^^ 그러고보니.... 오늘 밤 한밤중에 전화하리~~ 몇 시에 주무실건가요??

마태우스 2005-09-11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인어는 바다에 살죠. 참고로 저는 오늘 1시 넘어서 잘 것 같습니다.
날개님/아니 뭐 그럴 것까지야... 머리 파마하신 인터라겐님 사진을 보고 싶어하는 것과 비슷한 거 아닐까요?^^
인터라겐님/앗 님같은 미녀분이 피부가 안좋단 말입니까? 미녀의 길은 험하고 멀도다..
하루님/제가 좋아하는 사과님에 의하면 참을 인자가 세개면 못할 게 없다는군요. 참아야죠 뭐. 글구 벌써 갔군요!
만두님/늘 가장 먼저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화장실 안무섭게 가는 것 좀 가르쳐 주세요.
근데 왜 벌써 졸리는 걸까...

인터라겐 2005-09-11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클리오님이 확인 사살(?) 들어 가시려나 봅니다.... 아무래도 추천을 안누른것 같아 다시 왔어요.. 역시...안눌렀답니다.. 아무래도 요즘 약발이 떨어지나봐요..^^

플라시보 2005-09-11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정말 님의 색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군요. 홀로 팬티 바람으로 강의를 위해 준비를 하시다니요. ^^ 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분명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는 교수님 밑에서 배우니까요. 흐흐

진주 2005-09-11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 니가 드디어 마음 잡았구나. 열심히 해라. "

'그녀'가 분명 진주는 아닌데, 왜 내 말을 고대로 다 하냐구요?

야클 2005-09-11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강의 준비하는 모습도 슬라이드로 만드는 건 어떨지... ^^

BRINY 2005-09-11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종일 멍하니 보내다가 이제야 수업준비랑 다음주 대학원 레쥬메 준비 시작. 그래도 일요일은 쉬어야지..하다가도 일요일 밤마다 이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비로그인 2005-09-11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치가 속살이 그렇게 하얗던가요?

미친듯이 웃었습니다 :)

파란여우 2005-09-11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한번 허벅지 보여줘요
제 무릎 공개했잖습니까...우헤헤^^*

마태우스 2005-09-11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님/어머 고양이님 그런 거에 웃어주심 안되요^^
브리니님/일요일 밤마다라니, 그럼 매주 이러시는 거군요. 전 처음으로 해서 뿌듯한 거죠...마음이 아파요
야클님/님이야말로 제 허벅지가 보고 싶으시군요. 으음...
속삭이신 ㄸ님/제가 죄송하죠. 하나밖에 못사드려서요...소주야 뭐 언제든 좋습니다
진주님/앗 제 친구인 그녀가 진주님이셨나봐요!
따우님/아 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겸허히 살겠습니다.
플라시보님/아니 뭐 그렇게까지...^^ 팬티바람이라는 구절에서 굉장히 감동하신 듯..
인터라겐님/어맛 님 덕분에 추천이 둘이군요! 호호 고마워요. 뒤늦게라도 눌러주심 좋죠 ^^

마태우스 2005-09-11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디카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날 허벅지 한장 찍어서 올리겠습니다. 사진기가 제 하얌을 100% 표현할 수 있으려나.... 그게 역광이거든요^^

실비 2005-09-11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피곤하시겠당.. 밤에 화장실은...
글쎄요.. 20년 동안 다닌곳이라 이제 무섭지가 않네요.ㅎㅎ 참고로 화장실이 아파트화장실이 아니라 푸세식이라... 보통 푸세식이 무섭다고 하지요.^^;;
완적 적응이 됬나봅니다.ㅡ_ㅡ 서울에 있는 촌이라.;;
화장실 가실때 저한테 전화하셔요~ 즐겁게 이야기하면 하나도 안무서울듯.ㅎㅎ

미완성 2005-09-11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밤의 조용한 건물...아아, 딱 모여서 술 마시기 좋은 분위기군요. 안타깝습니다. 왜 알콜 한 방울 없이 밤을 지새려 하시나요! 쉬엄쉬엄하세요 마태님..님의 하이얀 허벅지가 혹 피곤해하지는 않을까, 그래서 그 피부가 상하진 않을까 걱정됩니다. 참고로 피부엔 사과가 참 좋답니다;

히나 2005-09-1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교수님, 일요일밤을 공부로 불사르고 계시는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전 지금 리뷰 쓰려고 큰만 먹었다 쫄면에 월드콘까지 먹는 바람에
배 불러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요 윽 ;;;

마태우스 2005-09-1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노우드롭님/혼자 있을 때 이런 적이 없는데요, 술이 땡겨요. 지금 찬장에는 친구가 전에 선물한 양주-메이커 아닙니다-가 있는데... 새우탕면이랑 같이 먹을까봐요...
사과님/제말이 그말입니다. 피부엔 사과가 좋죠^^
실비님/아이 전 쑥스러워서 막상 전화하면 말 못합니다 부끄러워요...

paviana 2005-09-11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교수님들도 강의 땜에 밤을 세우시는군요.저 감동먹었어요.
전 오늘 성묘 갔다 왔는데 겁나 더웠어요 ( 속으로는 졸X 더웠다고 말하고 싶지만 -_-) 어른들도 꼭 삼복같다고 하셨다니까요. 더위먹었는지 지금까지도 헤롱대고 있어요.자고 싶은데 어른들이 모두 저희집에 오셔서 광파시고 계셔셔 ㅠㅠㅠ
열심히 하시고 잘 주무세요..님이 딱딱한 의자에서 주무신다고 생각하니 맘이 아프네요..

manheng 2005-09-12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열심히 하시는 교수님이시군요 ㅎㅎ 저에게도 그런 존경스런 교수님이 있습니다요. 오늘따라 갑자기 그 분이 생각나는 ㅎㅎㅎ

이리스 2005-09-12 0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밤 홀까딱 새버렸어요. ㅠ.ㅜ
엉엉.. 졸려요... 저는 강의 준비하는게 아니고.. 웅.. 일하느라궁..

moonnight 2005-09-12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대단하십니다. 밤을 새서 강의준비를 하는 교수님. 학생들이 그 정성을 알아야 한다구요. ^^

2005-09-12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