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8월 19일(금)
누구와: 한국 굴지의 출판사 분들과
마신 양: 소주 한병-> 맥주 몇병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다. 내가 계산을 해야 마음이 편하다고 느끼게 된 것이. 어릴적 기억을 더듬어 근원을 찾아보자면, 내가 용돈을 안받았던 것에서 기인했지 않을까 싶다. 늘 수중에 십원 한 장 없이 지냈던 나는 친구들한테 늘 얻어먹어야 했다. 그렇게 떡볶이를 먹고, 공짜인 오뎅국물을 먹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되던 그 시절은 날 남의 신세를 지지 않는 아이로 바꾸어 놓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생각보다 유전자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이론이 훨씬 더 마음에 와닿게 된지라, 지금의 행동양식을 어린 시절에서 찾는 게 부질없어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내 유전자에 ‘니가 내라’는 명령어가 깊이 입력되어 있을지 모른다. 이유가 어느 것이든 난 내가 내는 걸 좋아하고, 저항에 직면하면 화장실에 가는 척 하면서 돈을 내곤 한다. 술이 취하면 계산하고픈 마음은 훨씬 심해져 버리는 것도 내 특징 중 하나다.


계산을 하는 게 꼭 손해나는 일만은 아니다. 아마도 나는 계산을 함으로써 남들로부터 고맙다는 소리를 듣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마음이 넉넉한 사람으로 인지되려면 내가 돈을 내야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냈을까 후회될 때가 가끔 있다. 그 중 하나가 몇 년 전 우리 써클의 여름진료 애프터였다. 6박7일간 강원도로 진료를 갔다가 서울에 돌아오면 우리는 대학로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맥주집에서 2차를 한다. 땀에 전 50-60명의 학생들, 일주일간 나름대로 일을 하고 온 터라 그들은 밤새 놀 각오가 되어 있었고, 거기 걸맞게 무진장 술을 마셔댄다. 집에다가는 7박8일이라고 얘기하고선. 진료를 가진 않았지만 그 애프터 자리에 불려나갔다. 그 자리에서 선배가 할 일은 그냥 격려금 조로 돈을 건네주는 것. 하지만 술을 꽤 마신 탓에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고, 취했을 때 하는 버릇대로 난 계산대에 가서 조용히 “지금까지 얼마예요?”를 물었다. 난 카드를 건네줬고, 카드전표에 싸인을 할 때 손이 떨렸다(액수가 너무 커서). 그리고 나서 난 집에 갔다.


그 돈, 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 새벽 두시, 학생들은 다 취해 있었고, 침낭에 들어가 자는 애도 있었다. 그게 두고두고 억울했던 나는 친구를 시켜 “그때 내가 계산했다고 좀 써줘”라고 말했고, 그는 그 사실을 써클 게시판에 올렸다. 그래서? “xx 형, 고맙습니다”라는 댓글이 하나 달렸을 뿐, 조회수도 별로 없었다. 댓글이 열 개가 달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생색을 내고자 했던 게 좌절된 마당에.


얼마 전 또 그런 버릇이 나왔다. 모 출판사 분들의 초청으로 술자리를 가졌을 때의 일이다. 그쪽에서 날 초청했고(1), 그들은 다섯이고 난 혼자(2), 게다가 나보다 연배가 훨씬 위인 사장님까지 나오셨다(3). 이럴 때 내가 내는 건 정말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난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굳이 계산을 했는데, 나갈 때 그 사실을 아시고 낯빛이 변하는 사장님의 얼굴에서 난 내가 큰 결례를 했구나 싶었다. 한 세 번쯤 “죄송합니다”라고 말했지만, 죄송할 짓을 왜 하는 걸까. 그나마 2차에서 친구 전화를 받고 도망가기까지 했으니 이중으로 미안했다. 좋은 분들을 알게 된 걸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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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8-28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정도면 중증이신데요?^^

마태우스 2005-08-28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사탕님/그렇죠? 고쳐야지 하면서도 잘 안되요...

미완성 2005-08-28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한동안 저에게 카드를 맡겨두세요.

하이드 2005-08-28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결례라는걸 알긴 아는군요.

마태우스 2005-08-28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과님/님은 너무 멀리 있잖아요... 세번 약속도 안지키시구...핏!

마태우스 2005-08-28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알긴 알죠^^

하루(春) 2005-08-28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이제는 좀 얻어드세요. ^^

진주 2005-08-28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멍든사과님이 좀 멀리 계시더라도 무조건 카드 맡기세요~

미완성 2005-08-28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사과와 사랑의 마음을 담아 추천 한 방 때릴께요 헤헤.
진주님/ 안녕하세요! BC카드는 빨간사과 마태카드는 멍든사과! 저의 마음을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호호호.
그럼 저에게 맡긴다 치시고요, 카드의 자석부분을 확 긁어놓는 게 어때요? 재발급 받는 데 시간도 걸릴테니 그동안은 쓸 일이 없잖우??

sweetrain 2005-08-28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드 저한테 맡기세요. ㅡ.ㅡ 전 그걸로..음음 야구경기밖에 안 볼께요.(그나저나 입장료가 카드로 결제가 되던가...ㅡ.ㅡ)

마늘빵 2005-08-28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그렇게 해서 쓰신 돈이 상당할텐데... 마태님 술 드시면 안되겠다.

panda78 2005-08-28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진짜 그 버릇 고치셔야 하는데... 돈내고 죄송하면 어쩐대요?
그게 결혼하면 좀 나아지는데 말예요.험험..

인터라겐 2005-08-28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멍든사과님.. 재벌님의 카드인데 거리가 대숩니까...달려가서 받아 오세요.^^

라주미힌 2005-08-2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제 주위에는 마태님 같으신 분이 없을까요... ㅎㅎㅎ
술을 싫어해서 그런가.

클리오 2005-08-28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 얻어먹는 것도 한, 두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마운 정도까지만 하셔요,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시구요. 기껏 돈쓰고 별로 좋지 않은 이야기까지 들으면 기분이 별로잖아요... ^^ 그래도 마태님은 늘 고마워요~

검둥개 2005-08-29 0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말씀이 백번 맞습니다. 얼른 장가를 가시는 게 좋겠어요. ㅎㅎ

paviana 2005-08-29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멋 마태님 가시면 전 섭섭해서 어쩌죠..곱창에 소주 먹을 사람이 없어지잖아요..
카드는 한도를 대폭 낮춰달라고 카드사에 저나한방 때리세요..

moonnight 2005-08-29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술마시면 계산하는 버릇이 있어요. ㅠㅠ 마태우스님처럼 재벌도 아닌 주제에 -_-;;

marine 2005-09-14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 전 부서 사람들에게 한 턱 쏘기로 하고 닭집에 갔는데 (치킨 파는데 말고 닭요리 코스로 나오는데) 누가 소문을 냈는지 타부서 직원들에 가족까지 데리고 와서 카드 낼 때 손이 부르르 떨렸답니다 사장님이 자기가 절반 부담하겠다고 했는데 그럴 순 없죠, 호기롭게 말하고 계산대로 가서는 싸인하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는 후문이... ^^

마태우스 2005-09-14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님/타부서랑 가족은 좀 그러네요. 미리 양해를 구했으면 모를까... 손 떨리고 약간 억울하기도 하셨을 거예요...
문나이트님/우리, 그 버릇 고쳐봅시다!
파비아나님/제가 어딜 갑니까. 그리고 요즘 인생관이 바뀌었어요. 파비아나님이랑 곱창 대신 부산아구 먹어요
검둥개님/에 또...모든 문제를 장가로 푸시려는 생각, 아주 위험하다는군요^^
클리오님/호홋, 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열심히 쏠께요
라주미힌님/그건 님이 '미힌'이기 때문이죠^^
인터라겐님/사과님이 오신다면 드려야죠
판다님/아니 뭐, 그 후에 다시금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으니까...에 또...
아프락사스님/제 조직이 유지되는 비결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에...
단비님/죄송합니다. 사과님이 먼저 찜하셨습니다...^^
사과님/우리가 그래서 인연인가봐요. 언제 오실래요?
진주님/앞으로는 바르게 살아볼께요...
하루님/네...어제도 얻어먹었어요...

기인 2006-05-28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가난한 인문학도임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증상이 있습니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