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이홍렬이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지하철을 탄 그는 자기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도 편해, 코고, 이빨에 낀 고춧가루도 떼고 그랬단다. 한참을 그러는데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사람이 그에게 다가왔다.
"이홍렬씨 맞죠? 팬입니다"
언제나 보는 눈은 있다.

엊그제 학장님과 추어탕을 먹는데-이거 너무 우려먹는군!-벽에 걸린 달력이 내 시선을 끈다. 여자 사진이 걸린 달력인데, 보통의 여자들은 가슴 아래는 철저히 가리고 위는 보일랑말랑하게 놔둠으로써 섹시함을 연출한다면 사진의 여자는 위만 가리고 가슴 밑은 그대로 노출하는 파격적인 차림이다. 물론 가슴도 크고. 그 모습이 하두 신기해 밥을 먹는 동안 여러 차례 달력에 눈이 갔다. 밥을 먹고 나가는데 학장 비서랑 교학과 사람이 달력 얘기를 하기에 한마디 거들었다. "아, 그 달력! 너무 야하더라구요"
학장 비서의 말이다. "교수님은 계속 그 달력만 보시던데요?"
"옷이 희한해서 패션에 중점을 두고 본 거예요"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거다. 언제나 보는 눈은 있다.

난 양복을 잘 안입는다. 초창기엔 강의 때는 꼭 양복을 입었지만 "강의의 질로 승부하겠다"는 아리송한 말과 함께 캐주얼한 복장으로 강의에 간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결혼식 때마저 "외양보단 마음이 중요하다"는 개똥철학을 내세우며 늘 입던 옷차림을 하곤 한다. 그러니 내가 양복을 입는 날은 가을과 봄에 열리는 학회 뿐이다. 학회에 가입한 뒤 네 번째의 학회에 참석했을 무렵, 모대학에 계시는 선생님이 날 보고 이런다.
"서선생은 단벌이야? 맨날 그 양복만 입네?"
난 다른 사람의 양복 따윈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던데, 그는 어떻게 단 네 번만에 그 양복의 존재를 알았을까? 치사해서 양복을 더 사긴 했는데, 정말 언제나 보는 눈은 있는 것 같다.

이번엔 내가 그 보는 눈이 된 경우다. 십년쯤 전에 여자친구를 마중하러 공항에 갔는데, 내가 아는 어떤 사람-나보다 선배다-이 나온다. 반가워서 아는 체를 하려했지만, 생판 처음 보는 여자가 달려와서 안긴다. 그의 부인도, 딸도 아닌 그 여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걸 목격하고 나서 한동안 입이 가려웠지만, 난 그에게 그 여자가 누구냐고 끝내 묻지 못했다. 참고로 그 선배는 지금도 오붓하게 잘 살고 있는데, 한 십년 쯤 지나면 그에게 한번 물어볼 생각이다.

케빈 베이컨 게임이라는 게 있다. 여섯다리만 거치면 세계 어느 누구랑도 연결된다는 것. 예컨대 전지현을 예로 든다면, 나는 단비님과 알고 지금은 삭발 중인 단비님은 한때 CF에서 전지현의 윤기나는 머릿결의 대역을 했으니 두다리만에 아는 게 된다. 나만 해도 초등학교 때부터 동창만 따지면 이천명에 달하고, 여기저기 속한 단체까지 합치면 그보다 훨씬 많아지니 국내 같으면 여섯다리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대도시가 익명성이 보장되는 것 같아도 나쁜 일을 하면 그대로 걸리는 건 그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바르게 살아야 한다. 꼭 보는 눈이 많아서가 아니라 죄를 지면 사람이 떳떳하게 살 수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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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4-07-23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빈 베이컨 게임과 대도시에서의 익명성의 불가능성에 대한 말씀은 맞는 말씀인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생각은 아직까지 못해봤는데...... 역시 마태우스님의 혜안에 감탄을 보냅니다. 그런데 역시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불특정 다수(내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에게 등)에게 노출된다는 건 정말 불편한 것 같아요. 뭐 대인관계가 협소한 저는 아직 그런 적이 별로 없지만요......

sweetmagic 2004-07-23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세상 참 좁더군요. 본의 아니게 노출이 되는 경우도 있구요.
보는 눈만 눈이 아닌데..때로는 보고도 못 본척 해주기도 했음 좋겠어요.

머털이 2004-07-23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보는 눈은 있다' 라...
기관지염 때문에 가래가 자주 나오는데 길가다 주위에 아무도 없어도 못 뱉겠더라구요..
윽! 써놓고 보니 너무 더러븐 얘기네요 ㅋㅋ..

털짱 2004-07-23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상치못한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건 늘 당혹스럽다.
언제쯤 익숙해질까?

sweetmagic 2004-07-2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털짱님 ~ 예상치못한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건 제가 일등 입니다.
아직 *팔려 죽지 많은 건...제 명이 질긴건지.. 아직 겪어야 할 사건이 많이 남은 건지
알 수가 없어요 흐흑,...

stella.K 2004-07-2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마태님, 남 안 본다고 코 후비고, 이에 낀 고추가루 떼고, 머리 안 감아서 긁적거리고 하지 말아요. 다 봅니다. 흐흐.

털짱 2004-07-23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영장 간다고 세수도 안하고 머리도 안빗고 바야바와 같은 꼴로 나갔다가 옛날에 사겼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으으,... 너무 민망해서 수영장 물을 다 마셔버리고 싶었다니까요!!

2004-07-23 1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갈대 2004-07-23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사 본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상하게 잘못한 일은 나중에 꼭 밝혀집니다. 잘한 일도 마찬가지구요. 제가 나쁜 짓을 할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제 팔을 붙둘고 '갈대님 이러시면 안 되죠'할까 두렵습니다.

starrysky 2004-07-23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말은 안 했지만, 아는 척도 안 했지만, 이 알라딘에도 제가 예전부터 아는 분이 몇몇 계신 것 같아 두려워하며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제가 비밀주의,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이유가 바로 그러라지요~ 정체가 발각되면 즉시 과거사가 폭로되면서 매장당할 테니까.. ^o^

가을산 2004-07-23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 여자, 아마 동생일거에요. 처제이거나.

sweetmagic 2004-07-23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털짱님 ~!! 제꺼 중에 제일 약한 사례하나 들지요. 회사 동료가 인생이 너무 안 풀려 죽고 싶다고 찡찡 거리던 날... 인생 최대로 꾀죄죄 하게 된 날 임에도.불구하고 회사 동료가 좋아하는 떡복이 먹으러 가다가요...길거리에 펫트병 잘라서 병속에 촛불 켜놓고 ㅣ상한 동자승 그려놓고 빨간 꽃 머리에 꼿은 점쟁이한테 점을 보겠다는 회사 동료 때문에 하는 수없이 비까지 살짝 살짝 들치는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제 인생에서 제일 멋지게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한 옛 남친이랑 눈이 딱 마주쳤지요.... 제꺼 본 것도 아닌데...여튼 그날 이후 며칠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울었슴다.... 아..급핟게 쓰니까 실감 안 납니다만....어쩄든..... 이건 약한 사례 중에 하납니다. 흐흑

부리 2004-07-23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43세된 남자에게 안기는 20대 동생이라... 님은 너무 마음이 좋으세요^^
스윗매직님/님의 길지 않은 인생에는 어찌 그리 희한한 일이 많사옵니까? 마치 보물창고 같아요.
스타리님/에이 설마요. 알던 사람이면 결국 꼬리를 밟히게 되어 있답니다.
갈대님/그러시면 안되요!!!
털짱님/누군가가 수영장 물을 마시고 있다면 님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걸로 이해해되 되겠지요?
스텔라님/제가 늘 감시하니까 별일 없을 겁니다.
머털이님/뭘 그런 걸 가지고... 노상방뇨보다야 낫지요
로렌초의시종님/그러고보니 엊그제 님을 본 것 같아요.....<--뻥이어요. 무섭죠???

sweetmagic 2004-07-23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카로우신 저희 어머님에 분석에 의하면 한시도 쉬지않고 뽈뽈거리며 싸돌아다니고,
조용조용 얌전하게 생겨서는 이짓 저짓 안 저지르는 짓이 없고,
꼼꼼하고 차분하게 생겨서는 덤벙덤벙 안 치는 사고가 없다나요 ?
오죽하면 제가 점쟁이 붙들고 " 저 혹시 제 사주에 역마살 같은 건 안 들었어요 " 하고
진지하게 물어봤겠습니까 ^^;;; - 없다고 했는지만..어쨌든 전 오늘 저녁 밤 기차타고 여행갑니다.
저 없는 새러데이 앤더~ 선데이 ~~ 알라딘 잘 지켜주세요~~!! 사고 많이 치고 올게요~!

mira95 2004-07-23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더 정갈해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요^^ 마태우스님의 글을 읽으니 혼자일때 항상 제멋대로인 저를 반성하게 되네요..

로렌초의시종 2004-07-23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무서워요......

로드무비 2004-07-23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만 보니까 위 스윗매직님 글 되게 재밌네요.
조용조용 얌전하게 생겨서는~
꼼꼼하고 차분하게 생겨서는~
보통분이 아니십니다.^^ 멍든사과님은 주무시나?

ceylontea 2004-07-23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나는 모르는데... 나를 알고 있는 사람도 꽤 많다지요...
마태우스님은 저보다 더 마태우스님은 모르시는데.. 마태우스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 무척 많을 것 같아요.

미완성 2004-07-23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는 눈들 때문에 방구도 꼭 도둑방구로만 끼잖아요-_-;;

아아, 로드무비님. 어떻게 아셨어요?? 저 정말 잤는데 ㅠㅠ

메시지 2004-07-23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세상이 두려워지네요. 조심조심. 제가 가끔씩 술먹고 갈지자로 좀 걸어서요...

마냐 2004-07-23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는 눈 신경쓰다가......'차카게 살자' 스트레스....이것도 현대병이여요.

방긋 2004-07-24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는 눈'이라....
저도 보는 눈을 의식해야 할 상황이 많은데... 심히 무섭슴돠~
그렇지만 늘 제가 해 오던 식으로 안면 깔고(?) 살지요, 뭐.
머리 복잡한 것은 질색이라서 - ., -a

nugool 2004-07-24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세다리만 건너면 왠만하면 다 아는 사람인 거 맞아요. 생각보다 세상이 얼마나 좁은데요.. 아마 마태우스님과도 몇다리 안건너서 만나게 될걸요? ㅋㅋ

2004-07-24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weetrain 2004-07-28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저와 부시의 관계는, 저-우리 과 주임교수님-총장님-노무현-부시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