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권성욱 지음 / 미지북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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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은 중국이 일본과 2차대전에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전쟁이다. 하지만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 그리고 본격적인 전쟁이 38년에 시작했기에 오히려 조금더 다른 전쟁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이 전쟁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기도 하다. 2차대전에 유럽에서의 전쟁이 주로 유명하고, 아시아에서는 미국과 일본과의 전쟁만이 알려져 있지만 중일전쟁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영향력과 한 축을 담당했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다.

 책은 엄청 두껍다. 이 많은 일본군과 중국군의 주요 지휘관들과 전쟁의 개관과 뒷배경을 모두 파악하고 서술하느라 저자가 엄청난 고생을 했음을 짐작할수 있다. 쓸데없는 내용을 지리하게 써놨나 싶기도 했는데 읽어보니 마땅히 빠뜨릴 만한 것도 없다. 물론 상세히 쓰시기는 했다. 읽으며 3가지 정도를 얻은 것 같다. 좀처럼 익숙치 않은 중국의 주요 성의 위치와 도시 등의 지리적 감각, 무능하고 부패하여 항일전쟁은 물론 국공내전에서도 참패한 장개석 국민당 정권에 대한 재인식, 중일전쟁의 2차대전에서의 영향력이다.

 중국 신해혁명으로 청왕조가 무너지고 기대했던 위안스카이와 그가 이끄는 북양군의 이탈로 국민정부는 곧 내전에 돌입한다. 난징정부는 세력을 규합해 북양정권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위안스카이는 반란으로 황제자리에 오르지만 시대착오적 행각을 일삼아서 지지기반을 빠르게 잃어갔고, 곧 죽는다. 중국은 역사상 늘 그렇듯 중앙정부가 무너지면 곧바로 지방군벌들이 날뛰는데 위안스카이가 죽은 당시가 그러했다. 이들은 중국 북경을 놓고 다투었는데 당시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지휘관 장제스는 돋보였다. 장제스는 만주의 군벌은 장쭤린을 전쟁에서 이겼는데 당시 만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일본은 장쭤린이 친일적 성향을 보이지 않자 그가 탄 열차를 폭파하여 암살한다. 일본은 우두머리가 없는 무주공산을 노린 셈인데 그의 아들 장쉐량이 의외로 만주의 지배권을 빠르게 장악하며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장쉐량은 두고두고 장제스의 발목을 잡는다.

 만주는 당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한반도를 장악한 일본은 이를 호시탐탐노리고 있었다. 일본은 늘 그렇듯 트집을 잡아 기습 공격하였고 장쉐량의 동북군은 지리멸령하게 무너진다. 물론 동북군의 수가 일본군을 압도하여 충분한 반격과 재정비의 기회가 있었지만 일본이 만주 전체를 노리는게 아니라 무언가를 원한다고만 생각했던 장쉐량은 본격적인 반격을 주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그의 주력은 화북의 북경일대를 장제스와 다른군벌에게서 방어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전력이 분산되 있었다. 결국 뒤늦게 장쉐량은 일본의 침략의도를 알았지만 때는 늦으리였다. 만주를 손쉽게 장악한 일본은 푸이를 압세워 만주국을 세운다.

 일본의 야욕은 끝이 없어 만주국의 점령이후에도 화북지방을 계속도발하고 마침내는 상하이 사변까지 일으킨다. 당시 상하이에는 주요 열강의 조계가 있어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무모한 도발이었지만 일본은 이를 강행한다. 책에서도 주로 지적하지만 당시 일본은 군부를 행정부가 통제하지 못하는 형태로 일본의 2차대전과 중일전쟁의 많은 도발에는 현장지휘관들의 무모한 야심과 독선에 의한 것이 많았다. 상하이 사변에서 국민당정부는 좀 소극적이었는데 공산당과의 전쟁, 그리고 일본과의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수도 난징에 대한 방어 등 복잡한 상황이었다. 결국 장제스는 중앙군을 투입하지만 상황은 어려웠고, 일본과 타협한다. 장제스는 많은 비난을 받지만 당분간 일본과의 전쟁을 억제하면서 안을 정비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상하이 사변 이후 장제스는 늘 말썽이던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하고, 지방군벌들을 복속시키는등 자신의 정권을 강화해나간다.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에서 알수 있듯 당시 중국군의 전력은 형편없었으므로 독일과의 교류를 통해 군사협력을 없고 군대를 강화시켜나갔다. 독일은 당시 주요 자원들에 대한 해외의존이 필요했는데 영국 프랑스에 견제당하는 상황에서 중국은 주요 자원수입원이 되어주었다.

 시간이 흘러 1937년 일본은 본격적인 중일전쟁을 시작한다. 만류하는 일본내 정치인도 있었으나 일본 군벌에 의해 암살되거나 실각하기 일쑤였다. 천황과 일본의 정치권은 무모한 일본 관동군의 행태에 패망까지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다. 관동군은 만주국에 주둔하는 군대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의 동쪽에 있다하여 관동군이라고 한다.

 일본군은 장쉐량이 지키던 북경과 텐진지역을 손쉽게 점령해나갔으며 화북 지역 전역을 점령해나간다. 중국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며 아직도 각 성의 지방군벌들은 자신의 전력을 소모시키지 않기 위해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장제스의 중앙군과 지방군은 원래 세력이 달라 군복이 다른 경우도 많았고, 수장이 다르다보니 지휘계통의 문제 언어의 문제, 무장정도의 차이등 병력만 많았지 전투에 지장이 되는 문제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명령에 의해 자리를 지켜야 할 부대가 마음대로 퇴각하여 측면이나 후방을 돌파당하기 일쑤였고, 지방군벌들은 싸우려는 의지도 부족했다.

 상당히 빠른 시간에 중국은 화북일대를 상실했으며 수도 난징이 점령당해 그 악명높은 난징대학살이 일어난다. 난징을 상실한 국민정부는 수도를 우한에서 충칭을 옮겼지만 일본군은 우한일대에도 대대적인 공세를 취해 점령한다. 거기에 중국의 동남해안 일대 도시를 점령하여 철광석은 풍부하지만 그외에 많은 물자를 헤외에 의존하던 국민당 정부의 숨통을 조여나간다. 하지만 매번 중국군은 영토를 상실해나가면서도 끈질기게 저항하여 일본군에도 적잖은 피해를 주고 있었으며 현장지휘관들의 독선과 무능, 중국군을 얕보는 경향, 병참등의 문제로 일본군의 피로도 만만치 않게 누적되어 간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린다. 자원을 외존하던 미국과의 교류가 끊어졌고 국 영토가 드넓었지만 정작 일본이 필요로 하는 석유와 고무등의 자원은 동남아에 풍부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우선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 섬을 점령하는데 이로 인해 열강들을 일본에 긴장하고 견제하기 시작한다. 늘 그렇듯 기습으로 일본은 아시아 주요국과 섬들을 손쉽게 점령해나간다. 주요 아시아 식민지에 주둔한 유럽군대들은 당시 본국이 독일과의 전쟁으로 힘을 쓸수 없었고, 군대의 상당수도 식민지인으로 구성되어 이렇다할 전투력이 없는 상태였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령사이에 끼어 완충지로 독립을 유지하던 태국은 일본군이 다가오자 그들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여 간신히 독립을 유지한다. 일본군의 통행과 철도 및 공항건설 시설이용등 적잖은 주권침해였다. 이로 인해 태국에서 버마를 연결하는 죽음의 철도가 일본에 의해 완공되었으며 우기에 시작한 공사로 공사기간중 현지인 7천명이 사망한다.

 해안과 동남아를 통한 자원루트가 막히기 시작하자 중국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주요 열강의 지원을 기대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장제스는 오랜 고립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지만 연합군에게 중국은 상당히 부차적인 장소에 불과했으며 미국역시 침공은 일본에게서 받고 공세는 독일에 취하는 자세를 보인다. 더군다나 섬멸직전의 상황에서 일본과의 전쟁으로 국공합작을 한 공산군은 일본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일본군의 세력이 닿지 않는 화북일대에서 자신들의 근거지를 널혀나가 장제스를 더욱 골치아프게 했다.

 당시 미국이 파견한 미군 지휘관은 스틸월이었는데 버마에 파견된 그는 일본군에 버마를 잃고 이를 탈환하기 위해 노력중이었다. 스틸웰은 미국의 협력을 대가로 장제스에 정예군을 요청하고 전력이 모자란 장제스는 이에 응한다. 하지만 스틸웰의 무능으로 버마는 일본에 점령되고 장제스는 정예병의 상당수를 잃는다. 일본군은 화남에서도 대공세를 이어 3차례나 방어하였던 창사와 형양비행장, 동남아 주용 교역의 창구인 난닝을 차례로 잃어가며 영토가 반으로 쪼개진다.

 이처럼 1944년까지만 해도 중국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지만 연합국의 전세는 극도로 전환되어 43년에는 이탈리아가 항복하여 독일에 선전포고 하고 독일 역시 항복한다. 독일의 항복에는 미국의 가세도 있지만 소련과의 동부전선이 무너진게 큰 역할을 하였는데 소련은 2차 대전중 일본 관동군의 시베리아 침입을 우려해 독일과의 서부전선에 계속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무려 70만의 극동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과의 전쟁교착으로 일본 관동권의 전력이 투입되자 스탈린은 일본의 침공이 없을 것으로 확신하고 과감하게 극동권을 서부전전에 투입하여 전황을 뒤집을수 있었다.

 결국 독일이 항복하고 일본은 손쉽게 점령한 섬과 아시아 여러나라들을 빠르게 잃어갔다. 특히 섬하나하나를 지키고자 병력을 분산하였는데 이로인해 병참의 문제와 함께 각 군대가 손쉽게 각개격파당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결국 핵 두발로 일본은 항복한다.

 문제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데 아직도 중국내에는 무려 300만에 달하는 일본군과 일본인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본군 세력을 무장해제하고 사용하는데 국민당과 공산군은 치열하게 경쟁한다. 공산군은 화북 세력을 기반으로 빠르게 만주와 화북지역을 장악하였는데 이는 소련군이 전쟁 말미에 빠르게 만주지역을 장악했기데 가능했다. 이로 인해 공산군은 장제스와 일국을 양자강을 경계로 이분하자는 주장까지 할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전쟁이 끝나자마자 국공내전이 발생하였으며 일본과의 오랜 침략으로 전력에 큰 손실을 입은 국민당 군은 각지에서 대패한다. 거기에 장제스는 일본과의 항전과정에서 전략적 외교를 통해 시간을 벌고자 일본과의 여러 협상에서 저자세를 보이곤 했는데 그것이 발목이 되어 민심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으며 일본군의 무장해제 과정과 각 지역의 탈환과정에서 각 지휘관들의 부패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중국은 공산화 되었고 장제스 정권은 타이완으로 탈출한다. 중일전쟁중 국민당 정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지원을 인색했던 미국은 아시아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국공내전은 여러 부작용을 갖고 왔다. 우선 독일처럼 연합군은 일본은 분할점령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동과 북쪽 지역을 소련과 중국이 점령하고 나머지 지역을 영국과 일본이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맥아더의 강력한 반대와 국공내전으로 무산되고 분할점령은 엉뚱하게도 한반도가 당하게 된다. 거기에 일본과의 배상협상에서 일본측은 승전국인 중국에 막대한 피해 배상을 각오하였지만 타이완으로 쫓겨난 장제스는 국제사회에서 빠르게 인정받기 위해 손쉽게 포기하였으며 공산당 역시 고립을 우려해 이를 빠르게 포기하였다. 친일 부역자에 대한 처리도 국공내전으로 어려웠다. 당장의 전쟁으로 이들을 심판하기 어려웠고, 전쟁에 활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경우처럼 이들의 사회중심지위에 올라 호령하는 일은 없었다.

 중국내의 일본인들의 운명도 기구했다. 소련에 점령당한 만주지역의 100만가량의 일본군과 일본인들은 약탈과 강간 살해의 대상이었으며 시베리아로 끌려가 상당기간 노역에 동원되었다. 중국내에 300만 정도의 일본인은 100만가량이 본국으로 송환되었지만 나머지는 국공전쟁에 동원되기 도 하고 어려 가지 이유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전쟁의 대가를 가혹하게 치른 셈이었다.

 이처럼 중일전쟁은 2차세계대전에 미친 영향력, 그리고 공산당의 세력확산의 기회로 향후 중국이 공산화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의미있는 전쟁이었다. 한반도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음에도 이런 중요한 전쟁이 잘 다루어지지 않고 잊혀져 있는 것이 무척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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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6-09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읽고 있는데 책 재밌네요.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