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소설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호명한 분은 읽으실 때 마음을 단단히 먹어 주십시오. 조선남자, 플라시보, 스윗매직, 너굴, 그리고 마냐.
패왕별꼴
"우리, 그럼 이제 다시 못만나?"
조선남자가 울먹였다. 고개를 숙인 채, 난 푸념조로 내뱉었다. "그래, 이 땅에서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가봐"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봐도 돼?"
난 쓸쓸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해봤자 미련만 더 남을 뿐이었다. 내 도리질에 담긴 뜻을 파악했는지 조선남자가 뒤로 돌아섰다. 그리곤 힘없이 한발, 한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내게 남성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가입하고 나서부터였다. 서재 이미지로 올려진 남자의 상반신 누드를 봤을 때, 숨이 턱 막혀 왔다. '조선남자라... 겁나게 섹시한 걸?'
인기서재의 주인공 진우맘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서재 번개모임에 조선남자가 나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숫제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검은옷을 입고 나타난 조선남자는 역시나 섹시했다. 사진에선 길던 머리가 짧아졌지만, 그건 그의 섹시함을 한층 더 도드라지게 했을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마태우습니다"
난 수줍게 내 소개를 했고, 조선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촉촉한 손이었다. 자기 소개를 하기 위해 일어난 아영엄마가 눈치를 주지 않았다면, 난 아마도 그 손을 놓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난 기회를 봐서 조선남자 옆에 자리를 잡았고, 남들이 질투를 느낄 정도로 둘이서만 얘기를 나눴다. 그가 휴대폰 번호를 알려줬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술에 적당히 취한 채 집에 오면서, 살아오면서 내가 남자를 좋아한 적이 있는지를 떠올렸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대학에 간 후부터 여러 명의 여자를 사귀었고, 좀 늦은 편이긴 해도 30세 때 첫경험을 했다. 강남역 등지에서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여자를 보면 남보다 더 즐거워하면 즐거워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이 느낌은 뭘까?' 군대나 감옥처럼 동성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에서는 흔히 남자끼리 좋아하는 일이 생긴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게이는 아니다. 사정이 어렵다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전문용어로 상황적 게이라고 한다-제대를 하고 나면 원래대로 돌아간다.
'그런데 난?'
내가 최근 들어 남자들을 유독 자주 만나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잠에서 깨자 휴대폰 문자 메시지가 와 있다는 신호음이 울린다. 아마도 그 신호음이 날 깨운 것 같았다. "누구야? 아침부터" 전화기의 폴더를 연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 메시지는 매너리스트에게서 온 거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마태우스님, 저 매넙니다. 상의드릴 게 있는데 오늘 시간 되세요?]
원래는 알라딘에 글을 왕창 올릴 생각이었지만, 매너가 상의할 내용이라는 게 궁금했던 터라 난 괜찮다는 답신을 보냈고, 몇차례의 서신교환 끝에 오후 다섯시에 홍대앞 <검은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선남자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느닷없는 매너의 말에 난 마시던 물을 그대로 내뱉었다. 매너리스트가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얼굴을 닦았다.
"그,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어요? 어떻게 생각하다니?"
정곡을 찔려서인지 난 도에 지나치게 화를 냈다. 매너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머쓱해진 나머지, 난 말을 이었다.
"어떻게 생각하긴요? 그냥 글 잘쓰고 멋진 분..."
"그런 거 말고, 정식으로 사귈 생각이 있느냐는 겁니다"
입안에 든 물만두가 기도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어제 술자리가 끝난 뒤 조선남자가 한잔 더 하자고 하더군요. 별 생각 없이 갔더니..."
매너의 말에 의하면 조선남자는 첫눈에 나에게 반했다고 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하는 감정이 몰려왔고, 내 옆에 앉아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행복감을 느꼈단다.
"그래서 제게 마태우스님의 의향을 좀 물어봐 달랍니다. 자기는 죽어도 말을 못하겠다고..."
"...."
그날 난 매너에게 답을 주지 못했다. 물어볼 거면 내게 직접 물을 것이지, 왜 제3자를 통해서 하는 걸까? 박력있게 생긴 외모와 달리, 소심한 그의 태도가 얄미웠다. 직접 말한다 해도 내가 제대로 대답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후 난 보름이 넘도록 고민에 고민을 했다. 조선남자에게 전화할 용기는 없었다. 일주일마다 30명에게 주는 5천원의 상금을 타려고 열심히 글을 쓰긴 했지만, 재미가 주 컨셉인 평소 글과는 달리 그때의 내 글에는 우수가 짙게 깔려 있었다. 여러 사람이 내 글에 리플들을 달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조선남자의 글은 없었다. 불현듯 그가 잘 지내는지 걱정이 되었지만, 이내 난 고개를 흔들었다. 모임 참석자들이 쓴 번개 후기 중 나와 조선남자가 유달리 친한 것에 대해 언급한 글이 몇 개 있었다.
[작성자: 연보라빛우주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마태우스님과 조선남자님의 로맨스였지요^^]
[작성자: 수니나라
...마태님이랑 조선남자님이 아무래도 사귀는 것 같다^^..]
나답지 않게 난 그 글에다 '서재주인보기'로 신경질적인 리플들을 달았고, 예상치 않은 내 반응에 두분은 사과와 함께 그 대목을 삭제했다. 물론 그런다고 내 기분이 나아진 건 아니었지만. 정신과를 찾은 적도 있었다.
"저, 그 동성애라는 거 말입니다. 제 얘기가 아니라 친구 얘긴데요, 그게 사춘기 다 지나고 서른도 넘어서 발견될 수 있는 건가요?"
가을산 원장은 한참 내 설명을 듣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실은 제가 전공이 가정의학과라서 동성애 쪽은 별로 아는 게 없어요. 하핫"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난 잠을 깼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중 겨우 잠이 든 터라 내 목소리엔 졸음과 함께 짜증이 가득 묻어 있었다. "여보세요" 하지만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몸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마태우스님... 저 조선남잔데요, 지금 동호대교 남단에 와 있어요"
매너를 통해 내가 자신을 거부한 걸 알고는 날 잊으려고 무진장 노력을 했다고 했다. 사창가에도 가보고, 과 선배에게 여자를 소개받기도 했단다. 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고, 그래서 집 근처 다리에서 뛰어내려 죽으려다 전화나 한번 해보고 죽자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기,기다려요. 당장 갈께요! 제발, 십분만 기다려요!"
난 급히 길거리로 나가 택시를 집어탔다.
"동호대교요!"
택시 기사가 날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제서야 난 내가 팬티 바람으로 나온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런 걸 걱정하기에는 너무 상황이 급했다.
"빨리 좀 가주세요, 네?"
동호대교가 가까워질수록 난 마음이 조급해졌다.
'제발 살아만 있어라'
그가 살아 준다면, 남은 여생을 그와 함께 보내리라고 맘 속으로 생각했다.
"조선남자님! 조선남자님!"
동호대교를 남단에서 북단으로 거슬러 가면서, 난 목이 터져라 조선남자를 불러댔다. 팬티 바람의 사내가 나타나자 달리던 차들이 날 보느라 급정거를 해댔고, 접촉사고를 일으킨 차도 있었다.
"조선남자님!" 다리를 절반쯤 건넜는데도 그가 보이지 않자 난 적잖이 초조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한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태우스님?"
조선남자는 난간에 기대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살아 있었구나!' 난 부리나케 그에게 달려갔다. 내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선남자는 숫제 소리내 울었다. "엉엉엉" 우린 그렇게 오래도록 껴안고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우리를 떼어놓을 때까지.
"아버님, 어머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심각하게 나가자 파란여우는 긴장하는 듯했다. "그게 뭔데?"
"저... 남자를 사귀고 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두분은 내가 말한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신 듯했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요, 전 게이입니다. 호모라고도 하죠"
"뭐?" 메시지의 눈이 황소처럼 커졌다. "내가 낳은 게 호모 새끼라고??"
파란여우 역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마태우스, 너 그거 농담이지? 그렇지?"
난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순간, 뭔가가 날 향해 날라오는 게 느껴졌다. 난 잽싸게 몸을 날렸다. 시속 130킬로로 날라온 자몽상자는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당장 나가! 나가서 들어오지 마!"
메시지의 염소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커밍아웃을 선언한 조선남자 역시 비슷한 고초를 겪고 있었다.
"누나, 게이는 범죄자가 아니야. 누나만이라도 이해해 줘"
조선인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리가! 징그러! 아니 역겨워! 내 집에서 당장 나가!"
수모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땅에서 우리를 받아줄 만한 곳은 없었다. 거듭된 시련에 지친 난 결국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만 더 안아보면 안돼?" 이 말에 고개를 젓는 것으로 난 조선남자를 떠나보냈다.
난 집에 들어갔고, 부모님 말을 듣겠다고 약속했다. "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겠습니다. 제가 한때나마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부모님은 돌아온 날 받아 주셨다. 그날부터 난 파란여우가 주선하는 선 자리에 끌려다니느라 바빠졌다
"스타리 스카이라고 해요. 취미는 하늘의 별을 보는 거랍니다. 네? 아, 이거요. 하늘 보다 목이 삐끗해서 기브스를... "
"스윗매직이라고 합니다. 35-24-34에요. 부끄러워요"
"앤티크에요. 취미는 잠수죠, 하하"
조선남자의 빈자리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선 자리에 나온 여자들은 하나같이 미인이었지만, 난 그들 중 누구도 선택할 수 없었다.
조선남자로부터 온 이메일을 봤을 때, 난 그걸 삭제할까 말까를 한참 동안 고민해야 했다. 겨우 일상으로 돌아온 터라, 다시금 마음이 흔들리고 싶진 않았다. 결국 난 '완전삭제' 버튼을 눌렀다. 조선남자는 그 뒤에도 계속 메일을 보냈지만, 난 계속해서 삭제 버튼을 눌렀다.
"조선남자, 우리 다른 세상에서 못다핀 사랑을 이루자꾸나. 여긴... 아니야. 그리고 난 사랑보다는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형편없는 EGOIST라고!"
문자 메시지도 부지런히 왔다. '이멜 안봤지? 급히 할말이 있으니 연락해' 난 답신하지 않았고, 그가 거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 조선남자가 날 찾아온 건 그렇게 보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여느 때처럼 술에 취해 집으로 가는데, 전봇대 뒤에 숨어있던 남자가 내 어깨를 잡았다. 내겐 너무나도 익숙한 손길, 예민하게 반응하는 내 몸은 그가 조선남자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할말 없어. 저리가!"
쌀쌀하게 쏘아붙이면서도 내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제발 내 말 좀 들어봐. 우리가 헤어지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구!"
"정말?" 그 말 한마디에 내 마음은 눈 녹듯 녹아버렸다. "우리를 받아주는 곳이 있단 말야?"
조선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본 조선남자의 얼굴은 무척이나 수척해 보였다.
'어린 것이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으면...'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찰나, 조선남자가 품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게.... 뭐지?"
그건 비행기표였다. 행선지가 '서니사이드'로 되어 있었다.
"서니사이드?"
조선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꿈과 희망이 있는 곳이지"
조선남자는 서니사이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서니사이드가 동성애자의 천국이 된 것은 세계최초로 커밍아웃을 했던 플라시보라는 레즈비언이 파트너인 너굴과 함께 그곳으로 쫓겨간 데서 비롯되었다. 그 뒤 판다78-스텔라09 커플, 복돌이-폭스바겐, 책나무-책울타리 커플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성애 커플이 그곳으로 옮겨가면서 서니사이드는 동성애자의 메카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 곳이 있었구나!' 내게서 새로운 희망이 샘솟는 게 느껴졌다. 난 조선남자의 손을 다시금 꽉 쥐었다. "당장 가자!!"
"여기가 어디지?"
정신을 차린 난 조선남자를 흔들어 깨웠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간단히 짐을 꾸려 집을 빠져나온 뒤 비행기를 탄 것까지는 좋았다. 공항에서 기다리던 조선남자와 합류한 데까지도 문제가 없었다. 우리나라 국경을 빠져나가 태평양 상공을 날던 것까지도 기억한다. 그 뒤 기류가 불안정하다는 기내 방송이 나오고, 스튜어디스들의 움직임이 바빠지더니, 기장인 로렌초의 시종의 다급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오면서 비행기 안은 아비규환에 빠졌다. 구명조끼를 서로 차지하느라 싸우던 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으으--"
조선남자가 눈을 떴다. "어떻게 된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사고가 난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니 파란 바다 뿐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무인도에 표류한 것 같은데"
목숨을 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사랑이 중요하다지만, 뭘 먹고 살 것인가. 순간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머리를 산발한 여자가 섬 어귀에서부터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도, 도망갈까?" 난 조선남자의 손을 꽉 잡았다. "괜찮아. 우린 둘이고, 상대는 하난데"
눈 앞에 선 여자는 상당한 미녀였다. 한참을 안씻은 듯 머리는 떡이 되고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 버렸지만, 그 안에 내재된 미모는 숨길 수가 없었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난 마냐라고 합니다. 비행기 사고로 이 섬에 오게 되었지요. 아무도 살지 않는 이곳에서 지낸 게 벌써 5년이나 되었군요. 다른 건 부족한 게 없지만 남자가 좀 그리웠는데, 남자가 두명씩이나 오다니 신이 축복을 내리셨나 봅니다. 음하하하하!"
조선남자와 난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봤다. "저 그게요...저희가 사실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냐가 몸을 던졌다. "이리 와,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