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본 <올드미스 다이어리>에 감동한 나머지 ‘어머니가 보시면 좋아하겠다’는 깜찍한 생각을 했다. 서른둘의 ‘노처녀’인 예지원의 러브 스토리만큼 김영옥을 비롯한 나이든 세 자매의 사랑에 대한 욕망이 비중있게 그려지고 있어서, 어머니가 보시기에도 무리가 없겠다 싶었다. 과연 어머니는 젊디 젊은 다른 관객들이 그러는 것처럼 2분에 한번꼴로 폭소를 터뜨리며 즐거워하셨다.

“영화 너무 잘 봤다. 정말 재미있더라.”


영화 속에 나오는 조그만 반전 하나. 쭈그리고 앉아 있는 세 자매에게 보조기를 이용해 걸음을 걷는 한 할머니가 다가온다. 영화에서 ‘하와이 할머니’로 불리는 그 할머니는 하와이에 있는 아들이 자기를 오라고 했다면서 자랑을 한다.

“아들이 하와이에 있는데 어떻게 한번도 안올 수가 있냐면서 됐다는데도 계속 오라고 하지 뭐야.”

다음번에 만났을 때, 하와이 할머니는 “아들이 비행기표를 보내줘서 다음달에 하와이에 간다”고 자랑을 하셨다. 미국에 딸이 있는 서승현에겐 “왜 너희 딸은 오라고도 안하냐”며 타박을 한다. 나중에 하와이 할머니는 목을 매서 자살을 하며, 경찰서에 달려온 딸 때문에 아들이 하와이에 오라고 한 게 전부 거짓말임이 드러난다.

“하와이는 무슨 하와이... 오빠랑 연락 안된 지는 벌써 수십년이 다 됐어요.”

그 광경에서 난 뒷머리를 맞은 듯 충격을 느꼈었다.

‘저런 호로 자식이 있나... 어머님을 내팽개치다니...’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아들이 하와이에 오랬다고 하와이 할머니가 자랑을 할 때, 옆에 계신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저거 거짓말이야!”

놀랬다. <올드미스 다이어리> 드라마판을 본 것도 아닌데 그걸 어찌 아셨을까. 집으로 가는 길에 여쭤 봤다.

“그게 거짓말인 거 어떻게 아셨어요?”

어머니가 대답하신다.

“엄마들은 다 그렇거든. 나도 우리 딸들이 한번도 반찬 해온 적이 없지만 우리 딸이 반찬도 해와요,라고 자랑하거든.”

그랬다. 어머님이 그게 거짓인 걸 아신 건 다 당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거였다. 어머님의 입을 통해 내가 드린 여비 십만원이 “아들이 100만원 줬어요. 얼마나 효자인지”로 둔갑하고, 전화 한번 안하는 자식들의 무관심이 “매일 밤마다 전화해요”로 바뀌었었다. 부끄러웠다. 갑자기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우리한테서 자랑할 걸 찾지 못하신 어머니는 상상 속에서 우리를 효자로 만드셨고, 그걸 친구들한테 자랑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찾으신 거였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하와이에 있으면서 엄마와 연락을 끊은 그 호로자식과 우리 네 형제는 별반 다를 게 없다. 우리 넷은 모두 호.로.자.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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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7-01-08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어쩐지 눈물 나는 글이네요....


그렇지만요, 마태우스님.
어머님과 같이 영화보는 것도 전 정말 너무 근사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계속 어머님과 같이 영화보는 시간 가지세요 :)

hnine 2007-01-08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영화속 할머니의 마음을 간파하신 마태우스님의 어머님과, 그 어머님의 마음을 간파하신 마태우스님...
올드미스다이어리 드라마 버전 안보신 마태우스님 어머님께서도 무리없으셨다면 저도 제 어머니께 한번 보여드릴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비로그인 2007-01-0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마태우스님.
..부모님 마음이 그러신가봅니다.
눈물이 납니다.

깊은 겨울의 명문입니다.
제가 한부 빌려갑니다. 감사합니다. 마태우스님


Mephistopheles 2007-01-08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들은 술을 입에도 못대요.." 가 왜 떠오르는 것인지....

moonnight 2007-01-08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기서 마태님은 빼셔야죠. 어머니 영화도 보여드리고, 얼마나 효자신데요. ^^

바람돌이 2007-01-08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어머니랑 같이 영화보러 가는 아들 정말 흔치 않거든요. 부모님 생각을 하면서 조금 슬퍼지는 글입니다. 에구 잘해야 하는데.... 저도 별로 좋은 딸 좋은 며느린 아니거든요. ㅠ.ㅠ

비로그인 2007-01-08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자신이처한 상황에서 사물을 본다고, 저는 왜 좋은 딸이 될 자신은 있지만 좋은 며느리가 될 자신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 더, 불효자였던 아들이 결혼하며 효자가 되려는 현상을 많이 보아와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그게 완벽한 이유는 아닐 거에요.

무스탕 2007-01-08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로자식은 절대 자기를 호로자식이라고 안합니다. 자기가 나쁜아들인지도 모르고 살지요.
마태님은 안그러니까 걱정마세요. 그저 술 조금만 줄이시면 어머니 걱정 두 되는 덜어내실거에요 ^^

물만두 2007-01-08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조건 잘해야합니다 ㅜ.ㅜ

2007-01-08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1-08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므낫, 새벽별을 보며 님의 말에 동감합니다. 언젠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자랄 때부터 전교 1등에, 아르바이트해서 부모님 용돈 드리고 결혼해서도 부모님께 효도하는 남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그 유명한 엄마 친구 아들이로세'랬더랬어요.

전호인 2007-01-08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수하시는군요. 저도 자수합니다. 호로자식이란 것을 ......이 글을 보고 지금 바로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드렸습니다.

모1 2007-01-08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영화같이 보러 간것 자체가 호로자식은 아닌듯 한데요. 엄마랑 영화보러 간지가..어언 몇년인지...에휴..영화의 그 부분 좀 씁쓸하군요.

클리오 2007-01-08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야기보고 저도 뭉클해서 전화할까 하다가... 역시 앞 이야기들의 연결이지만, 저런 '엄마 친구 자식'들 땜에 뭘 잘해도 티도 안나고 엄마들의 불평만 서로 늘어날거면서 서로 자랑하는 엄마들 땜에 스트레스 받는 생각이 갑자기 물씬물씬... ^^;;

마태우스 2007-01-08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오오 댓글 열다섯개 중 님같은 의견을 가진 분이 무려 네분... 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삶은 자식과 뗄 수가 없지요.자식 잘되기만을 바라고, 그 자식이 잘해주기를 은근히 바라시고... 후자가 바로 자식자랑으로 나타나는 거 아닐까요. 요즘과 달리 그 시절엔 어머니의 낙이 그거밖에 없었자나요...
모1님/영화 한번 가지고 그리 평가하시면 안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전호인님/아아 그러시군요. 제 글 때문에 님의 부모님이 기뻐하셨을 걸 생각하니 제가 글쓴 보람이 있네요^^
주드님/으음, 님 말씀도 맞습니다. 늘 옆집 아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기억이...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기엔 어머님의 낙이 자식자랑 말고는 없으신지라... 이해해 드리고 싶습니다
속삭이신 ㅎ님/그러니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 시절의 어머님들은 당신의 즐거움을 찾는 걸 배우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니만 해도 제가 집에서 밥을 먹으면 옆에서 춤을 추십니다. 당신이 맛있게 드시는 걸 기뻐하시는 게 아니라 자식이 잘먹는 걸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자랑을 해도 당신이 책 100권을 읽었다,는 걸 자랑하는 게 아니라 자식이 당신한테 뭘 해줬는가,밖에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해했어요 저는.... 하지만 이건 엄밀히 말해서 옳은 건 아니죠. 자식에게 올인하면 결국 실망하게 되고, 없는 자식자랑을 하면서 스스로를 위안하려 할 수밖에요. 저랑 동세대의 어머니들은 스스로의 기쁨을 찾을 줄 아니까 자식자랑은 점차 사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새벽별님/님의 댓글은 최고예요!! ^^ 제마음 아시죠?
만두님/그뤟게 하겠습니다... 님의 마음을 제가 10분의 1이라도 닮아야 하는데..
무스탕님/수, 술을 줄여야 호로자식을 면하는 건가요? 더 늘리면 전 ....막가파 자식인가요 흑흑. 너무 어려워요
주드님/갠적으로 시부모께 효녀가 되는 건 어렵다고 봅니다. 효자 아니던 아들이 갑자기 효자가 되는 건 며느리로 인해 자기가 편해 보자는 이기심의 발로가 아닐까 싶어요.... 내가 이렇게 잘하니 너도 잘해,라는..... 아무튼 남자가나쁩니다
바람돌이님/님도 영화 한편에 판단이 흐려지시네요. ^^
달밤님/그런데 달밤님은 왜 제게 댓글도 잘 안남기시나요 흑흑. 잘해 주세요 엉엉
메, 메피님/어머님은 술을 잘해야 영웅호걸인 시대를 사셨고, 아직도 그런 줄 아십니다...
한사님/부모님 마음을 제가 어찌 헤아리겠냐만은, 가끔씩 보이는 마음 씀씀이에 가슴이 뭉클하죠.. 글 가져가신다니 제가 감사드립니다
hnine님/그럼요 님의 어머님도 즐감하실 걸 확신합니다.^^
다락방님/어머니는 로맨틱코메디 좋아하십니다. 이 영화, 아주 딱이어요^^

기인 2007-01-0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정말, 잘 해드리고 싶은 마음만 항상 있는 게, 자식된 사람의 한계인 것 같아요. 그래도 마태우스님은 잘 해드리시 잖아요 ^^*

로쟈 2007-01-08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장가를 가셔야 합니다. 올해는, 기필코...

마노아 2007-01-09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찡해요. 울 모두 반성의 시간을...ㅠ.ㅠ

마냐 2007-01-09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도 그 장면에서 저거 거짓말일 거야...라고 직감 비슷한건 했지만, 님의 어머님처럼 깊은 뜻은 생각도 못했죠. 정말 반성의 시간을....ㅠ.ㅜ

건우와 연우 2007-01-09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 용돈을 부쳐드린 예금통장을 슬쩍 펴 놓고 <우리 아들이 이렇게 무시로 용돈을 보낸다>며 자랑하시는 우리 아버지가 생각나네요...

2007-01-09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도 2007-01-10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로자식'의 '호로'는 '좋아할 호'에 '늙을 로'죠? 고로 효자란 뜻이죠?

마태우스 2007-01-11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드플루토님/아앗 그렇게 심오한 재치가.....그나저나 반갑습니다. ^^
속삭님/제가 한건 했군요 호호.
건우님/자식이란 그런 존재인가봐요... 조금만 해줘도 마냥 기쁜, 그리고 자랑하고픈....
마냐님/아앗 님도 아셨단 말이죠?? 아아 글쿠나. 저만 센스가 좀 떨어지네요.... 하지만 그 덕분에 반전이 충격이었죠..... 디아더스 같은 영화 볼 때도 전혀 짐작 못하구, 빌리지도 그랬죠. 노센스=충격 왕창 호호
마노아님/아유 저같은 사람만 반성함 됩니다....
로, 로쟈님/그, 그거랑 무슨 상관이......ㅠㅠ
기인님/그, 그게 전혀 아니라서요...부끄럽습니다...

미즈행복 2007-01-12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부모가 다 그렇게 자식을 사랑할까요? 자식 등쳐먹는 부모, 학대하는 부모, 차별하는 부모...
오래전 읽은 조한혜정씨의 "또하나의 문화" 시리즈에도 그런 글이 있었지요. 며느리나 시어머니들이 새로운 관계에 서로 잘 적응 못하고 쌓인 울분을(?) 털어놓은 글들이었는데 -혹 현명한 해결방법을 - 그렇게 없는 사실 지어내지 말고 자식 흉도 보고 그러라고. 그렇게 거짓 자랑만 하니 스트레스가 더 쌓인다고, 그런 얘기요. 상상속의 자식을 만들어놓고 그냥 있음 다행이지만 사실 그렇게 만들어놓고는 현실과의 괴리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더 화나지 않을까요? 그리고 왜들 그렇게 자랑들만 하는지... 전 친구들에게 말해요. 만나면 우린 욕만 하자고. 애들 자랑, 남편 자랑하면 너무 재수없다고... 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