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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언어
장한업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18년 10월
평점 :
해외에 나가있는 한국인의 수는 얼마나 될까? 무려 750만이다. 이는 남북한의 인구를 합친 것의 무려 10%에 달한다. 참고로 전세계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중국인도 전인구의 단 4%만이, 그리고 일본은 전인구의 1.5%정도만이 해외에 살고 있다.
이처럼 생각외로 한국인이 이렇게 전세계를 떠돌게 된 것은 구한말의 아픈역사와 관련이 깊다. 19세기 말 북부 지역에 수해가 심해지며 중국 동북부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일제강점후에는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농민들이 생활기반을 잃게 되자 그 쪽으로의 이주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고 이들의 수는 1945년말 무려 145만에 달했다.
일본으로의 이주도 많았다. 1915년 불과 3917명이던 것이 1920년에는 3만으로 증가했다. 이는 조선의 경제는 매우 취약했고, 일본은 1차대전후 활황을 맞으면서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던 것과 관련한다. 중일전쟁이후에는 강제로 이주가 이루어지며 해방당시에는 무려 236만이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편 19세기 말부터 하와이와 멕시코, 쿠바등의 농장으로의 이주가 있었고,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1960년대 서독으로의 간호사 광부파견, 한국전쟁이후 해외로의 꾸준한 이민도 있었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한국은 사실상 디아스포라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 문제는 이렇게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나라가 해외에서 들어온 이주민들에 대해 매우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한국에서 많이 쓰는 우리와 국민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과거 울타리에서 유래된 말로 내집단을 강하게 지칭하는 언어이며 국민이라는 용어는 한국 혹은 일본정도에서만 쓰는 매우 국가주의적 단어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로 여기는 것이 상식이라 보면 한국의 이런 민족적이고 국가주의적 단어사용은 우리의 매우 편협한 시각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애국가에는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라는 가사가 나오는 전세계 국가중 이렇게 대한민족과 대한민국인을 강조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이런 가사를 부르며 공감할만한 외국인이 얼마나 될까라고 책은 자문한다.
한국인은 자신들을 제외한 외국인들을 '놈'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물론 선진국일수록 절 덜하기 하지만 양놈도 자주 쓰이는 용어임을 감안하면 큰 차이는 없는 듯하다. 특히 주로 놈으로 지칭되는 것은 왜놈과 떼놈이다. 왜는 일본을 지칭하는 말로, 왜소하다는 뜻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 한자는 왜나라 왜자다. 떼놈은 중국인들이 한국전쟁 중 떼거지로 몰려와서라던가, 혹은 중국인이 잘 씻지 않아서 그 더러움을 칭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전혀 아니다. 떼놈의 어원은 되놈으로 되는 한국어에서 북쪽을 뜻하며 과거 여진족을 칭하여 되놈이라 불렀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하지만 명이 망하고 여진족의 청이 들어서며 되놈이라는 말은 중국인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변형하였고 오늘날의 떼놈이 된 것이다.
한국인은 화교도 매우 탄압하였는데 중국에서 들어온 화상이 근원인 그들은 임오군란때 군인들과 함께 들어왔다. 화상은 그 수가 1884년 588명이던 것이 1923년엔 3만3천에 달할정도로 활발했다. 하지만 일제가 언론조작한 1931년의 완바오산 한중농민 갈등보도로 국내에서 중국인에 대한 반중감정이 커졌고 이로인해 국내 화상 증가가 줄어들게 된다. 1945년 6만2천에 달하던 화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근거지인 서울과 인천이 대대적인 파괴와 이승만정권이 수입허가제를 도입해 한국무역상에게만 유리한 법령을 마련함으로써 대대적으로 쇠퇴한다. 1961년엔 외국인토지소유금지령까지 도입되어 화교는 농업, 제조업등에 종사가 어려워진다. 화교가 중국집만을 거의 운영하고 한번 생긴 중국집이 좀처럼 이사가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한국에는 많은 수의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와있다. 하지만 이들은 사실상 직업선택의 자유가 없다. 1980년대 후반 노동운동의 성과로 국내노동자의 임금이 증가하자 정부는 1988년 올림픽과 발맞추어 외국인의 입국비자조건을 크게 완화함으로써 외국인 노동자가 국내에 들어오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로도 모자라자 1991년 산업연수생 제도를 도입한다. 이 제도가 많은 문제를 일으키자 2004년에 들어서 고용허가제를 도입한다. 하지만 이 고용허가제도 3년 체류 후, 일년 간 출국 후 다시 입국을 허용하는 제도이며, 3년 체류기간중 고용자의 허가를 얻어야만 최대 3번 사업장을 옮길수 있다는 면에서 사실상 직업선택의 자유를 크게 침해하는 제도다.
한국은 문화를 수입하는데서도 매우 차별적이다. 보통 문화나 가치의 중심이되는 사물이나 개념에 먼저 명칭이 붙고 대비되거나 새로운 것은 뭔가를 앞에 붙여 명명되기 마련이다. 영어는 북쪽에서 생긴 언어이니 북극(arctic)이 먼저가 남극은 그 반대의 의미로(antarctic)이 된게 그 예다. 하지만 한국은 신기하게도 자신의 문화에 한복, 한식, 한의사등의 '한' 명칭을 붙인다. 본디라면 옷, 음식, 의사로 끝나야하는 명칭이지만 과거 개화기에 서구의 것에 양자를 붙이며 그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이렇게 되었다. 매우 이상한 형태다. 한국인은 특이하게도 한복을 전혀 입지않으며 결혼식에서도 여성만이 한복을 입게 한다. 여기서도 왜곡이 느껴진다. 또한 한국인은 이탈리아 국수인 스파게나 파스타, 피자등에는 그들의 용어를 그대로 수입해 쓴다. 국내에 대체할만한 충분한 용어가 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베트남 쌀국수는 퍼라는 고유용어가 있음에도 쌀국수라는 명칭을 굳이 사용한다. 베트남이 유럽국가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문화의 수용에는 6단계가 있다고 한다.
1단계는 차이를 거부하고 자기문화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단계.
2단계는 문화적 차이를 방어하며 우리문화만이 최고이고 다른 문화는 무시하는 단계
3단계는 최소화로 문화적 차이를 사소한 것으로 여기고 인류의 보편적인 부분만을 강조해 차이를 신경쓰지 않는 단계다.
여기까지가 민족중심적인 수준의 단계로 한국은 2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4단계는 수용의 단계로 자신의 문화를 여러문화중 하나로 생각하고 다른 문화에 큰 관심을 갖는 단계이다.
5단계는 적응의 단계로, 다른문화에 감정이입하여 다른문화의 관점을 수용하고 그 문화권에서 그 문화에 맞게 올바르게 행동하는 단계다.
6단계는 통합으로 주어진 상황에 따라 여러 문화적 관점에서 판단하고 늘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가질수 있는 단계다.
한국의 다문화교육은 사실상 2단계에 해당하는 교육이다. 국내에 들어온 여러나라의 문화를 대등하게 여기기보다는 한국문화와 언어로의 적응을 돕는, 즉, 통합시키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다문화상황에서는 자국문화도 다문화의 하나로 여겨져야하지만 한국의 다문화교육에서는 명백히 한국의 문화와 언어가 지배적인 것으로 습득하고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이주민의 그것과 평등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미 유럽국가들은 상호문화교육이라는 명칭으로 한국다문화교육 스타일의 언어교수와 적응위주의 교육을 버리고 상호문화적 태도로 대등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유럽에는 상호문화도시 프로그램이란게 있다. 상호문화도시는 상이한 국적, 출신, 언어, 종교,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 이루어지며, 이 도시의 정치지도자와 시민들은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보고 그것을 자원으로 여겨야한다. 상호문화도시로 선정되려면 엄격한 지표를 통과해야하는데 도시에 다른 문화, 민족, 소수자 배경의 학부모를 학교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지, 이들과의 상호작용을 장려하는지, 이들에게 행정서비스면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헌장이나 문서가 있는지, 선출된 정치인의 민족적 배경이 도시의 인구구성을 반영하는지 등이다. 대부분 유럽국가의 도시가 선정되나 일본도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는 이에 해당할만한 도시가 있는지 의문이다. 국제도시인 서울이나 외국인이 많이 사는 안산이 해당될만하지만 그저 외국인 수만 많은게 아닐까 싶다. 다문화의 정의와 한국인의 인식수준까지 모두 되짚어봐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