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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꾼 물고기의 일대기
마크 쿨란스키 지음, 박중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알면서 일단 놀란 세가지. 일단 우리가 뻘건 탕에 끓여먹던 대구가 서양에도 있었고 오랜기간 사랑 받았다는 점. 다자란 대서양 대구의 크기가 무려 1미터를 상회한다는 점.(어릴적 참치의 크기를 알고 받았던 충격과 비슷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았고 사랑받았던 생선인 명태가 대구의 한종류란 점이다.(명태가 왕눈폴락대구란다.)
책 대구는 이런 대구가 유럽과 북미 나라들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서술한 책이다. 일단 대구가 유럽의 주식이 될 수 있었던건 찬물에서 사는 생선이라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위도가 높은 북육럽지역에 개체수가 무척이나 많았다. 또한 바닥을 타고 움직이는 탓에 근육이 적어 낚싯줄이나 그물에 일단 걸리기만 하면 생각보다 정말 쉽게 잡을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과거에는 냉장고가 없던 탓에 중세유럽인들은 이 대구를 잡은 후 말려서, 혹은 소금에 절여서 말리는 형태로 유통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대구 교역이 가능했으며, 과거 기독교 중세유럽에는 사순절 기간 고기가 금지되었지만 희한하게도 대구의 섭취는 허락되어 그 수요가 엄청났다. 고기 금지기간에 일년의 삼분의 일에 가까웠다니 말 다한 셈이다.
이러한 대구의 주 어장은 북해바다와 북미의 그랜드 뱅크스 지역들이다. 저자는 이 대구를 찾아서 스페인과 프랑스 중간에 사는 바스크인들이 바이킹보다는 이후에 그리고 콜럼버스보다는 훨씬 빠르게 북미 래브란도 반도 지역을 다녀왔다고 한다. 바스크 인들은 당연히 원거리이니 그럴수 밖에 없었겠지만 래브란도에서 대구를 사냥한 후, 바로 가공처리후 판매에 들어갔다.
바스크인들 이후 이 북미지역에는 영국 신교도들이 자리한다. 이 지역은 위도가 높아 육지엔 딱히 농사도 잘 안되고 먹을게 없었지만 해산물은 넘쳐났다. 지금은 믿기 힘들지만 이들은 넘쳐나는 랍스터도 먹지 않았다.(하긴 과거 호주에서 랍스터는 형벌로 죄인들에게 억지로 먹였다고 들었다.) 이들이 유일하게 먹은게 대구였다. 그리고 먹은 대구의 부산물을 비료로 쓰게 되면서 이지역은 드디어 몇번의 실패끝에 인구를 감당할 만한 식량생산력을 갖게 된다.
그리곤 교역이 시작된다. 당연히 래브란도나 뉴잉글랜드의 적은 인구에 비해 대구생산량은 많았으므로 이들은 이것을 대구 소모량이 많은 지중해 지역이 판매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서히 이것은 세계사 교과서에 나오는 그 악명 높은 삼각무역으로도 이어지게 된다. 또한 카리브해 일대에 노예가 많아지자 이들을 부양할 식량이 필요해졌는데 당연히 땅 주인들은 설탕이나 사탕수수를 위한 땅은 있어도 노예들을 먹여살릴 식량을 재배할 땅의 확보에는 매우 인색했다. (마치 오늘날 제1세계 국가사람들을 위한 커피를 재배하느라 자기 먹을 식량을 재배하지 못해 굶어죽은 아프리카인의 사정과 비슷하다.) 이런 노예들을 부양한 것이 대구가공품이고 그중에서도 매우 하급품이었다.
뉴펀들랜드나 래브라도 인들은 까다로운 지중해 시장에는 고급 대구 가공품을 팔았고, 문제가 있는 하급제품은 카리브해에 파는 형국이었다. 이처럼 대구는 노예를 먹여살렸다.
그리고 대구는 삼각무역과 노예 부양에 이어 미국 독립전쟁에도 기여한다. 대구를 팔고 럼이나 설탕등을 수입하던 북미인들의 교역에 영국정부가 교역제한을 둔것. 이러한 갈등관계가 이어져 훗날 우리가 아는 유명한 사건인 보스턴 티사건으로 이어지게 되며 보스턴은 바로 대구교역으러 성장한 도시이기도 하다.
대구는 미국독립만으로는 모자랐는지 남북갈등도 일으킨다. 미국이 독립후 대구와 관련하여 유리한 교역조건을 만들기 위해 남부여러주들이 싫어할만한 미시시피 강의 통행권등의 권리를 유럽에 넘겨 남북갈등의 씨앗이 되고 만것이다.
다음으로 대구가 한 일은 해양영토권의 확립이었다. 불과 100여년전만 해도 해양에 대한 영유권개념은 전무했다. 그러던 것을 아이슬란드가 자국의 대구 어업권을 확보하기 위해 점차 넓히기 시작했으며 이는 오늘날 알게도니 것처럼 거의 200해리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아이슬란드와 영국이 대구어장을 놓고 어선의 뒷그물을 끊고 배들끼리 부딪히는 등의 3차례 대구대전을 치룬 것은 재밌는 역사의 한 부분이다.
이렇게 세계사를 움직이고 많은 이들을 먹여살린 대구는 저인망 어선의 남획으로 인해 사실상 개체수가 급감한다. 오늘날 어장이 온전한 지역은 상당히 드물며 캐나다 그랜드뱅크스 지역은 아직도 조업이 어렵다고 한다. 대구가 산란하는 시기가 무려 15년정도 걸린다고 하니 어장의 회복은 요원한 일이다.
20세기 들어 대구 어획량이 극적으로 회복된 것이 조업이 어려웠던 세계 1-2차대전 시기라니 우습고, 이 시기를 틈타 전쟁에서 자유로웠던 아이슬란드가 홀로 대구 조업에 나서 막대한 수익을 얻고, 이로 인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출 만한 자본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또한 재밌는 부분이다. 우리에게 명태가 있었다면 서양인들에게는 대구가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