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리기가 좋다는 건 다 알지만, 실제로 달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다른 스포츠와 달리 뜀박질이란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이고, 완주 후에는 기쁘지만 뛰는 동안엔 지겹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달리기의 성패는 어떻게 하면 지루함을 잊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헬스장의 러닝머신 앞마다 TV가 설치되어 있는 이유도 TV에 집중을 하면 덜 지루하기 때문이다.
살을 빼기 위해 달리기를 열심히 하기로 한 나, 토요일 오전마다 올림픽 공원을 한바퀴-5킬로쯤 된다-돌고, 시간의 여유가 허락한다면 출퇴근길에 버스를 탈 거리를 달려서 간다. 헬스장과 달리 길가에는 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으니, 머리속으로 온갖 즐거운 상상을 해야 한다.
노래도 불러보고, 글 쓸 소재도 생각해보고 그러다, 얼마 전부터 나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강남에 빌딩을 23채나 가진 재벌2세 이야기로, 대충 요약하자면 이렇다. 의대를 졸업한 후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정민(두글자다)은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변호사가 된다. 다달이 27억씩 나오는 임대료 수입으로 뭔가 사업을 벌이기로 한 정민은 의료소송을 전담하는 법률회사를 세우고, ‘미래와 희망’이라는 산부인과 병원을 만들며 큰 돈을 번다. 무술의 달인인 보디가드 둘이 그를 수행하고, 절세의 미녀 다섯명으로 이루어진 비서 팀이 정민을 수행한다. 비서 팀의 팀장인 최연화는 정민을 사모하며 자신의 마음을 그가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같은 팀의 왕지현을 비롯해서 그를 짝사랑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는 걸 알고는 괴로워한다. 다달이 불어가는 수익을 감당할 수 없던 정민은 점점 사업을 확장해 나가며 영화 쪽으로도 손길을 뻗치는데, 그 과정에서 연예인들과 어울리게 된다. 가수 유니는 공개적으로 좋아한다고 프로포즈를 하지만, 정민은 “마음만 받겠다”며 그녀의 구애를 거절한다....
현재 진행된 얘기는 여기까지다. 쓰고 보니 나도 어이없어서 웃음만 나오지만, 이 얘기를 혼자 하다보면 괜시리 즐거워져 달리기의 고통 따위는 잊게 된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얘기지만 나 혼자만 듣고 마는 거라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 일은 하나도 없을 것 같다. 문제는 이렇게 혼자 웃다 끝낼 얘기를 굳이 시나리오로 만들어 드라마화하는 작가들이 제법 많다는 것. 재벌 2세가 등장하고 시각 장애자가 눈을 뜨며, 건강하게 살던 애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등 우연적인 요소가 판을 치는 <슬픈 연가>를 비롯해서 기억상실, 재벌2세, 계모의 박해 등 전래동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천국의 계단> 등 보고 있자니 짜증이 나서 더 이상 못봐주겠는 드라마가 얼마나 많은가?
먼저 이야기가 유치한지 아닌지 아는 것이 중요하겠고, 유치한 걸 안다면 전 국민이 다 듣게 하기보다는, 그냥 혼자 얘기하고 즐기면 될 일이다. 말이 안되는 신파극만 계속 남발한다면, 내 이야기를 드라마화 해버리는 수가 있다. 정민 역에 권상우를, 최연화 역에 김희선을 써서 드라마로 만든다면 <슬픈연가>가 기록했던 20% 시청률은 나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