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에 다녀왔다.

전국에서 자원봉사를 나오는 마당에

충청권에 있는 우리학교가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각 단과대학당 교수 하나에 학생 마흔명 정도를 보내기로 했다.

가장 한가하다는 설 때문인지 아니면 거절을 잘 못하는 게 소문난 탓인지

우리 학교 120여명의 교수 중 선택된 사람은 나였다.

사건 직후 "나도 뭔가 해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먹었던 탓에

학장님의 부탁을 약간의 앙탈 끝에 수락했고

정말 열심히 일하다 왔다.


처음에 거기 가서 일하면 보람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보람을 느끼기엔 사태가 너무 심각했다.

내가 태안에 간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 중 이런 말을 한 이들이 있었다.

"벌써 일이 다 수습되어 지금은 가도 할 일 없대요."

"사람이 너무 많아 할 것도 없대요."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들, 반성해야 한다.

우리 학교 330명이 오늘 한 일은, 전체 작업량의 0.00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기름을 바가지로 퍼서, 혹은 헌 옷가지로 빨아들여서 부대에 담고

그 부대를 청소차의 접근이 가능한 곳까지 나르는 일,

이게 우리가, 그리고 군인들을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기름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할 일은 널려 있었다.

난 한곳의 기름이라도 몽땅 없애겠다고 점심도 거른 채 일했지만

별반 티도 안났다.

각지에서 헌옷이 배달되지만 그 수요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지라

집에 가면 평소 안입던 속옷과 몸이 커서 찢어먹은 팬티를 몽땅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이 어찌나 고되던지 학교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깨어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학생들과 헤어진 뒤 기타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

문가에 앉아 옆자리의 미녀 둘을 보다가 졸았는데

그 둘이 수시로 문을 열고 드나드는 통에 그때마다 잠을 깼다.

알고 보니 그 중 한명이 술에 취해 오버이트를 하느라 그런 거였다.

위기일발의 순간도 있었다.

다섯 번째쯤의 오버이트를 하러 나가는 순간,

미녀1이 못참겠다는 듯 문앞에서 나를 향한 채 입을 벌렸다.

잽싸게 다리를 오므리고 다른 좌석으로 튀려는 찰나,

미녀2가 재빨리 문을 열고 친구를 밖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난 미녀고 뭐고 미련없이 뒤쪽으로 자리를 옮긴 채 잠이 들었는데

기름이 손은 물론이고 얼굴, 심지어 눈에 튀어도 그러려니 했던 내가

오버이트에 그리도 민감하단 걸 깨닫고 피식 웃었다.


기름이 묻은 몸을 씻고 다리에 물파스를 발랐더니 피로가 조금은 가신다.

사회로부터 과분하게 받기만 해 온 내가 그래도 뭔가 기여한 날이니

평소보다 편안히 잘 수 있어야겠지만

시커먼 기름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졸리지가 않다.

죽어버린 태안반도는 언제 다시 제 모습을 회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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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수고하셨어요, 마태우스님
    from 하늘 받든 곳 2007-12-15 01:56 
    저도 지금은 매인 데가 없어서 다음 주 화요일쯤 한 번 갔다올까 하는데, 필요한 준비물 같은 거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시커먼 원유 덮인 바다를 보고 있자니 참 가슴이 아프네요. ;;;;;;;;;;; 
 
 
비로그인 2007-12-15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마늘빵 2007-12-15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 하셨습니다.

깐따삐야 2007-12-15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히 주무세요. 고생하셨어요.

책읽는나무 2007-12-15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에 그곳을 다녀왔었는데...아름다운 그곳이 그렇게...ㅠ.ㅠ
암튼..수고하셨어요.뉴스를 볼적마다 참 애가 타더라구요.저도 헌 옷이라도 좀 챙겨봐야겠어요.

Mephistopheles 2007-12-15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이 움직이셨군요 전 이런저런 핑개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애쓰셨습니다.^^

Kitty 2007-12-15 0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그렇게 심각하군요. ㅠㅠ 멀리서나마 안타깝네요 ㅠㅠ
수고 많이 하셨어요.

hnine 2007-12-15 0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 많으셨네요. 그 기름이 언제나 우리 인간들 몸 속으로 다 들어올텐데...어쩌면 좋으라요.

무스탕 2007-12-15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옆에 계시면 토닥토닥 다리 두드려 드리고 싶네요..

세실 2007-12-15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음이 천사같은 마태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당장 옷가지 싸야 겠습니다.

chika 2007-12-1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일할수 있는 '교수'님 추천 1위여서 마태님을 파견했을겁니다.
고생많으셨네요. ^^

비로그인 2007-12-15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열심히 일하다 왔다."
애쓰셨습니다..
저도 헌 옷가지를 모았습니다. 월요일날 보낼 예정입니다.


다락방 2007-12-15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2007-12-15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7-12-15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하십니다.

가시장미 2007-12-16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 수고 많으셨어요.
휴.. 저도 시간내서 다녀오려구요.
크리스마스가 되어야 시간이 될 듯하네요.
태안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면...
기억에 참 오래 남겠죠? 으흐

순오기 2007-12-16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 많으셨어요. TV에서 깨끗해진 곳을 내보내니까 그럴수도 있겠다 싶군요.
찢어진 속옷도 괜찮은가요? 우리 남편이 찢어먹은 면속옷이 몇개 있는데 버리지도 못하고...독서회원들이 모은 것을 내일 같이 보냅니다.

비연 2007-12-16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 많으셨어요....가봐야 하는데...

실비 2007-12-16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마태우스 2007-12-17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비님/하루만 달랑 가는 게 미안해요...
비연님/헌옷가지만 보내셔도 됩니다 여우님 서재 가보니 옷가지 보내는 건 우체국에서 공짜라고 하더군요
순오기님/부군도 속옷을 찢으시는군요 갑자기 반갑습니다
가시장미님/나중에 다시 맑아진 태안을 갔을 때 저 자리가 내가 기름 퍼내던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브리니님/부끄럽습니다....
속삭님/아유 아니어요 저는 학교에서 가라고 버스까지 대절해 주니까 간거지, 혼자서는 엄두를 못냈을 거예요. 장화랑 우의 같은 거 준비하는 게 개인으론 보통 일이 아니니까요. 옷가지만 보내셔도 충분히 훌륭한 겁니다
다락방님/어!^^
한사님/아 네... 저도 가보기 전까진 잘 몰랐어요...이렇게 심각한지..
치카님/역시 그렇겠지요?^^ 아직도 팔이 아프답니다
세실님/님과 호형호제하던 그날이 그리워요 <--다소 뜬금없는 답
무스탕님/토닥토닥이 컴을 통해 제게 전달되는군요
hnine님/인간에게도 해가 있겠지요 그보다 생명체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더 슬퍼요 그쪽 바다는 완전히 죽은 바다가 되었더라구요...
키티님/이게 다 산업화의 그늘이겠지요... 봉사활동 덕에 님과 간만에 인사하네요
메피님/혼자서 어떻게 하기는 어렵겠지요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책나무님/헌옷가지가 너무 많이 소모되더라구요 그것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깐따삐야님/네 덕분에 잘 잤답니다 팔은 아직도 아프지만....
아프님/고생이라고 말하기도 뭐해요 그쪽 상황을 생각하면......
엘신님/안녕하세요 님과 그리 대화를 못했었는데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마노아 2007-12-17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훌륭하세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태우스 2007-12-1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은 갈 수 있지만 두번은 어렵다지요. 두번째로 가려고 사람들을 모으고 있답니다...근데 그게 참 힘드네요.

미즈행복 2007-12-21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님은 모든 걸 다 갖추신 분이시라니까요!!!

마태우스 2007-12-22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미즈행복님/님 덕분에 빙그레 웃지요^^ 고마워요 미즈행복님!

세실 2008-01-05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누나였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