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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0 : 구상섬전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8월
평점 :
내게 가장 강한 인상을 주었던 문학은 한강의 '채식주의자', 천명관의 '고래', 류츠신의 '삼체'다. 그리고 이 중 딱 하나를 고른다면 그것은 역시 '삼체'다. 삼체는 여러 모로 놀라웠다. 우선 경직된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이렇게 창의적인 작가의 작품이 나왔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장르 소설일지라도 책이 상당한 두께를 자랑한다는 것. 그리고 그 두께도 추리소설 처럼 살짝 색깔만 바꾸어 중언부언하지 않고 매번 다른 이야기 같다는 것.(1-2-3권은 매번 중심인물이 완전히 바뀌며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 간격도 수백년에 달한다) 그리고 다들 공감하겠지만 이야기의 소재와 차원이 너무나도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런 삼체의 프리퀄 격인 구상섬전은 아마도 삼체인의 본격적인 존재를 알아차리기 이전의 시기를 다루는 듯 하다. 구상섬전은 사실상 삼체와 완전히 다른 이야기지만 분위기나 중요한 단서와 인물로 삼체와의 연관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구상섬전은 세상에 갑작스레 나타나는 둥근 형태의 불빛 덩어리다. 색은 적색, 보라색, 노란색등으로 다양하고 안에는 전자기장이 있는 듯하기도 하고, 플라스마로 가득차 있는 듯 하기도 하다. 이것은 맑은 날에도 나타나지만 비오는 날에 더 잘나타나며 기류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물체를 마음대로 투과한다. 영어로는 라이트닝 볼이고, 한자로는 구상섬전인데 이것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국인 천이의 집에 갑자기 나타난다.
그날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호우가 심한 날이었다. 천이 가족은 식탁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구상섬전이 집벽을 뚫고 갑자기 나타나 부모를 재로 만들어 버리고는 굉음을 내며 사라져 버린다. 현상은 상당히 신기했는데 부모는 재가 되었지만 천이는 무사했고 반면 천이의 안쪽 조끼는 타버렸다. 그런데도 그는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반면, 냉장고는 멀쩡했는데 그 안에 냉동되있던 닭고기와 해산물은 모두 익어벼렸다.
하여튼 이 일은 천이의 인생을 바꾸어 버린다. 그는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평생을 부모를 앗아간 구상섬전을 연구하는데 바치기로 한다. 구상섬전을 연구하던 천이는 소령 린윈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과학자이자 군인이었는데 평생을 신무기 개발에 천착하는 사람이었다. 린윈은 번개를 신무기로 개발하려는 조직에 몸담고 있었고 이는 천이와의 중요한 접점이었다.
의기투합한 그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군 조직과 연구소의 힘을 총동원하지만 구상섬전을 모델화하고 현실세계에 구현하는데는 힘이 턱없이 부쳤다. 여기에는 막대한 컴퓨티 파워와 이를 뒷받침할 자금이 필요했다. 린윈은 머리를 써서 세티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외계인을 찾는 이 프로그램을 해킹해 수많은 전 세계사람들이 무료로 기부하는 컴퓨팅 파워에 자신들의 구상섬전 프로그램을 돌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곳 적발이 되고, 그들은 한 러시아 과학자로부터 초대 메일을 받는다.
러시아를 방문한 그들은 놀랍게도 냉전시대부터 러시아가 대규모 시설에서 구상섬전을 연구했고 이미 여러 차례 그것을 구현했음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우연에 가까웠고 결국 그들은 자연상태보다는 분명히 구상섬전을 높은 빈도로 출현시키긴 했지만 그것을 위한 분명한 수학적 모델링이나 변수조건을 갖고 있지 못했고 그런 방법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현상은 천이를 좌절시키기 충분했다. 하지만 린윈은 그렇지 않았고 그녀는 과학자 딩이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터닝포인트였다. 딩이는 관점을 전환시켰다. 구상섬전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일상에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활성화하는 것 뿐이라고. 관점의 전환으로 그들은 주어진 조건하에서 두 대의 헬기를 동원해 아크전기막을 펼쳐 구상섬전을 발견해낸다. 더 나아가 딩이는 구상섬전을 포획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비활성화된 상태의 구상섬전의 포획이 시작된다.
린윈은 구상섬전의 무기화에 착수한다. 구상섬전은 각각이 독특한 파장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그것이 활성화했을 때 어느 것을 공격하느냐를 결정했다. 어떤 구상섬전은 생물을 어떤 것은 컴퓨터 칩을 어떤 것은 식물을 공격했다. 처음엔 하나하나를 알 수 없어 동물을 죽이는 잔인한 실험을 했지만 곧 마이크로파와 대응함을 알게되어 구상섬전을 평화롭게 분류할 수 있었고 무기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구상섬전의 또 다른 특성이 밝혀진다. 구상섬전은 목표 공격물을 반드시 파괴했는데 놀랍게도 관측장비나 관측자가 없는 경우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졌다. 이는 관측자가 없는 경우 파동함수로 변해 확률구름처럼 존재하는 양자의 특성이다. 즉, 구상섬전은 거대한 양자로 전자였던 것이다. 딩이는 이런 개념을 제시했고 구상섬전 자체가 매우 거대했기에 이를 굉전자로 개념했다.
굉전자 개념은 놀라웠다. 굉전자의 존재는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굉원자와 굉중성자의 존재를 상정했다. 그렇다면 믿을 수 없는 정도로 커다란 원자가 이 세계에 같이 상존한다는 것이었고 그런 우주는 어떤 평행우주인지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구상섬전은 강력했지만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전자인만큼 상대방이 전자기막을 펼칠경우 쉽게 교란에 방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 때문에 구상섬전의 타케팅 공격 가능성에도 중국군 상부는 구상섬전을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구상섬전은 첫 사용은 그래서 전쟁이 아닌 테러 진압이었다. 중국의 원전은 한 테러 집단이 장악한다. 그들은 반과학 단체로 글자 그대로 인간이 중세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는 집단이었다. 그러면서도 테러를 위해서는 과학적 무기의 사용에 망설임이 없었다. 원전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견학을 와있었고 원전이 폭발할 경우 치명적 피해가 예상되었다. 린윈은 망설임 없이 인간을 죽이는 구상섬전을 사용한다. 테러범은 물론이고 아이들이 희생된다. 그리고 천이는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린윈을 떠나게 된다.
천이는 대학에서 기상학을 연구했다. 그나마 구상섬전과 접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상섬전의 발견은 토네이도의 발견과 관련이 있었는데 그는 이 연구를 미국에서 하면서 미국의 토네이도 제거에 큰 이바지를 하게 된다. 토네이도는 발생과정에서 대기의 냉각이 큰 역할을 하는데 천이의 토네이도 예측 장치를 기반으로 해당 지역에 열발생 미사일을 발사해 토네이도를 원천 제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부메랑으로 날아온다. 중국에 전쟁이 일어난다. 책엔 구체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침공국은 미국의 그 동맹으로 추정된다. 토네이도 제거장치는 역으로 토네이도 발생도 가능하다. 토네이도 발생이 생길만한 지점을 포착해 냉각을 추진하는 미사일을 쏘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공격으로 중국의 항공모항과 연안함대는 궤멸적 타격을 입고 이 과정에서 린윈의 연인 주싱천이 사망한다. 그는 항모의 함장이었다.
전쟁은 중국에 불리하게 돌아간다. 린윈은 구상섬전의 사용을 주장하지만 그녀의 주장은 관철되지 않는다. 그러다 한번의 기회가 돌아온다. 린윈가 그 부대는 어선으로 위장해 적의 항모 선단 한가운데에서 구상섬전을 발사한다. 모두 적의 회로를 태우는 구상섬전이었다. 하지만 적은 구상섬전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전자기 막으로 이를 모두 막아낸다.
이후 딩이와 린윈은 굉원자핵을 발견한다. 이는 매우 가느다랗고 긴 막이었다. 이는 전자인 구상섬전 만큼은 당연히 적었지만 그들은 연구 끝에 굉원자핵도 여러 개를 포획할 수 있었다. 딩이는 굉원자핵들을 최소 5미터 이상 떨어드렸다. 원자핵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핵융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굉원자핵은 실제 세계의 원자핵과 다르게 매우 간단한 조건은 초속 400m정도의 움직인 만으로도 융합을 일으킬 수 있었다. 현실세계의 핵융합이 발생시키는 에너지를 고려하면 굉원자핵의 핵융합은 가공할만한 무기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이는 린윈을 과도하게 흥분시켰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도 위험했다. 굉원자핵도 굉전자인 구상섬전처럼 파장에 따라 특정한 것만을 공격했다. 구상섬전의 경우 에너지가 비교적 작아 피해범위가 적었지만 굉원자핵융합은 그것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런 우려로 중국군 당국은 전쟁의 교착에도 이 실험을 허용하지 않지만 린윈이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실험을 강행하다. 딩이는 실험 반경 수백미터는 완전히 파괴되고 이후에는 타게팅 물질이 파괴될 것으로 보았다. 린윈이 사용한 굉원자핵은 전자회로를 목표로 삼는 것이었다. 중국군사령관이면서 린윈이 아버지는 이를 막기 위해 미사일 발사를 지시하지만 이미 상황은 늦었다. 실험은 강행되었고, 미사일은 회로가 타버려 공중폭파되었다. 핵융합의 위력은 커서 중국의 1/3까지 공격의 여파가 퍼져 해당지역이 농경사회로 돌아가버렸다. 그리고 이일로 린윈은 사망한다.
우습게도 이 사건은 전쟁의 종결을 불러왔다. 미국과 우방은 이 실험을 파악하고 최악의 겨우 지구 전체가 정보화사회에서 후퇴할 것을 크게 우려했기 때문이다. 실제 중국내에서 자기들도 죽을 것을 각오하고 대규모의 전자장비를 노린 굉핵융합을 한다면 이 파장은 지구 전체로 퍼지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죽은 린윈이 그의 아버지에게 나타난다. 구상섬전이나 굉원자핵의 에너지에 죽은 사람들은 사실 죽었다기보다는 그들의 파장에 공명한 상태다. 그래서 현실 세계에서 사라지고 재가되는 것인데 그렇기에 양자구름처럼 확률적인 상태로 존재한다.
물론 린윈은 그렇다면 관측자가 분명한 자신의 아버지와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딩이는 천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놀라운 말을 한다. 일반 물질은 그렇지만 관측의지가 분명한 상태의 물질은 그것을 넘어서는 힘이 있기에 오래도록 붕괴상태를 버틸 수 있다고.
천이는 이런 일련의 사건 이후, 결혼을 하고 평온히 살아간다. 그리고 소식을 듣는다. 지하 깊은 곳에서 굉입자를 통한 실험이 이뤄졌는데 관측자나 관측장비가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양자 붕괴현상이 일어났다고. 이는 분명한 관측자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었는데 몇번의 실험이 더 일어나자 그 관측자는 돌연 이를 눈치챘는지 사라졌다고. 그리고 이 관측자는 외계인으로 추정된다고.
책에는 분명히 나오지 않지만 이 관측자는 아마도 삼체세계에서 지구로 이미 보내놓은 관측자이거나 아니면 지구 문명의 발전을 막기 위해 모든 실험을 방해하는 지자가 아닌가 싶다. 이처럼 류츠신은 구상섬전과 삼체 세계의 연결을 위해 이런 부분과 딩이를 연결해 놓았다.
책은 너무나도 재밌었고, 깊은 여운과 놀라운 상상력,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준다. 양자중첩은 마치 죽은 사람의 영혼이 현실세계에 언제든지 나타나거나 주변에 있을 수 있게끔 하는 생각을 주며 과학과 영성을 연결시키는 느낌마저도 준다. 무척 재밌는 책이며, 삼체에 뒤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