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대항해 - 뗏목과 카누로 바다를 정복한 최초의 항해자들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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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인간은 지구 각지로 퍼져나갔다. 인간은 육상 생물이기에 우선적 경로는 당연히 이동이 적합한 육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는 70%가 물로 뒤덮여 있다. 그렇기에 바다는 어쩔수 없이 때론 이동의 경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바다는 깊고, 땅보다 훨씬 이동하기 어려우며, 방향과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고, 식량과 식수도 없으며, 거센 파도와 풍랑이 언제든지 생존을 위협했다.물론 디젤엔진과 첨단 항법장치가 개발된 지금 바다는 과거만큼 인간에게 도전의 대상이자 경외, 위협이지 않다. 책 '인류의 대항해'는 산업화 이전 바다로 진출하고 도전했던 과거 인류의 교역과 진출의 역사를 다룬다. 


1. 동남아와 태평양

 빙하기에 동남아 지역은 지금의 인도차이나 반도와 섬들이 연결된 커다란 대륙인 순다와 호주 및 인근의 섬들이 연결된 사훌이라는 커다란 대륙이 있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해류와 바람이 비교적 예측이 용이해 항해에 적합했고 줄줄이 분포한 높고 낮은 섬이 많아 기준 가시선 항법에도 좋았다. 과거의 항해는 무엇보다 가까운 시간내에 육지로 도달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육지가 항상 보이는 곳에서만 항해하거나 일련의 섬들을 따라 항해하는 방법을 주로 이용했다.  

 바다에서 육지 발견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상적인 조건에서 카누에 탄 사람은 대기가 빛을 굴절시키는 것을 감안해 지구의 곡면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 멀리 볼 수 없다. 여기에 구름이나 옅은 안개, 거품이라도 생긴다면 시계는 상당히 나빠진다. 

 그런데 동남아 지역은 해역 전반의 기상상태가 양호하고 센바람이 비교적 장기간 없어 육지 발견과 항해가 좋다. 여름 몇 달간 몬순으로 북서풍과 북서해류가 남으로 이동시켜주고, 겨울에는 남동 무역풍과 북쪽해류가 북으로 이동을 시켜준다. 이 패턴으로 계절간 방대한 지역을 이동하며 흩어진 섬사회를 탐험하고 식민화하고 교역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항해가 용이해도 도구가 필요하다. 바로 선박이다. 최초의 배는 뗏목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뗏목은 섬유질의 끈으로 나무들을 엮기에 끈이 나무를 파고들지 않아 좋았다. 다음 등장한 수단은 갈대보트다. 이는 매우 가벼워 뭍으로 쉽게 옮길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방수처리를 해도 갈대 자체가 물을 쉽게 먹어 오래가지 못한다. 다음으로 등장한 쓸만한 배가 카누다. 

 통나무 카누는 몸통 속을 파내서 쉽게 만들지만 길고 폭이 좁다. 그래서 안정성이 낮고 수송력도 적다. 뱃전이 낮아 내부로 물도 쉽게 들어온다. 그래서 나온 해법이 아웃리거를 달거나 쌍둥선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카누의 안정성과 수송력이 몰라보게 좋아진다. 그리고 카누에 돛대와 돛의 설치도 가능해진다. 

 2만 5천년전 후빙하기의 항해자들은 솔로몬 제도까지 정착한다. 1만 3천년전 마우스섬까지 간 항해자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들은 섬 동물을 너무 많이 사냥해서 회색늘보주머니쥐, 주머니오소리, 왈리비들의 사냥감을 섬에 들여오기도 했다. 뉴기니와 비스마르크 제도는 여러 열대작물이 유래한 곳인데 식량이 되는 토란, 사탕수수, 일종의 바나나 종이 있는 곳이다. 이런 개량종 식물이 등장하여 카누 선장들은 토란과 마 같은 작물을 이용하여 식량을 배안에 저장하여 장기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잦은 항해에도 남태평양의 인구는 좀처럼 늘지 않았다. 이는 말리라이가 옮겨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최소 2종의 말리리아 원충이 수천년전 정착자들을 따라 순다에서 사훌로 이동했다. 말리라이가 열대지역의 섬들에 퍼쳐 모기 서식지 보다 높은 뉴기니의 고지대 지역만 높은 인구 밀도가 유지되었다. 

 기원전 1600년 경 뉴브리튼 섬의 위타리 섬이 대규모로 폭발한다. 이 대재난 직전이나 직후 정도에 이전에 비해 더 크고 튼튼한 카누를 탄 사람들이 서쪽에서 비스마르크 제도에 도착한다. 이들을 라피타인이라 한다. 이들은 기원전 1500년가지 오세아니아 근해에 정착하고 향후 2-3세기 동안 이동하지 않고 토착민과 통혼하며 융화한다. 

 라피타인은 새로운 식량을 가지고 오는데 그로 인해 수렵에 의존하던 섬 경제에 유연성이 생겼고 식량의 저장이 가능해 장거리 항해능력이 생겨났다. 이들의 쌍동선 카누는 비록 느린 속도였지만 거의 맞바람의 60도 각도에서도 항해가 가능했다. 라피타인들의 섬 이동은 의도적 식민화 과정이었다. 이는 인구압력이나 교역, 차남들의 기회 탐색이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딴 섬들은 자급자족이 어려웠기에 교역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섬들간에는 이런 교역 구조를 정례화하기 위한 전통이 존재했다. 그것이 쿨라 교환관걔다. 두 종류의 교환물품인 빨간조개껍대기와 하얀조개껍데기가 각각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으로 섬들을 돌았다. 이 물품이 섬에 오는 것은 섬의 위신 문제였고 물품이 오가며 다른 물품의 교환이 이뤄졌다. 의례에 참여하는 자들간에는 서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 교역의 날짜는 정기적이고 주기적이며 신중했다. 이런 식으로 섬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의존을 정례화했다. 

 라피타인의 진출은 사모아섬까지였다. 사모아 섬 동쪽은  섬이 더 작고 고립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무려 1800년간 라피타인의 후손은 여기에 머문다. 서기 1000-1300년이 되어서야 동태평양 지역의 식민화가 이뤄진다. 


2. 에게해

 에게해는 빽빽한 섬과 강한 바람, 짧고 가파른 파도로 인해 건너기 만만치 않은 바다다. 그리스 앞바다엔 에비아, 크레타, 로도서, 레스보스 4개의 큰 섬이 있고 그 가운데 키클라데스제도가 있다. 초창기 항해가들에게는 다행스럽게 이 키클라데스제도의 섬간 거리가 10-20km정도로 가까웠다. 키클라데스제도는 건조지역으로 땅이 척박하다. 즉, 식량과 식수 확보가 어렵다. 하지만 석기시대 수렵민의 필수품인 흑요석이 풍부하다. 특히 밀로스 섬에 많았는데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많이 낮아 밀로스섬까지 가기 쉬웠다. 

 메마른 땅이지만 작물과 가축을 동반한 영구정착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4천년 전 낙소스섬에 농경인이 정착했다. 대개 대규모, 중간급의 섬부터 정착이 시작되었다. 키클라데스제도에서는 보리, 밀, 콩류가 자라고 염소와 양이 척박한 섬의 사면에서 살수 있다. 하지만 생산성이 낮아 인구 부양력이 낮고 이는 섬 사이의 고도의 상호의존성을 요구했다. 

 나일강 유역은 질 좋은 목재가 부족했다. 파라오들은 부피가 큰 목재 수송을 위해 해상무역을 했다. 삼나무 무역은 지금의 베이루트은 비블로스를 국제무역의 요충지로 만들었다. 그래서 레바논의 삼나무 무역은 기원전 2200년경까지 수세기간 번영했다. 레바논으로의 여정은 여름철의 연안 항해가 가장 많았다. 

 기원전 2000년 이집트의 배들은 크레타에 도달했다. 여름이면 우세한 북풍으로 지중해 연안을 따라 터키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키프로스 크레타 에게해에 도달했다. 초여름엔 에테시아 바람을 타고 북아프리카와 나일을 들러 귀환했다. 이집트 나일 삼각주 북서부의 아나리스 시는 기원전 1640-1530년까지 국제무역을 육성한 힉소스인들이 통치하고 미노스인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고대 키프로스는 구리의 원산지로 청동기 시대 인기가 좋았다. 

 이 번영은 기원전 1200년경 미케네와 미노스, 히타이트가 붕괴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해적들이 에게해에 득세하며 끝난다. 람세스 3세는 기원전 1187년 나일에 침입한 이들은 막느라 전쟁을 치뤄야 할 정도였다. 기원전 1000년 경이 되어야 동지중해에 다시 안정이 찾아온다. 레반트 연안의 비블로스와 티레, 시돈의 페니키아 상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들은 자줏빛 염료 무역을 장악해 부를 쌓았다. 

 페니키아인은 육로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만과 페르시아만, 이집트와 홍해를 거치는 교역로를 장악했다. 그들은 해상무역에 집중해 기원전 1000-800년 시칠리아에서 샤르데냐가지 고대 동지중해 무역을 장악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해 카르타고와 우타카에 전초기지를 수립한다. 그들은 그리스 포카이아인과 경쟁했으나 승리해 일부 그리스 식민지를 제외한 지중해 전 해안 지역을 석권한다. 

 기원전 500년이 되자 개방형 해적선 대신 세삼하게 설계한 전함이 등장한다. 충각이 달리고 병사가 서서 싸울 수 있는 갑판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노잡이는 보호 받으며 바닥에 격리되어 노를 저을 수 있어 속도가 높아졌다. 전함을 더 빨라지고 더 낮아지고 날렵해졌다. 이단 배치 노는 삼단 노선으로 진화한다. 

 아테네의 항구 피레우스는 교역로의 광대한 그물의 중심이다. 아테네는 30만의 시민을 위해 연간 800척의 분량의 곡물을 수입했다. 로마인들은 농부 군인으로 해상무역 전문가는 아니지만 해적 소탕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들은 대규모 무역과 곡물 운송 사업에 뛰어든다. 


3. 몬순 세계

몬순세계는 몬순의 영향을 받는 동아프리카 해안, 홍해, 인도, 스리랑카, 동남아, 중국을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몬순 계절풍은 예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란 해안을 따라 인도로 항해가 쉽다. 홍해는 나일강과 연결되며 페르시아만은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과 연결된다. 교역의 최적조건인 셈이다. 

 몬순계절풍은 11월-3월 북동부에서 불어온다. 이건 비교적 얌전하다. 5월-9월은 남서부에서 불어오고 이건 상대적으로 강하고 스콜이나 폭풍을 동반한다. 고대 페르시아만에서는 연안에서 갈대에 역청을 발라 방수처리한 보트를 썼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야자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목재가 없었다. 배로 쓸만한 좋은 목재는 인도 서해안에 풍부했다. 

 인도는 거대한 아대륙 국가로 자급자족적 국가라 해안에 큰 관심이 없었다. 기원전 2000년 하라파 문명의 요람인 인더스강 유역이 장거리 상업의 중심지였다. 인도의 사정이 이러하니 무역의 중심은 메소포타미아였다.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은 인도의 조선공들에게 배운 기술인 널을 꿰멘 배를 타고 다니며 인도양 연안 항해의 큰 비중을 담당했다. 4-6세기 중국의 배들이 인도와 교역했다. 6세기 스리랑카는 중국과 페르시아가 만나는 기점으로 거래상품은 비단이었다.

 이슬람이 부상하자 거대한 상업적 팽창이 인도양을 감쌌다. 아랍의 배를 페르시아에서 광저우까지 진출하다. 아랍의 배는 널을 티크나 코코야자로 만들었다. 티크는 매우 오래가고 작업이 쉽고 인도 남부에서 널리 자란다. 코코야자는 몰디브와 라카티브 제도에 풍부하다. 배는 용골에 가로 널을 꿰메 붙이고, 짝을 지어 가지런히 맞댄 널을 끄트머리에 단순한 작은 송곳으로 힘겹게 구멍을 꿇고 코코넛 껍질로 만든 거친 밧줄로 통과시키는 식으로 건조했다. 이는 쇠못배도다 약하고 물이 샜다. 역청이나 송진을 고래기름과 혼합한 뱃밥으로 이음새의 틈을 매우고 생선기름으로 널을 방수처리했다. 그래서 환기가 어려운 갑판아래는 악취가 심했다. 

 대형삼각돛은 사각에 비해 배가 바람에 훨씬 가깝게 붙어 범주하는 것이 가능했다. 해안 가까이 붙어 항해하는데 유리해 인도양 무역선에 안성맞춤이었다. 다만 맞바람에 약하고 뒤에서 바람을 받는 경우 효율이 낮았다. 


4.동아프리카

 바스코 다가마가 1497년 잠베지강 어귀에 도달했을 때 이미 몬순 무역은 규모가 상당했다. 아프리카는 철, 금속, 가죽, 황금, 구리, 노예등의 상품의 무한한 공급지였다. 동아프리카 해안은 연중 대부분의 기간 북동 몬순 계절풍이 불었다. 이 지역은 인도양 세계의 일부로 내륙과 사회적 유대로 매끄럽게 연결된 곳이다. 아자니아 본토와 마다가스카르를 비롯한 앞바다 섬들은 매우 다양한 환경을 제공했다. 

 북쪽은 반건조 기후, 남쪽은 사바나와 맹그로브 습지, 열대 우림. 물고기와 조개가 풍부하고 목재가 많으며, 산호도 건축에 이용이 가능했다. 동아프리카의 철광석과 목재는 초기 교역조건으로 매력적이었다. 이후에는 황금과 상아, 노예가 상인들을 끌어당겼다. 상아는 인도의 것보다 단단해 조각에 유리해 인기가 좋았다. 

 아프리카의 맹그로브 장대는 중동 여러 도시의 가옥 지붕을 이었고 노예는 수입되었다. 노예들은 유프라테강 저지대의 습지 일부에서 물을 빼는 역할을 맡았다. 무역선들은 동아프리카의 당나라의 도자기를 실어 날랐다. 페르시아만의 상선들은 아프리카 상아와 인도네시아 용연향을 인도와 스리랑카, 남중국해에도 운송했다. 잦은 교역으로 소규모 이슬람 사회가 동아프리카 해안에 형성되었다. 

 아라비아, 페르시아, 아자니마 무역은 9세기 후반 당나라가 멸망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노예반란으로 쇠퇴한다. 하지만 서기 첫 천년 후반기가 되자 지중해에 중대한 정치 사회적 변화가 나타난다. 남부 독일에 신성로마제국에 등장하고 비잔틴 제국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북아프리카에 파티마 왕조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술, 수공업, 정교한 건축, 사치품과 원자재 수요가 증가했다. 

 이후 대략 800년간 아프리카에서 금이 수출되었고 이는 당시 글로벌 경제의 중심 요소였다. 


5. 알류트 열도

 이곳은 습기가 많고 비교적 따뜻한 남서풍이 북쪽으로 불어서 연중 1/3기간 시계를 심각하게 제한한다. 곳곳에 바위섬이 많고 거센 풍랑이 있어 항해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아한대 치곤 상대적으로 기후가 온화하고 고지대 호수의 민물이 매우 맑고 해안은 상륙에 적합하다. 그리고 바다사자와 바다표범, 고래, 대구, 넙치 등 해양생물이 풍부하다. 그래서 초기부터 해양사회가 발전했다. 

 북극권의 선박은 뼈나 유목으로 프레임을 짜고 힘줄로 묶어 유연한 선체구조를 가진다. 다음 바다사자나 표범의 가죽으로 덮는다. 가죽을 프레임에 단단히 고정하지 않는데 프레임 자체도 다소 느슨하다. 이는 유빙이나 부빙에 배가 부딪히 때 충격을 완화하여 침몰을 막기 위해서다. 그리고 배가 가벼워 얼음위로 올리기가 쉽다. 이 가죽보트는 프레임이 유연해 형태를 변화시키기도 쉽다. 그래서 시시각각 항해형, 사냥형, 적재형, 이동형으로 변화한다. 

 북극권의 배 바이다르카는 제작에 수개월이 소요된다. 일단 용골과 뼈대인 유목을 모으는 것이 어렵다. 턱처럼 생긴 이물이 물의 저항을 줄이고 노젓는 사람이 내는 속도 향상에 기여한다. 고래 수염으로 묶은 상부 프레임은 속도와 내향성에 기여하고 바다사자 가죽 덮개는 선체를 덮어 방수를 한다. 

 알류트 지역은 전통적으로 해양생물을 사냥하기에 해안거주를 한다. 650-750년 대규모 해안마을이 사라지고 연어를 따라 강으로 거주지가 이동했고 1450년이 되어야 다시 해안으로 거주지가 돌아왔는데 이는 800-1200년 중세 온난기로 대양순환저해로 해수온도가 상승해 해양생산성이 저해했기 때문으로 추정되다. 알류트인의 대형보트 제작에는 바다사자의 가죽덮개가 필수인데 보트 한대당 바다사자 15-20마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바다사자의 감소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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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당투자 처음공부 - 퇴근 후 1분 투자로 제2의 월급이 따박따박 들어오는 처음공부 시리즈 11
이상규 지음 / 이레미디어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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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식투자는 철저한 계산에 의한 이성의 영역 같지만 실상 감정 노동에 가깝다. 시장참여자인 인간 자체가 감정을 가진 존재이고 그래서 시장은 이성적 요소보다는 광기가 지배하기에 투자자는 늘 흔들리고 어리석은 판단을 한다. 그래서인지 투자의 많은 영역에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돈을 벌면 다 안정을 지향한다. 부동산 투자자는 초기엔 공격적 투자를 하다가도 결국엔 월세를 따박따박 받는 안정적 건물주로 향하며 주식 투자자도 초기엔 시세차익을 주는 리스크가 큰 성장주를 추구하다가도 결국엔 안정적 배당금을 주는 성숙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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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당투자의 장점은 언급한 현금흐름이 있으며, 안전마진이 있다. 안전마진은 주가가 배당률과 반비례임을 이용하는 것이다. 주가는 시시각각 변하지만 기업 실적인 잘 변하지 않아 배당금은 거의 그대로인데 그래서 배당률은 주가가 떨어지면 올라가고 주가가 상승하면 떨어지게 된다. 이걸 이용하여 배당률이 상승하면 주식을 매입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쓰면 주식을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사게 되어 안전마진을 확보하기 쉽다. 마지막 장점은 복리효과다. 배당금을 그대로 배당주에 다시 투자하는 것이다. 만약 1000만원을 7%배당금을 주는 주식에 복리 투자할 시 10년이면 원금의 2배가 된다. 

 배당투자는 단점도 있다. 우선 낮은 기대수익률이다. 배당을 잘 주는 기업을 대개 폭발적 성장을 마친 성숙 기업이다. 그래서 주가가 시장이 대세 상승기여도 그리 크게 성장하지 못한다. 그리고 세금이다. 다소 불공평하게도 대부분의 국가는 시세차익에 대해서 그리 과세를 잘 하질 않는다. 아마 손해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수익이 비교적 확실한 배당소득은 확실히 과세를 한다. 한국은 15.4%를 배당소득 과세를 하며 만약 이자소득과 배당소득을 합친 금융소득이 연간 2000만원을 넘기면 종합과세소득자가 되어 세금이 과중된다. 

 저자는 같은 배당주라도 미국과 한국의 기준이 다르다. 한국의 경우는 시중금리의 최소 2배 정도를 주는 것을 권장하고 꾸준히 갖고 있기 보다는 잦은 스윙매매를 권장한다. 언급한 것처럼 배당수익률이 높게 나타날때 저가 매수해서 배당금을 받아가며 기다리다 배당수익률이 낮아질 때를 고점으로 판단해 매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배당주는 3%내외 정도를 매수하여 오래도록 보유하는 것을 선호한다. 미국 주식은 꾸준히 배당을 성장시키고 미국 기업 자체가 배당하는 것을 기업의 커다란 실적으로 여기며 미국 주식은 매도하는 경우 250만원을 공제하고 무려 22%의 양도세를 납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당성향은 기업의 순이익 중 배당금을 얼마나 지급하는 비율이다. 그래서 배당성향이 높을 수록 주주환원이 높다. 저자는 적절한 배당성향은 40-70%정도로 본다. 70%이상인 경우는 오히려 좋지 않다고 본다. 우선주는 기업이 파산할 경우 잔여 재산 분배 중 우선권을 가진 주식이다. 대신 주주의결권이 없고, 배당금을 조금 더 주는 경우가 많다. 반면 보통주는 의결권이 있고 시세차익이 더 크며 거래량 자체가 더 많다. 

 배당초보는 배당기준일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배당기준일에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배당금을 받는다. 다만 증권거래시스템상 배당기준일로부터 2거래일전까지 주식을 보유하고 있어야 주주명부에 등재되어야 하기에 사실상 배당기준일 이틀 전에 매매를 성공해서 주식을 매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공휴일이 끼어 있다면 그 날은 제외하기에 하루가 더 추가된다. 언급한 것처럼 미국 기업은 배당을 꾸준히 하고 늘리는 것은 기업의 큰 자부심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배당을 분기, 또는 월로 한다. 하지만 국내 기업은 대부분 기업을 연간 1회 한다. 그래서 배당일 다음 날 배당금 만큼 커다란 배당락이 일어난다. 그래서 배당투자는 국내의 경우 적어도 분기배당을 하는 주식에 해야 그런 일이 얼어나지 않는다.

 ETF는 자산 운용사의 펀드를 주식처럼 쉽게 사고 팔 수 있는 것이다. 기존의 펀드는 매니저가 운용한 것이라 인건비와 수수료가 비싸고 매수 매도에 시간이 걸려 환매가 지연되었다. 하지만 ETF는 매너지가 직접 운용하지 않아 수수료가 매우 낮고 바로 매수 매도가 된다. ETF의 장점은 다양한 주제에 따라 한번에 여러 종목을 분산 매수하여 위험을 낮추고 변동성도 적다는 점이다. 단점이라면 직접 주식을 매수하는 것에 비하면 수수료가 높고 인덱스 펀드는 저렴하지만 엑티브 펀드는 수수료가 비싸며 투자방식이 기계적이라는 점이다. 가령 지수를 추종하는 펀드는 해당 종목수나 비중을 강제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해당 종목 중 하나가 실적이나 호재가 터져 크게 상승하는 경우 상식적이라면 계속 가져가는게 맞다. 하지만 이 경우 ETF는 기계적으로 비중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오른 만큼 팔아버린다. 그리고 내가 원치 않는 종목도 강제로 투자하는 것도 단점이다. 

 배당투자에는 세금이 매우 중요하다. 미국주식에 투자하면 미국시장에서 배당소득의 15%를 원천징수한다. 그리고 매매하면 250만원을 공제 후 양도차익 22%에 대해 과세한다. 국내주식도 배당소득은 15.4%를 원천징수한다. 하지만 양도차익은 비과세다. 국내 ETF는 배당소득에 대해서 15.4%를 원천징수한다. 하지만 역시 양도차익은 비과세다. 국내상장 해외 ETF는 배당소득에 대해 미국에서 15%를 원천징수한 후 국내에서는 15.4%를 원천징수하는 이중과세다. 그리고 매도하면 15.4%를 과세한다. 양도차익이 약해 배당소득을 이중과세하는 듯 하다. 

 배당투자에도 절세방법이 있다. 연금저축계좌와 IRP, ISA다.  

 연금저축계좌는 세액공제혜택과 자율과세, 과세기연의 혜택이 있다. 연금저축펀드는 1년 1800만원 납입이 가능하다. 600만원까지 세액 공제가 된다. 그리고 600만원 한도 내에서 연소득 5500만원 이하 가입자는 16.5%세액공제가 되고 그 이상이면 13.2% 세액공제가 된다. 55세 이후 연금을 개시하면 수령하는 나이에 따라 연금 수령액 1500만원까지 3.3-5.5%의 연금소득액만 납입한다. 다만 중도해지시 또는 세액공제 받은 납입 금액을 인출할 경우 기타 소득세 16.5%를 납부해야 한다.

 IRP는 개인 퇴직연금이다. 세액공제한도가 300만원이며 900만원까지 세액공제혜택이 있고 과세이연효과가 있다. 세액공제혜택은 연금저축과 합산한다. 연금저축계좌와 다른 점은 안정성을 위해 위험자산투자가 70%까지만 허용된다는 것과 중도 해지 및 인출조건이 매우 까다롭다는 것이다. 

 ISA는 일반형인 경우 비과세한도가 200만원까지다. 의무가입기간은 3녀이고 납입원금 중도 인출이 쉽다. 1년 기준 2천만원까지가 한도이고 최대 한도는 1억원이다. 미불입 납입액은 이월이 가능하다. 분리과세라 배당소득이 종합소득에 합산되지 않는 것이 큰 장점이다. ISA계좌는 해지시 수익의 9.9%를 분리 과세한다. 만기를 채운 후 60일 이내에 연금저축 펀드나 IRP로 이전이 가능하고, 최대 300만원까지 추가 세액 공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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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와 훈 -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유라시아 세계의 지배자들
김현진 지음, 최하늘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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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흉노란? 

 흉노는 대개 야만족, 그리고 초지의 유목민, 침략자, 내륙아시아 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편견이다. 흉노가 있었던 내륙아시아란 중앙아시아, 러시아 서부와 동부와 북부를 아우르고 몽골과 내몽골, 지금의 중국 서북부의 광대한 지역이다. 기후도 단지 초지가 아니다. 이렇게 영역이 광대하니 기후도 사막, 극한, 온대림, 침엽수림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기후가 다양하니 거주민도 농경민, 목축민, 도시민, 수렵민으로 다양하다. 민족도 그러하다. 동북아시아인, 이란계, 인도계, 동유럽계, 게르만계가 모두 흉노에 나타난다.

 흉노는 잦은 교역과 이주를 했기에 수많은 언어와 민족, 종교가 다층적일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지리적으로 유라시아의 모든 지역에 접한 만큼 다른 지역 태생과 다르게 모든 종교와 사상의 중심지에 방문하고 접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종교와 사상 역시 다양하고 관용적이었다. 

 유라시아의 초원 유목민은 초지를 따라 돌아다니기에 명확한 영토관념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들은 고정된 초지를 오가며 생활하는데 비교적 확실한 영토관념을 갖고 있었다. 정치체제 역시 통념과 다르게 엄격했다. 

 흉노의 정치체제의 정점은 선우다. 하지만 실제 행정업무는 골드후가 담당했다. 그리고 지방관으로 좌현왕과 우현왕을 두었는데 좌현왕은 동부의 통치자, 우현왕은 서부의 통치자였다. 이중 흉노는 전통적으로 동부를 중시했기에 선우의 후계자를 좌현왕으로 삼았다. 또한 그 아래에 4개의 지방관직을 두었다. 서쪽에 우도기왕과 우도지왕 동쪽에 좌도기왕과 좌도지왕이다. 이들 역시 선우의 아들 내지는 형제였다. 이들 왕의 밑에는 육각왕이라는 최고 귀족이 존재했고 그 아래에는 24만기라는 제국내 최고 지방 총독이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토착관리가 존재했는데 이들은 사실상 말단 지방의 행정관이자 세금징수관 역할을 하였다. 

 

2. 흉노와 중국

 흉노의 선우 묵특은 반란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집권한다. 그리고 반대 가족과 귀족을 모두 숙청한다. 그는 동의 동호와 서의 월지를 격파하고 30만 대군을 양성한다. 기원전 200년 중국은 통일한 한 고조는 강력한 위협인 흉노에 도전했지만 백등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한은 사실상 오랜 기간 흉노의 조공국으로 전락한다. 묵특은 한 문제 시기 신장을 정복하고 카자흐 일대의 26국을 정복하는 등 위세가 대단하여 한 문제 역시 조공을 지속할 수 밖에 없었다. 

 중의 한제국은 BC134년부터 무려 70년간 흉노에 조공한다. 그러다 한 무제 때에 이르러 흉노가 정치적 혼란에 이르자 반격한다. 군신 선우가 죽자 그의 동생 이지사가 정통 후계자인 좌현왕 어단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어단은 한나라에 항복하고 한 무제를 여세를 몰아 묵특 선우에게 1세기 전에 빼앗긴 오르도스 지방을 탈환한다. 그리고 수많은 흉노의 부왕들이 이지사에 반발해 한에 투항한다. 

 그럼에도 흉노는 아직 강성하여 한과 1세기 가량 일진일퇴를 벌인다. 서기 60년 한은 흉노를 격파해 타림분지를 장악한다. 흉노의 패배는 복속부족인 오손과 오환의 이탈을 불러왔다. 흉노는 잦은 패배와 내부 반란으로 흔들렸고 그러자 백년간 선우가 8명이나 등장하는 대혼란기에 빠진다. 흉노는 묵특시기에 거대화하여 남북으로 분리되었는데 혼란기에 북의 질지와 남의 호한야 선우가 살아남았고 이중 호한야가 한나라에 항복해 봉신이 되고 많다. 그리고 호한야는 한과 연합해 질지를 격파한다. 

 하지만 한의 혼란기가 오고 외척인 왕망이 일시적으로 한을 멸하고 신을 건국하는 혼란기가 오자 흉노는 주변 부족을 다시 복속하고 영토를 회복한다. 하지만 남과 북의 분리가 항구화한다. 그리고 남흉노는 중국의 동맹화하고 만다. 그리고 선비족이 등장한다. 선비는 중국과 동맹을 맺고 흉노를 침공한다. 서기 87년 한, 선비 연합군은 흉노 선우를 살해한다. 그러자 55개 흉노 부락이 한에 투앟한다. 서기 89년 한의 두헌이 몽골고원에서 다시 선우를 격파하고 흉노 귀족과 병사 1만 3천을 죽이자 무려 20만의 흉노인이 한에 투항한다. 이후 2세기간 힘을 잃은 흉노는 튀르크, 강거, 선비, 오손에 포위되는 형국이 되고 만다. 

 흉노를 격파한 선비는 흉노와 다르게 제국을 형성하지 못한다. 남흉노는 선비와 오환 중국에 끼인 상태였다. 삼국시대 위의 조조는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남흉노의 선우를 낙양에 인질로 삼고 우현왕으로 하여금 흉노를 다스리고 남흉노를 5부로 나누어 중국인이 흉노를 다스리게 했다. 이는 흉노에 매우 굴욕적 처사였다. 

 이후 조씨의 위나라가 멸망하고 진이 들어선다 서기 292년 진에 내전이 일어나자 흉노가 반발한다. 그들은 304년 유연의 통치아래에서 독립을 선언한다. 유연은 자신이 흉노와 중국의 통치자라 주장하며 308년 중화황제로 즉위하며 5호 16국 시대를 연다. 이후 유총이 311년 낙양을 점령하고 진 회제를 회계공으로 격하시킨다.316년 흉노는 장안마저 점령하고 면제도 사로 잡아 회평후로 격하시킨다. 그리고 두 전직 황제는 결국 처형된다. 나머지 진황가는 장강으로 도망쳐 망명국가인 동진을 건국한다. 이로써 중국은 서부는 전량이 통제, 북동부는 선비가 통제, 나머지는 모두 흉노가 통제하는 형국이 이른다. 

 북중국을 통일한 유총은 318년 죽는다. 흉노는 지배층이 다시 분열하여 유총의 아들 유환이 장인인 군준이 살해당한다. 하지만 유요가 군준을 제거하고 유요는 국호를 한에서 조로 변경한다. 하지만 갈부의 석륵이 이탈하여 후조를 세운다. 석륵과 유요의 대결에서 석륵이 승리하고 그는 야만적 통치를 일삼아 한인을 탄압한다. 이후 한인 염민이 권력을 장악하여 갈인 20만을 대량 학살하고 350년 대위를 건국해 흉노시대를 종결한다. 351년 모용씨의 선비국가 전연과 저의 국가 전진이 북중국의 옛 흉노땅을 차지한다. 


2. 중앙아시아의 흉노

 남흉노는 중국의 복속된 후 오히려 시기를 잘타 북중국을 장악하지만 북흉노는 선비에 패한다. 하지만 그들은 절멸되진 않았다. 이들은 알타이 지방에 살아남아 중앙아시아로 진출한다. 중앙아시아엔 쿠샨이 있었다. 구샨은 사산조페르시아의 속신으로 쿠샨샤로 불리며 존속하다 4세기 훈의 침입을 받는다. 4세기가 되자 알타이와 우랄 산맥 사이의 모든 국가와 부족이 훈에 정복된다.

 용어가 자연스레 흉노에서 훈으로 바뀌었는데 중앙아시아의 훈은 흉노에서 유래했다. 결정적 증거는 흉노의 도구인 훈식 청동솥이다. 

 중앙아시아의 에프탈 왕조는 스스로를 훈이라 칭했다. 하얀색은 유목민에게 서쪽을 의미하기에 흉노에게 중앙아시아는 서쪽이고 그래서 중앙아시아의 훈은 백훈이라 불리기도 한다. 에프탈 훈은 페르시아와 공통의 적 키다라를 물리친다. 그리고 에프탈은 이후 페르시아를 침공해 그들이 차지한 키다라 영토를 모두 빼앗고 페르시아를 속국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에프탈은 사실상 중앙아시아 일대의 모든 백훈계 집단의 지배자가 된다. 

 페르시아는 484-550년까지 훈제국에 연공을 상납한다. 에프탈 훈은 페르시아를 복속하고 동으로 확장해 영토가 페르시아, 카슈미르, 쿠챠, 캬슈카르, 호탄에 이른다. 5세기 후반에는 간다라와 인도북서부를 지배하기까지 한다. 6세기 중반 에프탈 훈은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로 동으로는 신장, 남은 인도 중부, 북은 카자흐 초원, 서는 동로마에 이른다. 

 그러다 6세기 중반 돌궐이 나타난다. 에프탈 훈은 유연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유연이 돌궐에 멸망한다. 에프탈에 복속되어 있던 사산조 페르시아는 돌궐과 연합하고 양자에 끼인 에프탈 훈은 결국 페르시아의 후스라우 1세에 항복한다. 에프탈 붕괴 후 돌궐과 사산페르시아는 충돌하고 그 공백에서 다양한 백훈계 집단이 등장한다. 백훈은 높은 수준의 문화를 자랑했다. 이들은 종교적 다원주의를 지향했고 높은 문화수준과 세계주의를 보였으며 아프간의 바미얀 석굴은 백훈 시대의 작품이다. 


3. 유럽의 훈

 훈과 조우하기 전 유럽의 게르만은 매우 기초적 수준의 정치 사회체제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게르만은 강력한 무력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의 권위가 약하고 정치적 통합이 이뤄지지 않아 로마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고트인은 4-5세기 백년간 훈의 지배를 받고 중앙아시아 초원의 문화 및 전통의 영향을 받아 로마에 큰 위협이 되었다. 게르만 역시 훈의 영향을 받고나서야 로마를 위협할 만한 공성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훈은 유럽에 진출해 가장 강력한 알란 세력을 먼저 흡수한다. 훈이 확장하자 테르빙기 고트가 다음 목표였다. 루마니아에 훈이 이르자 로마는 위협을 느끼고 테르빙기 고트를 구원하려 하였지만 훈에 패배한다. 로마식 군제는 초원의 새로운 전술에 비해 후진적이었다. 내륙아시아의 초원군은 강한 기마술과 영국 장국보다 사거리가 2배인 합성궁을 이용한 강력한 궁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훈의 승리로 다뉴브 강 일대의 훈의 통치가 확립되자 이 지역 게르만의 로마로의 이주가 촉발된다. 훈은 겨우 10년 만에 헝가리 서부에서 볼가강 유역을 지배하고 안정화한다. 훈은 370-380년 점령지를 안정시키고 395년 확장하여 캅카스를 따라 사산조 페르시아와 로마를 공격한다. 

 유럽의 훈은 동아시아의 흉노가 점차 동진한 것이기에 그들과 매우 유사한 정치체제를 가졌다. 442-447년 사이 유럽 훈의 아틸라는 형을 암살하고 최고자리를 찬탈한다. 447년 아틸라는 동로마를 침공하여 발칸반도의 70개 도시를 함락한다. 이때 발칸은 철저히 파괴되어 5세가 말까지 사실상 황폐화되어 버려진다. 수도가 위협받은 동로마는 일시불로 금8100 로마파운드(2648kg)을 일시불로 상납하고 막대한 포로 몸값도 지불한다. 그리고 로마는 베오그라드에서 불가리아 스미슈토르까지의 동서500km 남북은 다뉴브가에서 150-200km에 달하는 상당한 영토를 훈에 강탈당한다. 

 훈은 동로마는 지속적으로 괴롭혔으나 서로마의 아예티우르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440년대 중반 아예티우르는 훈의 지원을 통해 갈리아를 통제하던 중 라인 강 연안의 프랑크 내부까지 손을 뻗치다. 사실 갈리아에 대한 양자의 입장은 달랐다. 아예티우르는 훈의 힘을 빌려 자신이 갈리아의 프랑크를 통제한다 생각했고, 훈은 훈대로 아예티우르를 이용해 자신들이 갈리아를 통제한다 생각했다. 그러던 중 아예티우르가 선을 넘은 것이다. 아예티우르와 훈은 갈리아에 서로 다른 왕위 계승자를 지원하며 공조체계가 붕괴하다. 

 양자는 전쟁을 벌이고 로마의 기록은 이를 로마의 승리로 남겼다. 하지만 사실상 훈의 승리로 보인다. 452년 아틸라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아예티우르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것이 그 방증이다. 갈리아에서 패퇴한 국가가 중심지를 침공하는데 수수방관한다는게 말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로마는 갈리아에서 중국의 한과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처럼 연공을 바치고 훈을 물린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승리로 기록한 것이다. 

 아틸라 사후 훈은 내전에 돌입한다. 아틸라가 무리하게 정권을 찬탈한 후폭풍이었고 그가 급사했기에 이렇다할 후사를 제대로 만들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위 내내 아틸라는 그의 정치적 기반은 서부 출신 귀족을 내세웠고 그가 죽자 동부 귀족들이 반발을 했다. 훈은 아틸라 사후 내전에도 사라지지 않고 460년대에로 로마를 압박했다. 하지만 뎅기지흐의 실패로 467-469년 훈은 해체한다. 

 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 대장 오도아케르는 훈계일 가능성이 높다. 오도아케르의 아버지인 에테크는 게르만계 어원이 아니다. 이는 튀르크, 몽골계 어원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 이름은 훈울푸스인데 이는 훈 늑대라는 뜻이다. 중앙아시아 즉, 튀르크, 몽골 문화권에서 늑대는 토템이자 신화적 조상으로 숭배된다. 

 유럽에 남긴 가장 큰 훈의 유산은 무엇보다 프랑크 왕국이다.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계 왕국으로 훈과는 민족적 거리가 있지만 게르만은 훈의 유럽 진출시기 수백년간 훈의 침략을 가장 먼저 받고 그들의 용병으로 편입되는 등 가장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을 차지할 만한 정치체제와 군사력을 훈으로부터 물려받은 사실상의 계승자에 가깝다. 프랑크 왕국은 유럽을 차지한 후 놀랍게도 대왕이 왕국을 분할해 주요 영지를 형제와 사촌에 분배했다. 클로비스 1세는 왕국을 4개로 분할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고 영역을 4개로 분할하는 것을 바로 동아시아때부터 기원한 흉노의 정치적 전통이다. 실제 5세기 초반에 이베리아를 점령한 알란도 영토를 4개로 나누었다. 그들은 흉노에 가장 먼저 흡수된 유럽 집단이었다. 그리고 흉노는 4개의 영역을 지배하는 지방의 왕들 아래 강력한 지방 군사귀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영지를 받아 기득권을 유지하였는데 이것이 중세 유럽의 봉건영주다. 중세시대 유럽의 중무장 기사는 귀족 계급과 동의어였다. 중세 기마 엘리트는 마상 사냥을 즐겼다. 사냥, 궁수, 매부리기 등의 취미를 즐겼는데 이는 로마시대에는 전혀없는 유럽 본연의 것이 아닌 초원의 문화다. 즉, 게르만이 흉노 지배귀족집단의 문화와 풍습을 이어 받은 것이다. 그리고 초원인들은 당연히 육식을 즐겼는데 이도 물려받아 중세의 유럽 귀족들은 강한 육식성향이 있었다. 훈식의 강한 예의 범절과 궁정의례 또한 강한 상무정신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흉노, 훈은 매우 강한 군사력을 가졌기에 중국에서도, 중앙아시아에서도, 유럽에서도 중심국가인 한과, 페르시아, 로마를 사실상 정벌하여 차지할 만한 충분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흉노와 훈 이후에 등장하는 내륙 아시아에 기반한 국가들은 그러한 행위를 한다. 하지만 훈은 그러지 않았다. 훈은 사실상 농경 국가의 정복을 통한 무리한 확장보다는 그들에게 조공을 강제해 부를 착취하고 교역을 통해 부를 얻고, 힘을 유지하며 주변을 복속하여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제국을 가장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안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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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0 : 구상섬전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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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가장 강한 인상을 주었던 문학은 한강의 '채식주의자', 천명관의 '고래', 류츠신의 '삼체'다. 그리고 이 중 딱 하나를 고른다면 그것은 역시 '삼체'다. 삼체는 여러 모로 놀라웠다. 우선 경직된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이렇게 창의적인 작가의 작품이 나왔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장르 소설일지라도 책이 상당한 두께를 자랑한다는 것. 그리고 그 두께도 추리소설 처럼 살짝 색깔만 바꾸어 중언부언하지 않고 매번 다른 이야기 같다는 것.(1-2-3권은 매번 중심인물이 완전히 바뀌며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 간격도 수백년에 달한다) 그리고 다들 공감하겠지만 이야기의 소재와 차원이 너무나도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런 삼체의 프리퀄 격인 구상섬전은 아마도 삼체인의 본격적인 존재를 알아차리기 이전의 시기를 다루는 듯 하다. 구상섬전은 사실상 삼체와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만 분위기나 중요한 단서와 인물로 삼체와의 연관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구상섬전은 세상에 갑작스레 나타나는 둥근 형태의 불빛 덩어리다. 색은 적색, 보라색, 노란색등으로 다양하고 안에는 전자기장이 있는 듯하기도 하고, 플라스마로 가득차 있는 듯 하기도 하다. 이것은 맑은 날에도 나타나지만 비오는 날에 더 잘나타나며 기류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물체를 마음대로 투과한다. 영어로는 라이트닝 볼이고, 한자로는 구상섬전인데 이것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국인 천이의 집에 갑자기 나타난다. 

 그날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호우가 심한 날이었다. 천이 가족은 식탁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구상섬전이 집벽을 뚫고 갑자기 나타나 부모를 재로 만들어 버리고는 굉음을 내며 사라져 버린다. 현상은 상당히 신기했는데 부모는 재가 되었지만 천이는 무사했고 반면 천이의 안쪽 조끼는 타버렸다. 그런데도 그는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반면, 냉장고는 멀쩡했는데 그 안에 냉동되있던 닭고기와 해산물은 모두 익어벼렸다. 

 하여튼 이 일은 천이의 인생을 바꾸어 버린다. 그는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평생을 부모를 앗아간 구상섬전을 연구하는데 바치기로 한다. 구상섬전을 연구하던 천이는 소령 린윈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과학자이자 군인이었는데 평생을 신무기 개발에 천착하는 사람이었다. 린윈은 번개를 신무기로 개발하려는 조직에 몸담고 있었고 이는 천이와의 중요한 접점이었다.

 의기투합한 그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군 조직과 연구소의 힘을 총동원하지만 구상섬전을 모델화하고 현실세계에 구현하는데는 힘이 턱없이 부쳤다. 여기에는 막대한 컴퓨티 파워와 이를 뒷받침할 자금이 필요했다. 린윈은 머리를 써서 세티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외계인을 찾는 이 프로그램을 해킹해 수많은 전 세계사람들이 무료로 기부하는 컴퓨팅 파워에 자신들의 구상섬전 프로그램을 돌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곳 적발이 되고, 그들은 한 러시아 과학자로부터 초대 메일을 받는다.

 러시아를 방문한 그들은 놀랍게도 냉전시대부터 러시아가 대규모 시설에서 구상섬전을 연구했고 이미 여러 차례 그것을 구현했음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우연에 가까웠고 결국 그들은 자연상태보다는 분명히 구상섬전을 높은 빈도로 출현시키긴 했지만 그것을 위한 분명한 수학적 모델링이나 변수조건을 갖고 있지 못했고 그런 방법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현상은 천이를 좌절시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린윈은 그렇지 않았고 그녀는 과학자 딩이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터닝포인트였다. 딩이는 관점을 전환시켰다. 구상섬전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일상에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활성화하는 것 뿐이라고. 관점의 전환으로 그들은 주어진 조건하에서 두 대의 헬기를 동원해 아크전기막을 펼쳐 구상섬전을 발견해낸다. 더 나아가 딩이는 구상섬전을 포획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비활성화된 상태의 구상섬전의 포획이 시작된다. 

 린윈은 구상섬전의 무기화에 착수한다. 구상섬전은 각각이 독특한 파장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그것이 활성화했을 때 어느 것을 공격하느냐를 결정했다. 어떤 구상섬전은 생물을 어떤 것은 컴퓨터 칩을 어떤 것은 식물을 공격했다. 처음엔 하나하나를 알 수 없어 동물을 죽이는 잔인한 실험을 했지만 곧 마이크로파와 대응함을 알게되어 구상섬전을 평화롭게 분류할 수 있었고 무기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구상섬전의 또 다른 특성이 밝혀진다. 구상섬전은 목표 공격물을 반드시 파괴했는데 놀랍게도 관측장비나 관측자가 없는 경우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졌다. 이는 관측자가 없는 경우 파동함수로 변해 확률구름처럼 존재하는 양자의 특성이다. 즉, 구상섬전은 거대한 양자로 전자였던 것이다. 딩이는 이런 개념을 제시했고 구상섬전 자체가 매우 거대했기에 이를 굉전자로 개념했다. 

 굉전자 개념은 놀라웠다. 굉전자의 존재는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굉원자와 굉중성자의 존재를 상정했다. 그렇다면 믿을 수 없는 정도로 커다란 원자가 이 세계에 같이 상존한다는 것이었고 그런 우주는 어떤 평행우주인지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구상섬전은 강력했지만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전자인만큼 상대방이 전자기막을 펼칠경우 쉽게 교란에 방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 때문에 구상섬전의 타케팅 공격 가능성에도 중국군 상부는 구상섬전을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구상섬전은 첫 사용은 그래서 전쟁이 아닌 테러 진압이었다. 중국의 원전은 한 테러 집단이 장악한다. 그들은 반과학 단체로 글자 그대로 인간이 중세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는 집단이었다. 그러면서도 테러를 위해서는 과학적 무기의 사용에 망설임이 없었다. 원전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견학을 와있었고 원전이 폭발할 경우 치명적 피해가 예상되었다. 린윈은 망설임 없이 인간을 죽이는 구상섬전을 사용한다. 테러범은 물론이고 아이들이 희생된다. 그리고 천이는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린윈을 떠나게 된다.

 천이는 대학에서 기상학을 연구했다. 그나마 구상섬전과 접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상섬전의 발견은 토네이도의 발견과 관련이 있었는데 그는 이 연구를 미국에서 하면서 미국의 토네이도 제거에 큰 이바지를 하게 된다. 토네이도는 발생과정에서 대기의 냉각이 큰 역할을 하는데 천이의 토네이도 예측 장치를 기반으로 해당 지역에 열발생 미사일을 발사해 토네이도를 원천 제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부메랑으로 날아온다. 중국에 전쟁이 일어난다. 책엔 구체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침공국은 미국의 그 동맹으로 추정된다. 토네이도 제거장치는 역으로 토네이도 발생도 가능하다. 토네이도 발생이 생길만한 지점을 포착해 냉각을 추진하는 미사일을 쏘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공격으로 중국의 항공모항과 연안함대는 궤멸적 타격을 입고 이 과정에서 린윈의 연인 주싱천이 사망한다. 그는 항모의 함장이었다.

 전쟁은 중국에 불리하게 돌아간다. 린윈은 구상섬전의 사용을 주장하지만 그녀의 주장은 관철되지 않는다. 그러다 한번의 기회가 돌아온다. 린윈가 그 부대는 어선으로 위장해 적의 항모 선단 한가운데에서 구상섬전을 발사한다. 모두 적의 회로를 태우는 구상섬전이었다. 하지만 적은 구상섬전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전자기 막으로 이를 모두 막아낸다.

 이후 딩이와 린윈은 굉원자핵을 발견한다. 이는 매우 가느다랗고 긴 막이었다. 이는 전자인 구상섬전 만큼은 당연히 적었지만 그들은 연구 끝에 굉원자핵도 여러 개를 포획할 수 있었다. 딩이는 굉원자핵들을 최소 5미터 이상 떨어드렸다. 원자핵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핵융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굉원자핵은 실제 세계의 원자핵과 다르게 매우 간단한 조건은 초속 400m정도의 움직인 만으로도 융합을 일으킬 수 있었다. 현실세계의 핵융합이 발생시키는 에너지를 고려하면 굉원자핵의 핵융합은 가공할만한 무기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이는 린윈을 과도하게 흥분시켰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도 위험했다. 굉원자핵도 굉전자인 구상섬전처럼 파장에 따라 특정한 것만을 공격했다. 구상섬전의 경우 에너지가 비교적 작아 피해범위가 적었지만 굉원자핵융합은 그것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런 우려로 중국군 당국은 전쟁의 교착에도 이 실험을 허용하지 않지만 린윈이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실험을 강행하다. 딩이는 실험 반경 수백미터는 완전히 파괴되고 이후에는 타게팅 물질이 파괴될 것으로 보았다. 린윈이 사용한 굉원자핵은 전자회로를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 중국군사령관이면서 린윈이 아버지는 이를 막기 위해 미사일 발사를 지시하지만 이미 상황은 늦었다. 실험은 강행되었고, 미사일은 회로가 타버려 공중폭파되었다. 핵융합의 위력은 커서 중국의 1/3까지 공격의 여파가 퍼져 해당지역이 농경사회로 돌아가버렸다. 그리고 이일로 린윈은 사망한다.

 우습게도 이 사건은 전쟁의 종결을 불러왔다. 미국과 우방은 이 실험을 파악하고 최악의 겨우 지구 전체가 정보화사회에서 후퇴할 것을 크게 우려했기 때문이다. 실제 중국내에서 자기들도 죽을 것을 각오하고 대규모의 전자장비를 노린 굉핵융합을 한다면 이 파장은 지구 전체로 퍼지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죽은 린윈이 그의 아버지에게 나타난다. 구상섬전이나 굉원자핵의 에너지에 죽은 사람들은 사실 죽었다기보다는 그들의 파장에 공명한 상태다. 그래서 현실 세계에서 사라지고 재가되는 것인데 그렇기에 양자구름처럼 확률적인 상태로 존재한다. 

 물론 린윈은 그렇다면 관측자가 분명한 자신의 아버지와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딩이는 천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놀라운 말을 한다. 일반 물질은 그렇지만 관측의지가 분명한 상태의 물질은 그것을 넘어서는 힘이 있기에 오래도록 붕괴상태를 버틸 수 있다고. 

 천이는 이런 일련의 사건 이후, 결혼을 하고 평온히 살아간다. 그리고 소식을 듣는다. 지하 깊은 곳에서 굉입자를 통한 실험이 이뤄졌는데 관측자나 관측장비가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양자 붕괴현상이 일어났다고. 이는 분명한 관측자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었는데 몇번의 실험이 더 일어나자 그 관측자는 돌연 이를 눈치챘는지 사라졌다고. 그리고 이 관측자는 외계인으로 추정된다고.

 책에는 분명히 나오지 않지만 이 관측자는 아마도 삼체세계에서 지구로 이미 보내놓은 관측자이거나 아니면 지구 문명의 발전을 막기 위해 모든 실험을 방해하는 지자가 아닌가 싶다. 이처럼 류츠신은 구상섬전과 삼체 세계의 연결을 위해 이런 부분과 딩이를 연결해 놓았다. 

 책은 너무나도 재밌었고, 깊은 여운과 놀라운 상상력,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준다. 양자중첩은 마치 죽은 사람의 영혼이 현실세계에 언제든지 나타나거나 주변에 있을 수 있게끔 하는 생각을 주며 과학과 영성을 연결시키는 느낌마저도 준다. 무척 재밌는 책이며, 삼체에 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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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던 아이들이 온다 - 세계적 교육혁신가의 알파세대를 위한 21세기형 미래교육
마크 프렌스키 지음, 허성심 옮김 / 한문화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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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인 마크프렌스키는 미래에 필요한 4가지 요소로 새로운 역량강화 신념, 사회참여실현, 기술 및 팀과의 공생, 자기 이해와 고유성을 제시한다. 그는 지금 교육이 낡은 프레임이 빠져 있다 생각한다. 그것은 두 가지로 하나는 전통적인 것인 소위 학문 중심의 학습이 중요하고 효과적이란 생각이다. 다른 하나는 비교적 최근의 것으로 테크놀로지가 학생의 성장과 학습에 방해요소라는 생각이다.

 테크에 대해 요구되는 새로운 관점은 그것이 중독을 일으키긴 하지만 서서히 진화한 인류의 새로운 신체부위로 여기는 관점이다. 인간에겐 상상력이 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현실화하기 어려웠지만 테크교육으로 상당부분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클라우드는 지구를 덮고 있으며 끝없이 정보를 내고 받는 추가적은 층이며 아이디어를 실체화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과거 청소년들에게는 대다수의 기존 일자리의 대체자가 되는 것이 요구되었다. 때문에 경험이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는 만큼 경험보다는 혁신과 발견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청소년에게 해야할 질문은 너를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어떤 새로운 역할을 맡고 깊냐?가 된다.

 또 다른 낡은 프레임은 모든 청소년에게 학문 중심 교육이 유용하고 모두가 이를 받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벗어나 모두가 긍정적인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사실 학문교육은 학문에 적성이 있는 소수에게만 유용했고, 대다수 청소년에겐 교육의 실패이자 제약이었다. 학문 중심 교육에서는 교육을 적게 받은 사람은 일종의 열등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 관점에서 교사나 교수가 하는 일은 학생의 학습량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거의 모든 교육자가 이런 방식으로는 실제 학습이 이뤄지지 않음을 알고 학생이 그것을 원하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최종목표 및 교육과정을 변경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미래와 지금은 역량 강화의 시대다. 이 시기는 학문 중심의 형식 학습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목표라고 여기지 말고 진짜 세상에 유용한 일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정도 여겨야 한다. 과거 학위는 3가지를 증명했다. 상당히 복잡할 일을 할 수 있고, 업무 완수까지 집요하게 일에 집착하고, 원하지 않는 일이라도 타인에게 필요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량강화시대에는 새로운 2가지 증명이 필요하다. 살아가면서 원치 않는 일은 계속하지 않아도 되고, 학교의 학습은 많은 경우 하고 싶은 일을 이루기 위해서 행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청소년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은 학습을 위한 학습이나 반복이 아니다. 무언가를 실현하고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평생역량을 제시한다. 이는 숙달에 평생이 걸릴 수 있으며, 한 번 획득한 기술을 일반적으로 평생 유지되는 특성을 갖는다. 역량강화 시대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새 기술을 새로운 환경에 적용하는 능력이 중요하기에 이런 것들이 강조된다. 

 과거 20세기의 교육은 낡은 성장 프레임을 갖고 있다. 우선 5세까지로 양육 및 어린의 신념 문화가 전달된다. 6-20세는 학생으로 학교에서 학문 중심으로 공동체의 문화, 역사, 주제를 학습한다. 이후는 직업 및 이력 단계로 직업을 찾아 일을 하는 것이다. 새로운 프레임은 다음과 같다. 시작 및 이해단계로 자기 이해와 역량강화의 신념, 자기만의 고유성을 표현하는 단계다. 다음은 확장-사회참여 실현에의 적용 단계로 자신의 고유한 장점과 흥미를 기반으로 진짜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프로젝트를 선택하고 서로 보완하며 세계 여러 청소년들과 팀을 이뤄 연결되는 시점이다. 마지막 실현단계는 자신만의 고유성을 이해하고 지금까지 완수한 사회참여 프로젝트에서 얻은 관계망을 결합해 자신에게 의미 있고 세상에 가치를 더하는 평생의 직업을 찾는 것이다. 

 부모의 역할도 변화해야 한다. 이제 부모는 자녀의 고유성과 독특한 부가가치를 배라학게 돕고 아이의 역량강화를 위해 어릴 적부터 자기 이해를 돕고 표현할 권한을 부여하고 디지털 기술과 새로운 공생관계를 허용해야 한다. 

 역량 강화 시대를 위한 새로운 기본 능력 프레임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시민으로 사회참여 실현의 순환고리를 실천한다.

 유용한 일의 실천-더 나은 세상 만들기-과정을 개선할 방법 고려하기-다시하기의 순환고리다.

 그리고 이 순환고리를 위해서 시민은 지속적인 변화에 대비해야 하고

 이 순환고리를 위해 신뢰와 존중, 자율, 협력, 친절이 바탕이 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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