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의 조선사 - 지배 권력에 맞선 백성의 열 가지 얼굴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 2
조윤민 지음 / 글항아리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오래전 이미 역사학계에서는 위대한 인물이나 왕들이 아닌 일반 사람들의 역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역사를 움직이고 사실상 중요한 것은 이들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아직도 역사는 주요 인물들이나 고관대작 중심으로 다루어질 뿐 일반백성들에 대한 연구와 시선을 적은 편이다. 아직 시선이 완전히 전환되지 않은 측면도 있고, 고관대작들에 비해 백성에 관한 기록은 사실 매우 미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모멸의 조선사는 조선시대 백성들의 삶을 다룬 책이다. 요약하면 고난함과 계속되는 수탈, 나름의 저항이라 할수 있겠다.

 책을 통해 나의 조상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조선일반 백성들의 삶의 고난함을 느낄수 있었고 더불어 단순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조선백성들의 여러 직업을 느껴볼수 있었다. 이런 것들이 이 책의 장점이다.

 조선하면 백성의 직업으로 농민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이 책은 그 이에도 상인과 수공업자, 광산업자, 광대, 백정, 노비, 도시노동자, 어부, 기생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조선이 농업에 근간한 나라인 만큼 농민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양반층은 자신들 이외에 모든 직업을 멸시했지만 그래도 농업경제이고 그것이 자신들의 세력 기반인지라 농업인을 천하의 근본이라 칭하며 우대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뿐 자신들의 세력 기반이니 농민은 착취와 수탈의 제1대상에 불과했다.

 양인인 농민은 본래 법적으로는 자신이 토지를 보유했을 시에는 토지세인 전세와 각종 역, 그리고 공납을 부담했다. 하지만 조선 중후기로 갈수록 양반층의 토지겸병이 시작되면서 병작농으로 대부분 전락한다. 병작농은 대개 자신의 수확물의 절반을 바치고, 토지세는 양반이 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조선 후기 농업생산량이 증대하면서 노동의 가치가 하락하자, 위치가 크게 하락한다.

 노동의 가치가 줄어 소작농들끼리 대지주의 토지 경작권을 갖고 경쟁하는 위치에 까지 놓이게 된것이다. 그러다보니 지주의 몫이었던 토지세는 물론이유 내년의 종자까지 병작농의 부담이 되니 일년농사의 소출중 자신의 몫은 겨우 20%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거기에 수시로 이런 저런 명목으로 역에 동원되어 농사시기를 놓치기 일쑤였으며 주변 농민이 도망이라도 치면 자신에게 그 몫이 전가되기도 했다. 역의 부담은 나날이 커져 조선후기에 이르르면 일부 농민들은 남자아이를 낳는 것을 꺼리기 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후기 이앙법과 이모작이 성행하면서 농민층은 크게 변화한다. 조선의 세력들은 이앙법이 비교적 일찍 개발되었음에도 법적으로 금지시켰는데 이는 물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농사를 망칠 위험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금지에도 이앙법은 급속히 퍼졌는데 노동력이 크게 절감되고 생산력은 커서 각종 수탈에도 그럭저럭 먹고 살만큼의 식량을 확보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세금의 대상은 쌀뿐이었으므로 이모작을 통한 보리는 온전히 농민의 몫이 되는 점도 중요한 동인이었다.

 이앙법으로 노동력이 절감되자 토지에서 쫓겨나거나 상황이 악화되는 농민이 크게 많아졌으며 일부 농민은 부농으로 성장하여 양반층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상인의 삶도 기막히다. 이들은 양반층에 의해 천시받았으며 상업자체가 조선초기부터 권력에 의해 강하게 틍제받았다. 이는 농업경제에 기반한 양반층이 상업의 지나친 성장이 강한 사회변혁을 이끌고 와 자신들의 기반을 흔들 것을 우려해서였다. 때문에 시장은 원천적으로 금지였으며 도성내 육의전을 운영하는 시전상인들만 상업이 가능했다. 이들 시전상인은 이런 독점의 대가로 왕가나 주요 관료들의 행사의 인력 및 운영물품을 대야했고, 이를 충원하기 위해 매점매석을 일삼고 물가를 조절하여 백성의 삶을 고달프게 했다.

 농업생산력과 화폐경제의 발달로 조선후기 들이 사상의 세력이 강해졌다. 이들이 시전상인들과 경쟁하기 시작했고, 도성주위엔 상설시장이 그리고 지방에는 5일장이 정례화된다. 하지만 이들 사상역시 시전상인의 위치를 그저 대물림한 것에 불과해 사회를 변혁하는 세력이나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킬 상업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그져 중앙의 관료들에게 줄을 대어 불공정한 비리를 저지르거나 매점매석으로 백성을 삶을 어지럽힐 뿐이었다.

 중앙에 의지하고 불공정 거래로 이미 경재력이 없었던 사상들은 개화기 외국 상품과 외국 자본에 거의 대응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자생력이 없었던 것이다.

 다음은 백정이다. 백정은 본디 고려시대만 해도 백성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것을 세종때 차별을 없애고자 이들을 백정이라 칭하면서 백정은 차별의 용어로 변모하고 본디 백정이란 말은 백성으로 대체된다. 이들은 조선의 유랑민이었다. 정착농업경제국가에서 유랑민은 위정자들이 보기에 불안한 존재였다. 여러 반란 세력에 쉽게 가담할수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수탈에서 자유로울수 있었다. 조선은 이들에게 토지를 제공하거나 역을 면해주는 조건으로 정착시키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차별은 전혀사라지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이들이 북방민족출신이 다수라는 점이 한몫한다. 이른바 오랑캐 취급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백성들중 사정에 따라 백정으로 편입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그렇게만 볼수 없는 점도 있었다. 이들에 대한 차별은 복식와 일상에서의 의례에서도 엄청났는데 남자 백성의 경우 항상 패랭이를 써야했고, 혼인한 여자는 쪽빗을 사용하지 못하고 머리를 둥글게 올려 말아야했다. 특히 패랭이는 양인의 경우 상을 치룰때만 죄인이라는 명목으로 쓰는 것이라 그 차별적 의미가 더욱 엄청났다. 백정은 일반 양인의 아이에게까지 존대어를 써야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일반 양인남성들이 백정아녀자를 성적으로 희롱했다는 점이다. 백정의 아녀자를 올라타 말이나 소취급을 하는 놀이였는데 일제시기 까지 이어져, 법적으로 차별이 금지된 당시에 자녀의 운동회에 참가했던 백정계급의 어머니가 딸이 보는 눈앞에서 그 일을 당하고 자살했다는 장면이 책에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광대다. 광대는 한때 조선시대에 4만명에 이를 정도로 수가 엄청났는데 이는 조선의 억불정책에 기인한다. 상당수의 승려가 절에서 쫓겨나면서 유랑인이 되고 광대집단에 합류한 것이다. 또한 많은 농민들이 지주에 토지를 잃고 유랑민이 되면서 합류하기도 하였다. 광대들은 주로 왕실이나 양반가문의 행사, 그리고 과거 급제 행사에 출연했다. 광대들은 조선후기에 수가 많아지는데 그 시기 들어 이전보다 과거 횟수가 매우 많아졌고, 지방에 시장들이 많아 짐에 따라 광대가 할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책 조선의 모멸사를 보면 일정한 패턴이 느껴진다. 조선 초기 공고했던 신분제가 법을 만들고 이끌어나간 양반층의 이익도모에 의해 무너져감에 따라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후기 들어 농업생산력 발달에 따른 농민의 분화 및 유랑민화, 그리고 상업의 발달로 시장과 상품에 대한 수요가 커진 것도 한몫한다. 이에 따라 백성들의 직업과 그 양상은 매우 다양해졌지만 수탈과 착취는 오히려 강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일부 농민이나 상업계층은 양반의 권력을 흔들어 놓을 만큼 성장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을 착취해온 시스템에 감히 도전할 의사나 안목을 갖지 못한다.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계층으로 사회를 변혁해나가기 보다는 기존 양반층에 돈으로 기대거나 합류하여 자신과 같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세력으로 남게된다. 이래서 조선이 망한 것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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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18-03-01 1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었던 책이네요...급 관심 가요...

2018-03-13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닷슈 2018-03-13 10:14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피지배층을 최대한 짜내기만합니다 나름괜찮았다던 세종이나 영정조시기도 근본적으론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