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은 내가 학교에 발령을 받은 첫 해였다. 교수들 중에선 비교적 신선한 타입의 인간형으로 인기를 끌던 그때, 난 연말에 있는 교수모임-상조회라고 한다-의 사회를 보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때까지 내가 본 사회 중 가장 규모가 큰 모임인지라 부담이 되었다. 하루 앞두고 반나절을 투자해 퀴즈쇼 준비를 했고, 사회를 보기 직전 떨지 않으려고 술을 엄청 마셨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상조회는 처음” “돈주고 부른 것보다 낫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그 이후부터 상조회 때마다 사회는 내 몫이었다. 퀴즈 쇼가 없으면 사람이 잘 모이지 않았고, 그런 프로를 진행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몇 년 하다보니 나도 매너리즘에 빠져 버렸다. 별반 열심히 준비를 하지 않게 된 것. 초창기의 신선도도 떨어졌는지라 호응도 예전같지 않았다. 그러던 올해 초, 난 마지막이란 조건으로 상조회 사회를 수락했고, 조금 열심히 준비를 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사람들은 “간만에 재미있는 상조회였다”고 입을 모았다. 그래서였을까. 올 연말, 또다시 상조회 사회를 보란다. 할 일이 굴뚝같은데 또? 하지만 원체 거절을 못하는 난 총무의 애절한 눈빛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난번 성공이 자꾸 어른거려, 이번에도 열심히 준비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상조회 준비를 위해 스스로에게 할당한 시간은 딱 하루, 월요일 밤이었다.


새벽 1시까지 난 원래 하려던 것의 60% 정도를 마쳤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배가 너무 고팠으니까. 오늘따라 땅콩샌드는 물론이고 쵸코파이조차 준비하지 않은 것. 뭔가를 물어보겠다며 전화를 해온 지인과 수다를 떠는 내내 “배고파” 소리를 연발했다. 내가 딱해 보였는지 지인은 인터넷으로 천안 지역의 야식업소를 수배했고,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다. 설마 여기까지 이 시각에 배달해 줄까 싶었는데 해준단다. 닭도리탕 소짜리를 시켰다. 음식이 온다고 하니 배고픈 게 덜해졌기에 난 상조회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2시 14분,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난 쪼르르 나가서 음식을 받아왔고, 내 방에서는 때 아닌 닭도리탕 파티가 벌어졌다.




추가로 시킨 밥과 함께 닭을 모두 먹어치운 지금은 아무 잡념없이 상조회 준비를 해야 하겠지만, 인간이란 게 꼭 그렇게 딱딱 맞아떨어지진 않는 법, 난 지금 엄청난 졸음과 대판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차라리 배고픔과 싸우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간사한 생각까지 드는데,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내 배를 채우도록 도와 준 지인에게 무지무지 고마워하는 중이다. 내일은 내일의 할 일이 있기에다 완성시키고 잘 생각인데, 지금의 노력이 내일 저녁 때 참석자들의 뜨거운 호응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화.이.팅.




 

사진설명: 천안서 잔다니까 어머니가 고다스-우리말로는 전기방석?-를 챙겨 주셨다. 70년대에 할머니가 일본서 보내주셨던, 하지만 지금도 잘 작동되는 그 고다스. 하지만 110V 용이라 변압기가 있어야 쓸 수 있다. 별로 안추워 그 생각을 못하다가 어젯밤 자다가 얼어죽을 뻔했다. 안되겠다 싶어 학교에서 남는 변압기를 얻어다 쓰고 있다. 지금은 참,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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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2 0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Joule 2006-12-12 0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마태님과 저는 서울의 이쪽 끝과 저쪽 끝에서 사이좋게 나란히 야근을 하고 있군요. 저는 집에서 님은 사무실에서. 집에서 야근하는 저는 참크래커와 당근 조각 먹고 허기에 빈혈기마저 있는데 사무실에서 야근하는 마태님은 닭도리탕이라니(아무리 소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공평한거죠?

라고 믿으며 살아야겠죠.


2006-12-12 0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유 2006-12-12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세상에 그럼 지금까지 안 주무셨단 소리잖아요..얼른 좀 쉬세요..^^&
전 자고 깨어났습니다..

Kitty 2006-12-12 0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닭도리탕이 야식으로 배달되다니이이이이 정말 좋은 곳입니다 ㅠㅠ
전 야근이 아니라 주근하는 중이지만 밥을 먹으니 무척 졸리네요;;;

다락방 2006-12-12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부르게 드셔서 다행이예요. 게다가 따뜻하기까지 하다니 :)

해리포터7 2006-12-12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의 페이퍼에서 늘 이런걸 발견하게 되는것 같아요..저 닭도리탕그릇이 어디선가 많이 봤던거라 유심히 봤더니 재활용통에 들어가 있는걸 제가 몇번 화분할라고 주울까 말까 했던 바로 그 하얀 통이로군요..대체 용도가 뭐였을까 무지 궁금했었는데...이제야 알고말았어요..이동네도 저런걸 시켜드시는분이 많군요.여기까진 딴소리였구요.ㅋㅋ
그나저나 야근이라니..넘 피곤하시겠어요..님 푹 좀 쉬셔요^^

paviana 2006-12-12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밤중에 저걸 다 드셨단 말이에요? 대단하세요.드시는거에 비하면 날씬하신듯..ㅋㅋ

비로그인 2006-12-12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마태우스님은 일을 즐기시는듯.
글속에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울보 2006-12-12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수업을 하고 아니지 방학이지요
지금은 무얼하고 계실까요,

건우와 연우 2006-12-12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만드시는것도 바쁘실텐데 정말 엄청 할일이 많으시네요.
조만간 술일기도 올라오겠지요. 바쁘신 마태님의 과로를 뒤로하고 페퍼를 목이 빠져라 기다립니다...^^

전호인 2006-12-12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도 흥미로운 상조회가 되겠군요. 그나저나 뱃살은 어쩌누. ^*^

Mephistopheles 2006-12-12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마태님은 바쁘게 사시는 분이십니다..^^

프레이야 2006-12-12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자꾸 그러시면 배 나와요 ㅜㅜ

마노아 2006-12-12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상조회 후기도 꼭 올려주세요^^

2006-12-12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스탕 2006-12-12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살기 좋은나라에요. 새벽 2시가 넘어서도 배달을 해주니... ^^;
밤 잠 안자고 일했으니 먹은거 열량소모 다 되어서 뱃살로 안갔을거에요.
멋지고 재미있는 상조회 잘 치루세요~

sweetmagic 2006-12-12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맛있겠다~~

모1 2006-12-12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기장판이 참 대단하군요. 약 30년을 넘게 견뎌오다니...그나저나 야식으로 인해 마태우스님 몸무게가......후후..

깐따삐야 2006-12-12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란 입힌 소세지도 있는 것 같구, 따땃한 전기방석도 있구, 재미난 상조회 사회 대본도 짜구, 넘넘 즐거워 보여요. ^^

2006-12-13 0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13 0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12-13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의 저 야채가 더 탐이 나요. 꼬르륵.

짱꿀라 2006-12-13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과 푸짐한 먹을 것으로 유혹하시는 마태 교수님, 매번 마태님의 서재실에 들어오면, 어찌나 먹고 싶은지 오늘도 침만 한 바구니 흘리고 가네요. 글 잘읽고 갑니다. 웃음이 가득한 하루가 되시기를.......

2006-12-18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