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와 훈 -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유라시아 세계의 지배자들
김현진 지음, 최하늘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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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흉노란? 

 흉노는 대개 야만족, 그리고 초지의 유목민, 침략자, 내륙아시아 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편견이다. 흉노가 있었던 내륙아시아란 중앙아시아, 러시아 서부와 동부와 북부를 아우르고 몽골과 내몽골, 지금의 중국 서북부의 광대한 지역이다. 기후도 단지 초지가 아니다. 이렇게 영역이 광대하니 기후도 사막, 극한, 온대림, 침엽수림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기후가 다양하니 거주민도 농경민, 목축민, 도시민, 수렵민으로 다양하다. 민족도 그러하다. 동북아시아인, 이란계, 인도계, 동유럽계, 게르만계가 모두 흉노에 나타난다.

 흉노는 잦은 교역과 이주를 했기에 수많은 언어와 민족, 종교가 다층적일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지리적으로 유라시아의 모든 지역에 접한 만큼 다른 지역 태생과 다르게 모든 종교와 사상의 중심지에 방문하고 접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종교와 사상 역시 다양하고 관용적이었다. 

 유라시아의 초원 유목민은 초지를 따라 돌아다니기에 명확한 영토관념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들은 고정된 초지를 오가며 생활하는데 비교적 확실한 영토관념을 갖고 있었다. 정치체제 역시 통념과 다르게 엄격했다. 

 흉노의 정치체제의 정점은 선우다. 하지만 실제 행정업무는 골드후가 담당했다. 그리고 지방관으로 좌현왕과 우현왕을 두었는데 좌현왕은 동부의 통치자, 우현왕은 서부의 통치자였다. 이중 흉노는 전통적으로 동부를 중시했기에 선우의 후계자를 좌현왕으로 삼았다. 또한 그 아래에 4개의 지방관직을 두었다. 서쪽에 우도기왕과 우도지왕 동쪽에 좌도기왕과 좌도지왕이다. 이들 역시 선우의 아들 내지는 형제였다. 이들 왕의 밑에는 육각왕이라는 최고 귀족이 존재했고 그 아래에는 24만기라는 제국내 최고 지방 총독이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토착관리가 존재했는데 이들은 사실상 말단 지방의 행정관이자 세금징수관 역할을 하였다. 

 

2. 흉노와 중국

 흉노의 선우 묵특은 반란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집권한다. 그리고 반대 가족과 귀족을 모두 숙청한다. 그는 동의 동호와 서의 월지를 격파하고 30만 대군을 양성한다. 기원전 200년 중국은 통일한 한 고조는 강력한 위협인 흉노에 도전했지만 백등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한은 사실상 오랜 기간 흉노의 조공국으로 전락한다. 묵특은 한 문제 시기 신장을 정복하고 카자흐 일대의 26국을 정복하는 등 위세가 대단하여 한 문제 역시 조공을 지속할 수 밖에 없었다. 

 중의 한제국은 BC134년부터 무려 70년간 흉노에 조공한다. 그러다 한 무제 때에 이르러 흉노가 정치적 혼란에 이르자 반격한다. 군신 선우가 죽자 그의 동생 이지사가 정통 후계자인 좌현왕 어단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어단은 한나라에 항복하고 한 무제를 여세를 몰아 묵특 선우에게 1세기 전에 빼앗긴 오르도스 지방을 탈환한다. 그리고 수많은 흉노의 부왕들이 이지사에 반발해 한에 투항한다. 

 그럼에도 흉노는 아직 강성하여 한과 1세기 가량 일진일퇴를 벌인다. 서기 60년 한은 흉노를 격파해 타림분지를 장악한다. 흉노의 패배는 복속부족인 오손과 오환의 이탈을 불러왔다. 흉노는 잦은 패배와 내부 반란으로 흔들렸고 그러자 백년간 선우가 8명이나 등장하는 대혼란기에 빠진다. 흉노는 묵특시기에 거대화하여 남북으로 분리되었는데 혼란기에 북의 질지와 남의 호한야 선우가 살아남았고 이중 호한야가 한나라에 항복해 봉신이 되고 많다. 그리고 호한야는 한과 연합해 질지를 격파한다. 

 하지만 한의 혼란기가 오고 외척인 왕망이 일시적으로 한을 멸하고 신을 건국하는 혼란기가 오자 흉노는 주변 부족을 다시 복속하고 영토를 회복한다. 하지만 남과 북의 분리가 항구화한다. 그리고 남흉노는 중국의 동맹화하고 만다. 그리고 선비족이 등장한다. 선비는 중국과 동맹을 맺고 흉노를 침공한다. 서기 87년 한, 선비 연합군은 흉노 선우를 살해한다. 그러자 55개 흉노 부락이 한에 투앟한다. 서기 89년 한의 두헌이 몽골고원에서 다시 선우를 격파하고 흉노 귀족과 병사 1만 3천을 죽이자 무려 20만의 흉노인이 한에 투항한다. 이후 2세기간 힘을 잃은 흉노는 튀르크, 강거, 선비, 오손에 포위되는 형국이 되고 만다. 

 흉노를 격파한 선비는 흉노와 다르게 제국을 형성하지 못한다. 남흉노는 선비와 오환 중국에 끼인 상태였다. 삼국시대 위의 조조는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남흉노의 선우를 낙양에 인질로 삼고 우현왕으로 하여금 흉노를 다스리고 남흉노를 5부로 나누어 중국인이 흉노를 다스리게 했다. 이는 흉노에 매우 굴욕적 처사였다. 

 이후 조씨의 위나라가 멸망하고 진이 들어선다 서기 292년 진에 내전이 일어나자 흉노가 반발한다. 그들은 304년 유연의 통치아래에서 독립을 선언한다. 유연은 자신이 흉노와 중국의 통치자라 주장하며 308년 중화황제로 즉위하며 5호 16국 시대를 연다. 이후 유총이 311년 낙양을 점령하고 진 회제를 회계공으로 격하시킨다.316년 흉노는 장안마저 점령하고 면제도 사로 잡아 회평후로 격하시킨다. 그리고 두 전직 황제는 결국 처형된다. 나머지 진황가는 장강으로 도망쳐 망명국가인 동진을 건국한다. 이로써 중국은 서부는 전량이 통제, 북동부는 선비가 통제, 나머지는 모두 흉노가 통제하는 형국이 이른다. 

 북중국을 통일한 유총은 318년 죽는다. 흉노는 지배층이 다시 분열하여 유총의 아들 유환이 장인인 군준이 살해당한다. 하지만 유요가 군준을 제거하고 유요는 국호를 한에서 조로 변경한다. 하지만 갈부의 석륵이 이탈하여 후조를 세운다. 석륵과 유요의 대결에서 석륵이 승리하고 그는 야만적 통치를 일삼아 한인을 탄압한다. 이후 한인 염민이 권력을 장악하여 갈인 20만을 대량 학살하고 350년 대위를 건국해 흉노시대를 종결한다. 351년 모용씨의 선비국가 전연과 저의 국가 전진이 북중국의 옛 흉노땅을 차지한다. 


2. 중앙아시아의 흉노

 남흉노는 중국의 복속된 후 오히려 시기를 잘타 북중국을 장악하지만 북흉노는 선비에 패한다. 하지만 그들은 절멸되진 않았다. 이들은 알타이 지방에 살아남아 중앙아시아로 진출한다. 중앙아시아엔 쿠샨이 있었다. 구샨은 사산조페르시아의 속신으로 쿠샨샤로 불리며 존속하다 4세기 훈의 침입을 받는다. 4세기가 되자 알타이와 우랄 산맥 사이의 모든 국가와 부족이 훈에 정복된다.

 용어가 자연스레 흉노에서 훈으로 바뀌었는데 중앙아시아의 훈은 흉노에서 유래했다. 결정적 증거는 흉노의 도구인 훈식 청동솥이다. 

 중앙아시아의 에프탈 왕조는 스스로를 훈이라 칭했다. 하얀색은 유목민에게 서쪽을 의미하기에 흉노에게 중앙아시아는 서쪽이고 그래서 중앙아시아의 훈은 백훈이라 불리기도 한다. 에프탈 훈은 페르시아와 공통의 적 키다라를 물리친다. 그리고 에프탈은 이후 페르시아를 침공해 그들이 차지한 키다라 영토를 모두 빼앗고 페르시아를 속국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에프탈은 사실상 중앙아시아 일대의 모든 백훈계 집단의 지배자가 된다. 

 페르시아는 484-550년까지 훈제국에 연공을 상납한다. 에프탈 훈은 페르시아를 복속하고 동으로 확장해 영토가 페르시아, 카슈미르, 쿠챠, 캬슈카르, 호탄에 이른다. 5세기 후반에는 간다라와 인도북서부를 지배하기까지 한다. 6세기 중반 에프탈 훈은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로 동으로는 신장, 남은 인도 중부, 북은 카자흐 초원, 서는 동로마에 이른다. 

 그러다 6세기 중반 돌궐이 나타난다. 에프탈 훈은 유연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유연이 돌궐에 멸망한다. 에프탈에 복속되어 있던 사산조 페르시아는 돌궐과 연합하고 양자에 끼인 에프탈 훈은 결국 페르시아의 후스라우 1세에 항복한다. 에프탈 붕괴 후 돌궐과 사산페르시아는 충돌하고 그 공백에서 다양한 백훈계 집단이 등장한다. 백훈은 높은 수준의 문화를 자랑했다. 이들은 종교적 다원주의를 지향했고 높은 문화수준과 세계주의를 보였으며 아프간의 바미얀 석굴은 백훈 시대의 작품이다. 


3. 유럽의 훈

 훈과 조우하기 전 유럽의 게르만은 매우 기초적 수준의 정치 사회체제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게르만은 강력한 무력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의 권위가 약하고 정치적 통합이 이뤄지지 않아 로마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고트인은 4-5세기 백년간 훈의 지배를 받고 중앙아시아 초원의 문화 및 전통의 영향을 받아 로마에 큰 위협이 되었다. 게르만 역시 훈의 영향을 받고나서야 로마를 위협할 만한 공성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훈은 유럽에 진출해 가장 강력한 알란 세력을 먼저 흡수한다. 훈이 확장하자 테르빙기 고트가 다음 목표였다. 루마니아에 훈이 이르자 로마는 위협을 느끼고 테르빙기 고트를 구원하려 하였지만 훈에 패배한다. 로마식 군제는 초원의 새로운 전술에 비해 후진적이었다. 내륙아시아의 초원군은 강한 기마술과 영국 장국보다 사거리가 2배인 합성궁을 이용한 강력한 궁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훈의 승리로 다뉴브 강 일대의 훈의 통치가 확립되자 이 지역 게르만의 로마로의 이주가 촉발된다. 훈은 겨우 10년 만에 헝가리 서부에서 볼가강 유역을 지배하고 안정화한다. 훈은 370-380년 점령지를 안정시키고 395년 확장하여 캅카스를 따라 사산조 페르시아와 로마를 공격한다. 

 유럽의 훈은 동아시아의 흉노가 점차 동진한 것이기에 그들과 매우 유사한 정치체제를 가졌다. 442-447년 사이 유럽 훈의 아틸라는 형을 암살하고 최고자리를 찬탈한다. 447년 아틸라는 동로마를 침공하여 발칸반도의 70개 도시를 함락한다. 이때 발칸은 철저히 파괴되어 5세가 말까지 사실상 황폐화되어 버려진다. 수도가 위협받은 동로마는 일시불로 금8100 로마파운드(2648kg)을 일시불로 상납하고 막대한 포로 몸값도 지불한다. 그리고 로마는 베오그라드에서 불가리아 스미슈토르까지의 동서500km 남북은 다뉴브가에서 150-200km에 달하는 상당한 영토를 훈에 강탈당한다. 

 훈은 동로마는 지속적으로 괴롭혔으나 서로마의 아예티우르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440년대 중반 아예티우르는 훈의 지원을 통해 갈리아를 통제하던 중 라인 강 연안의 프랑크 내부까지 손을 뻗치다. 사실 갈리아에 대한 양자의 입장은 달랐다. 아예티우르는 훈의 힘을 빌려 자신이 갈리아의 프랑크를 통제한다 생각했고, 훈은 훈대로 아예티우르를 이용해 자신들이 갈리아를 통제한다 생각했다. 그러던 중 아예티우르가 선을 넘은 것이다. 아예티우르와 훈은 갈리아에 서로 다른 왕위 계승자를 지원하며 공조체계가 붕괴하다. 

 양자는 전쟁을 벌이고 로마의 기록은 이를 로마의 승리로 남겼다. 하지만 사실상 훈의 승리로 보인다. 452년 아틸라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아예티우르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것이 그 방증이다. 갈리아에서 패퇴한 국가가 중심지를 침공하는데 수수방관한다는게 말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로마는 갈리아에서 중국의 한과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처럼 연공을 바치고 훈을 물린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승리로 기록한 것이다. 

 아틸라 사후 훈은 내전에 돌입한다. 아틸라가 무리하게 정권을 찬탈한 후폭풍이었고 그가 급사했기에 이렇다할 후사를 제대로 만들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위 내내 아틸라는 그의 정치적 기반은 서부 출신 귀족을 내세웠고 그가 죽자 동부 귀족들이 반발을 했다. 훈은 아틸라 사후 내전에도 사라지지 않고 460년대에로 로마를 압박했다. 하지만 뎅기지흐의 실패로 467-469년 훈은 해체한다. 

 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 대장 오도아케르는 훈계일 가능성이 높다. 오도아케르의 아버지인 에테크는 게르만계 어원이 아니다. 이는 튀르크, 몽골계 어원이다. 그리고 그의 형제 이름은 훈울푸스인데 이는 훈 늑대라는 뜻이다. 중앙아시아 즉, 튀르크, 몽골 문화권에서 늑대는 토템이자 신화적 조상으로 숭배된다. 

 유럽에 남긴 가장 큰 훈의 유산은 무엇보다 프랑크 왕국이다.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계 왕국으로 훈과는 민족적 거리가 있지만 게르만은 훈의 유럽 진출시기 수백년간 훈의 침략을 가장 먼저 받고 그들의 용병으로 편입되는 등 가장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을 차지할 만한 정치체제와 군사력을 훈으로부터 물려받은 사실상의 계승자에 가깝다. 프랑크 왕국은 유럽을 차지한 후 놀랍게도 대왕이 왕국을 분할해 주요 영지를 형제와 사촌에 분배했다. 클로비스 1세는 왕국을 4개로 분할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고 영역을 4개로 분할하는 것을 바로 동아시아때부터 기원한 흉노의 정치적 전통이다. 실제 5세기 초반에 이베리아를 점령한 알란도 영토를 4개로 나누었다. 그들은 흉노에 가장 먼저 흡수된 유럽 집단이었다. 그리고 흉노는 4개의 영역을 지배하는 지방의 왕들 아래 강력한 지방 군사귀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영지를 받아 기득권을 유지하였는데 이것이 중세 유럽의 봉건영주다. 중세시대 유럽의 중무장 기사는 귀족 계급과 동의어였다. 중세 기마 엘리트는 마상 사냥을 즐겼다. 사냥, 궁수, 매부리기 등의 취미를 즐겼는데 이는 로마시대에는 전혀없는 유럽 본연의 것이 아닌 초원의 문화다. 즉, 게르만이 흉노 지배귀족집단의 문화와 풍습을 이어 받은 것이다. 그리고 초원인들은 당연히 육식을 즐겼는데 이도 물려받아 중세의 유럽 귀족들은 강한 육식성향이 있었다. 훈식의 강한 예의 범절과 궁정의례 또한 강한 상무정신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흉노, 훈은 매우 강한 군사력을 가졌기에 중국에서도, 중앙아시아에서도, 유럽에서도 중심국가인 한과, 페르시아, 로마를 사실상 정벌하여 차지할 만한 충분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흉노와 훈 이후에 등장하는 내륙 아시아에 기반한 국가들은 그러한 행위를 한다. 하지만 훈은 그러지 않았다. 훈은 사실상 농경 국가의 정복을 통한 무리한 확장보다는 그들에게 조공을 강제해 부를 착취하고 교역을 통해 부를 얻고, 힘을 유지하며 주변을 복속하여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제국을 가장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방안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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