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 인 러시아 - 경제연구소의 인문학자가 들려주는 러시아의 역사.문화.경제 이야기 줌 인 러시아 1
이대식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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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줌인 러시아는 16년에 나온 책으로 그 때 구매하고 오래도록 묵혀두었다. 아마 이번에 본 러시아 지정학 아틀라스로 러시아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더 들지 않았다면 더 묵혔을지도 모르겠다. 책은 러시아에 대한 이렇다할 지식이 없던 나에게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러시아에 대해 사회, 문화, 역사, 예술 등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어 백과사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찾아보니 후속작이 나왔던데 이 정도 쓰고도 더 쓸게 남았던 셈인지라 저자의 내공이 대단하단 생각이다.

 러시아는 글자도 어렵고 이름도 어렵다. 글자가 여타 유럽 국가와 매우 다른 것은 그리스 정교회를 수입하면서 글자도 같이 가져와 버렸기 때문이다. 로마가 아닌 그리스 알파벳에 기반하다보니 영어에 친숙한 우리가 보기엔 유독 이질적이다. 러시아인의 이름은 무척 길고도 어렵다. 이는 부칭의 흔적 때문인데 부칭은 성이 정착하기 이전 누구의 아들 누구라는 식으로 부르던 것이었다. 헌데 러시아는 성씨가 정착화했어도 여전히 부칭도 같이 사용한다. 아들은 경우 아버지 이름에 오비치를 딸인 경우 아버지 이름에 오브나를 붙인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대문호 토스토예프스키의 정식 이름은 표도로 미하일로비치 토스토예프스키다. 여기서 그의 이름은 표도르이고 미하일로는 그의 아버지도 그리고 성인 토스토예프스키는 가족들이 대대로 살던 영지의 이름이다. 즉, 토스토예프스키의 이름뜻은 토스토예프 지방이 본관인 미하일로의 아들 표도르인 셈이다.

 러시아에서는 보통 성은 빼고 이름과 부칭만을 부르는데 푸틴을 예로들면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르비치만을 부르는게 정석이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은 대개 정교회 성인의 이름을 따른다. 그들은 영아세례에서 성자의 이름으로 세례명을 받고 이것을 평생 사용하는데 그래서 그들은 생일과 더불어 명명일도 같이 챙긴다. 

 러시아는 매우 종교적 국가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종교를 탄압하여 정교회 교회 5만 5천개 중 5만 4147개가 상실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70%정도의 국민이 정교회 신자다. 988년러시아 지도자 블라디미르 대공은 기존의 다신교보다는 제국의 통치에 유일신 종교가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서유럽 카톨릭과 유대교, 정교회, 이슬람교를 판단하기 위해 각각 사신을 보낸다. 서유럽은 러시아가 나무 조각 따위를 숭배한다고 비웃어 바로 패싱했고, 유대교는 그 민족의 처지가 보잘것 없음에 실망한다. 이슬람은 일부 다처제가 있어 제법 구미에 맞았는데 돼지고기와 술의 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성의 할례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남은 것은 정교회 뿐으로 이것을 받아들인다. 여기에 정교회의 비잔틴은 인근 제국중 가장 강력한 나라로 러시아 입장에선 무척 중요한 국가였다.

 러시아 정교는 서유럽 카톨릭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정교는 신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인간 이성으로 직접 접근할 수 없기에 신이 아닌 것을 먼저 드러내어 신의 본질에 접근하자는 부정신학을 갖는다. 서유럽은 반대로 긍정신학이다. 그래서 러시아 성가는 무반주 아카펠라인데 불완전한 인간의 노래에 불완전한 인간의 악기 소리마저 더하는게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요소에 대한 부정은 삼위일체론에도 나타난다. 서유럽 카톨릭은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성령이 나온다고 보는 반면 정교회는 성자는 인간적 요소가 있어 불완전하기에 성령은 나오지 못하고 성부와 성령의 매개 역할만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로마카톨릭은 교황의 무오류설을 주장하며 그의 권위를 절대화하나 정교회는 총대주교가 상당한 영향력은 있으나 역시 인간으로 오류가 가능하다고 파악하여 절대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건물은 매우 아름답다. 바로 모스크 때문인데 이는 러시아의 독특한 건축양식과 문화의 결합이다. 고대 그리스는 넓은 지붕을 지탱하기 위해 많은 기둥이 있는 건물을 지었고 이로 인해 파르테논신전의 경우처럼 실내 공간이 비좁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의 판테온이 등장한다. 아래서부터 원형으로 비스듬히 벽돌을 쌓아올려 돔형건물을 만들어 넓은 실내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하지만 내부가 원형이기에 다신교의 만신전엔 적합하나 한 대상에 집중하는 유일신교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유럽은 장방형의 바실리카형 건물로 변모한다. 하지만 동로마는 돔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장방형의 건물 위해 돔을 얻는 펜텀티브 돔을 짓는다. 러시아는 여기서 더 나아가 건물 하단 본체에서 빠져나온 기동 위에 반구 대신 양파형 돔을 얻었다. 이는 러시아에서 숭상하는 촛불을 상징한다. 

 러시아는 원형구조를 중시한다. 추운 지역이다 보니 오래전부터 태양신을 섬겼는데 이집트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태양신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인데 반해 러시아에서 태양신은 몸을 녹이기 위해 바라보고 향해야 하는 존재다. 러시아는 그래서 태양이라는 중심과 그곳을 바라보는 주변이라는 일종의 원형구조 세계관이 전통적이다. 회화, 건축, 마을의 구조에 이 원형구조가 나타난다. 특이한 점은 이 원형이 구심력이라는 점이다. 태양이 나로 향해 오기보다는 내가 태양을 향해 가는 구조이며 그래서 나보다는 태양을 중시한다. 그래서 독특한 명명법이 등장하는데 예로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 역과 대로가 없으며 오히려 레닌그라드 역과 대로가 있다. 이는 모스크바에서 레닌그라드를 향하기 때문으로 오히려 향하는 쪽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지도자는 국민입장에서 향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쉽게 절대화되고 민주화가 어려운 부분은 이런 점에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한 대표적인 바보짓 중 하나로 알래스카 미국 매각이 꼽힌다. 알래스카는 한반도의 8배 크기에 러시아 영토의 1/10이며 미국에서도 가장 넓은 주다. 여기에 그동안 채굴한 금이 1000톤이상이고 세계의 10%정도의 원유가 매장되어 있다. 여기에 매년 광업으로 125억 달라, 농어업 2억 8900만 달러, 제조업 1200만달러, 관광 20억달러를 벌어들이고 미국의 대 러시아 전진기지 역할도 하는 곳이 알래스카다. 이런 금싸라기 땅을 러시아는 고작 금화 720만 달러에 판매한다. 이는 당시 러시아 재정의 2.9%수준에 불과하다.  

 당시 러시아는 머나먼 알래스카를 관리하기 위해 준국영기업인 러시아 아메리카 기업을 설립한다. 알래스카 모피를 중국에 독점 판매하고 중국의 차를 독점 수입하는 수익구조를 편성했는데 미국에서 중국으로 물개가죽이 들어오과, 러시아가 크림전쟁에서 패하며 재정이 악화하자 알래스카의 경기도 크게 악화한다. 러시아는 대규모 전쟁배상금과 인프라 구축 비용이 필요했고 알래스카는 적자기업에 관리가 힘들었다. 게다가 당시 영국은 캐나다를 바탕으로 알래스카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러시아는 수익과 국방을 위해 알래스카를 미국에 판매한다. 더불어 미국과의 관계 개선도 도모했음을 물론이다. 결과적으로 무척 손해가 난 거래였으나 당대의 상황으로 보면 일면 타당한 면도 있는 거래였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오랜 기간 하나의 공동체였다. 키이우는 러시아 최초 왕조인 류리크 왕조의 수도였다. 하지만 12세기 들어 류리크 가문의 갈등이 심화하고 소공국들로 분열한다. 13세기 몽골의 침입 후 서로가 서로를 항몽반란으로 고발하여 골육상쟁을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 모스크바 공국이 부상하고 중심지가 이동한다. 왕위도 기존 형제 계승에서 장자계승으로 바뀌며 14세기 부터 키이우 지역은 변방으로 취급된다. 우크라이나란 말 자체가 러시아어로 변방에 위치했다는 뜻이다. 

 14세기 후반부터 리투아니아, 폴란드의 공세에 시달리던 우크라이나는 1654년 형제국 러시아에 도움을 청한다. 러시아는 적극적이지 않으 동부인 드네프르 지역만 탈환하느데 이 것이 오랜 우크라이나 동서 분열의 시작이다. 우크라이나는 이윽고 서폴란드령과 동러시아령으로 분열하고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잠시 통합되었다가 1922년 다시 분열한다. 2차 대전 중 여러 민족에 시달리던 우크라이나 인들은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오인하여 환영했다고 피의 학살을 당하고 이후 스탈린에 의해 변절에 대한 대가로 역시 학살과 차별을 겪는다. 구소련은 서부는 농업지대로 동부는 공업지대로 육성하였는데 그 결과 지금까지 동서간의 경제력 차이가 크다. 이처럼 우크라이나 동부는 오랜 기간 러시아의 영향을 받고 실제 러시아인도 다수 거주하다보니 우크라니아 서부와 다른 정체성을 갖고 분열의 조짐을 계속 보인다. 2014년 크름반도 합병과 2022년 전쟁에서 동부가 쉽게 넘어간 이유다. 

 러시아의 발레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세계 5대 발레단 중 2개가 러시아며 나머지들도 러시아인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발레는 1400년대 이탈리아 귀족들이 영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 앞에서 춤을 추며 시작되었다. 1549년 피렌테의 공주가 프랑스로 시집가서 전파되었으며 이후 프랑스가 발레의 중심지가 된다. 표트르 대제의 아버지 알렉세이는 발레를 보고 매료된다. 러시아는 이후 황실이 직접 발레를 육성한다. 무도회를 개최하고 귀족과 여식의 동참의 의무화했으며 심지어 육상의 정규과목에 발레를 편성할 정도였다. 

 1783년 러시아 왕실 발레 학교가 개교한다. 궁정하인의 자제 12명을 남여 동수로 선발하여 육성했고 이처럼 발레리노를 유지한 것이 러시아 발레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다. 러시아는 최고 수준만을 고집하여 유럽 각국의 최고 전문가를 초빙했고 높은 개런티를 주어 인재를 빨아들였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드디어 최고 수준의 무용가, 안무가, 음악가, 화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오랜 노력의 결실이었다. 반면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발레는 오페라의 인기로 사장위기였다. 1909년 러시아 발레단이 파리에서 공연하자 유럽 관객들은 잊혀진 발레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러시아는 발레를 크게 발전시켰는데 우선 군무다. 발레에서 원래 군무는 부차적인 것이었지만 러시아는 군무를 중요한 요소로 승격시킨다. 튜닉이나 타이즈등 몸매를 아름답게 드러내면서도 춤추기에 편한 복장도 군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러시아는 발레에 막과 장을 도입하여 이야기의 전개를 알기쉽게 하였는데 이는 차이코프스키가 교향곡의 4막 구조를 과감히 발레에 도입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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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3-05-22 1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러시아 책, 특히 미술사 책 단지 몇 권 읽고 러시아가 넘 좋아져 이번 전쟁 나기 바로 전에 러시아 다녀왔습니다. ^^
참, 동양도 서양도 아니며, 자본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닌, 상당히 낯설고 이상하고 재미있는 나라였습니다.
쓰신 글 읽고 그때 방문이 새롭게 기억나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닷슈 2023-05-22 19:52   좋아요 1 | URL
다녀오셨다니 부럽네요. 전쟁과 세계의 새로운 양극화로 러시아가 다시금 아주 머나먼 나라가 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