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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의 협상가 - 정세현 회고록, 북한과 마주한 40년
정세현 지음, 박인규 대담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한국 전쟁 이후 70년간 남과 북은 조금은 가까워졌다, 조금은 멀어지며 전체적으로 약간은 서로에게 다가가는 평행선을 달렸다. 그 과정엔 껴 있는 세월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 멀어지는 변수로는 아웅산 폭탄테러, 김신조 사건, 강릉무장공비침투, 연평도 포격, 서해 1.2차해전 등이 있었고, 가까워지는 변수는 72년7.4 남북공동선언, 91기본회담, 6.15공동선언, 9.19선언, 그리고 수차례의 문화적, 인도적 교류와 스포츠행사등 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벤트의 저변에 깔린 역사적 흐름과 여러 세력들의 이해관계에 대해서 우린 잘 알기 어렵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북한과 통일문제가 저의와는 상관없이 매우 언급하기 어렵고 쉽게 호도되며, 오염되기 때문이다. 한 때 통일할 생각도 없으면서 무력통일이나 흡수통일만을 제1논지로 상정해 대북문제라는 평범한 단어도 쓰기 힘들었고, 지금도 NLL이나 평화관련 이야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무는 세력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런 상황에서 대북문제와 북남관계에 대해 어느정도 알수 있게 해주는게 이 책인 듯하다.
책의 저자인 정세현은 그야말로 남북관계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줄곧 북한 관련 연구를 했고, 이를 토대로 박정희정권부터 통일관련 기관에서 근무했다. 김영삼정권때는 통일비서관이 되었고, 김대중대통령때 통일부 차관과, 장관을 그리고 노무현때에 다시금 장관을 역임했다. 그야말로 현대 남북사를 관통한 경력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그런 그가 자신의 의견과 경험을 수차례의 긴 인터뷰로 담아낸 것이다. 가독성이 높다. 들어가보자.
박정희 정권 초창기인 60년대만 해도 북한은 우리보다 국력이 높았다. 일본에 이은 제2의 아시아 공업국이라 불렸을 정도였으며 스포츠분야에서도 남한보다 월등해 남이 북을 대하기 무척 힘들었던 시기다. 때문에 남은 북에 대해 무척 수세적이었고, 오히려 지금과는 정반대로 북한쪽이 통일론을 먼저 들이댔던 시기다. 4.19로 남한이 어수선한 시기에 나온 것이 김일성의 남북연방제다. 이런 논리에 대응하고자 1969년에 통일원이 생겨난다. 하지만 이름과는 달리 평화통일에 대한 논리보다는 북한에 대한 남한 내부의 논리를 일관적으로 다듬는 곳이었다. 이시기 남북간의 교류는 생각보다 많았는데 남북간이 관계진전보다는 서로가 전쟁의지가 있는지 탐색하고 서로의 도시를 살피며 형편을 보는 형국이었다. 때문에 서로가 방문할 때면 서울이나 평양시내에 밤에 불을 못끄게 한다던지, 판자촌이나 낙후지역을 피해다니는 촌극을 벌이기도했다.
남한에서 처음 통일론이 등장한 것은 북보다 한참 뒤진 1982년으로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이었다. 70년대 중반부터 남한이 북한의 경제력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80년대에 이르면 북한은 제로성장에 머무르고 남한은 고도성장에 이르며 체제간의 경쟁력이 확실히 뒤집힌 시기다. 83년은 북한의 아웅산테러사건이 있었다. 주요 고위인사들이 죽고, 대통령까지 노린 큰 사건으로 한국에서는 원산 폭격까지 의견이 나왔지만 당시 미소간의 갈등이 무척이나 첨예해 대결구도를 바라지 않던 미국의 의향이 크게 작용하여 유야무야되었다. 그리고 86아시안 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문제를 만들기 어려웠던 남한의 사정도 작용했다. 북한은 84년 남한에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자 어려운 국내사정에도 아웅산 사건의 면죄부에 대한 부담과 특유의 체면으로 지원을 제안한다. 남은 위장평화공세로 여겨 처음엔 이를 거절했지만 오히려 혼내주자는 입장으로 이걸 받는다. 실제 북은 어려운 사정에도 이를 보낼 물자를 마련하느라 중국에도 손을 빌린다. 하여튼 이 분위기로 이산가정 상봉과 예술단 교환방문도 이루어진다. 노태우정권에 들어서는 동구권의 붕괴로 적극적인 북방정책이 이루어진다. 때문에 북한과도 공존하자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나올수 있었고, 이는 북의 체제를 사실상 보장하고, 분야별 교류협력과, 불가침을 전제로 하는 1991기본합의서로 이어진다.
김영삼 정권에 들어서 북은 동구권의 붕괴로 고립된다. 지원이 끊어지고 오랜 제로성장과 수해, 가뭄으로 소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거기에 비해 남한은 고도 경제성장이 계속되어 일인당 소득이 만달러에 이르렀으며 중국, 러시아와도 수교한 상태였다. 집권 초기 김영삼은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라는 말로 북을 기대에 차게 했다. 하지만 북한은 곧 NPT에서 탈퇴했고 김영삼은 바로 적대적 대북관계로 돌아선다. 사실 김영삼은 기본적으로 적대적 대북관을 가진 사람으로 그의 고향인 거제가 당시 반공포로들이 많았다는 것과 관련한다는 설이 있다. 이 시기부터 북한붕괴론이 시작되는데 당시 고난의 행군으로 탈북민이 많이 늘어나고, 황장엽의 망명이 있었으며 동구권의 여러나라가 무너진 것이 그 기반이 되었다. 북한의 NPT탈퇴는 제네바 합의로 봉합된다. 영변에 원자로를 지어주는 사업이었는데 미국과 북한이 협상했음에도 우습게도 한국이 비용의 무려 70%를 대는 구조였다. 나머지 10%는 유럽연합, 20%는 일본이었다. 당사자인 미국이 하나도 안내는 셈이었는데 반발하는 한국정부를 향해 어차피 북이 가까운 시일 내에 붕괴하면 그쪽 원자로 하나 더 늘어난게 아닌가라고 반문했다고 하니. 장사속이 대단하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며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북정책이란게 시작된다.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게 그것이다. 김대중 정권 이전의 대북정책은 사실 대결과 견제, 체면싸움의 일환에 그치지 않았다. 강력한 국방력으로 군사부분의 견제는 기본적으로 해나가면서 기업이 북에 진출하고, 관광 등으로 교류를 활성화시켜 군사부분의 긴장을 점차 완화시켜나가고, 남북간의 교류로 오랜 차이를 조금씩 덜어내며 동질화를 장기적으로 해나가는 것이 이 정책의 골자다. 현대의 정주영회장은 이 대북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스스로도 큰 이득이 될 사업으로 보았던 것 같다. 현대가 사업을 선점하기 위해 북에 돈을 쥐어주었는데 그러자니 이 금액이 외환반출 상한을 가볍게 넘었다. 당시 국정원이 이를 편의상 봐주었는데 이것이 노무현 정권때 문제가 되어 현대가의 관계자와 박지원의원을 비롯한 여러 실세가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 대북송금사건이다. 저자는 남북간의 관계를 보고 이를에 대한 특검을 거부하지 않은 노무현 정권의 판단에 다소 아쉬움을 표한다.
햇볕정책의 주요성과는 6.15공동선언이다. 이 선언으로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남북간의 도로와 철도연결사업이 가능했다. 특히 개성공단은 가장 큰 성과였다. 개성은 한국전쟁 이전 남한의 영토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다. 개성공단 이전 북한은 6사단, 64사던, 62포병여단 등 무려 2만5천의 병력을 개성에 주둔시켰다. 개성을 공단화하며 군을 뒤로 빼게되자 장성들이 입이 나왔는데 김정일은 너희가 개성사람들 먹여살릴거냐며 일축했다 한다. 개성공단이 생기고 군이 후방배치되며 평화는 진전되었다. 김대중 정권의 이런 정책 성공은 미국과의 협력으로 가능했는데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DJ에게 당신이 운전석에 앉으면 내가 돕겠다는 말로 협력했다 한다.
노무현 정권들어서도 햇볕정책은 계승된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자체가 대북관이 김대중 대통령만큼 투철하지 못했고, 자신의 정책이 아니다보니 우선순위가 되지 못한다. 대북송금사건등 어려가지가 엇박자가 났고, 미국의 정권역시 북에 적대적인 부시 정권으로 교체된다. 그러면서 2006년 북의 첫 핵실험이 시작된다. 당황한 미국의 부시정부는 방향을 틀어 정권 말기엔 북과 정상적인 회담을 이루려는 노력을 시작하고 그 결실이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이다.
하지만 남한의 정권이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며 모처럼 전환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미국의 오바마 정권 역시 부시 말기처럼 북한의 핵위협으로 북한과 대화국면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런 시기에 맞추어 한국정부가 의지를 보였다면 북과 많은 대화 및 평화를 위한 교류를 이루는게 가능한 시기였는데 당시 이명박 정부가 그럴 의지가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역시 북한 붕괴론과 적대적 대북관을 가진 사람으로 지금의 트럼프처럼 비핵화를 우선으로 하는 비핵화-북한개방-일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론을 들고나왔다. 북한이 우선적으로 비핵화를 하면 개방을 해주고 소득을 올려 3000정도까지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다. 지금도 효과가 없는 것이 당시라고 있었을리 만무했다. 남한 정부와 대담을 기대했던 북은 다시 돌아선다. 미국 역시 한국 정부가 반응이 없자 오바마 정권내내 전략적 인내라를 소극적 태도로 일관한다. 박근혜정부 역시 북한이 붕괴하리란 생각이 있었고, 이명박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는 개성공단을 닫아버리는 큰 실책을 저질렀고, 양 대통령이 저지른 금강산 관광 중단과 개성공단의 중단을 지금도 큰 악영향으로 현 정권의 대북정책을 발목잡고 있다. 이 시기 북한과의 관계는 무척 악화되었다. 천안함사건이 있었고, 연평도 포격사건이 있었으며 수차례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가 있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북의 김정은은 다시 평화의 대화를 시작했고, 북의 ICBM개발로 미국마저 북과의 대화를 거부하기 어려워졌다. 실제 평창올림픽과 두차례의 정상 간 만남으로 하노이 회담 이전까지는 무언가 이루어질거란 기대가 많았다. 하지만 미국엔 아직 대북 강경론자들이 많고, 비핵화를 우선시하는 고압적 자세로 북한과의 회담이 결렬되었다. 북한정권은 문재인 정권이 김대중 정부때처럼 미국을 잘 달래고 협상에 임하게 해줄 중재능력이 있다고 기대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한국의 중재를 미국이 전혀 듣질 않았으며 유엔제재가 아니어서 한국 스스로의 의지로도 할수 있는 금강산 관광재개나 개성공단재개또한 하지 않았다. 몇몇 인사들이 국내 정치임에도 미국의 의사를 물어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었고, 한미워킹그룹이란 법적인 근거도 없는게 생겨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발목만 잡고 있는 형국이다.
저자는 통일은 통일을 원하는 민족 내부의 구심력이 통일을 바라지 않는 주변 열강의 원심력을 이겨낼때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지금이 통일을 위한 또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적기라고 바라본다. 과거 남과 북의 냉전은 주변 열강에 이득이었다. 중국은 순망치한 관계로 미국과 바로 부딪히는 완충지대로 남과 적대적인 북을 원했고, 미국은 북한과 수교하여 평화지대를 만드느니 언제든 해결가능하지만 적당한 공포를 만들어 남과 일본을 무기시장으로 활용하는게 더 이득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강해지며 미국으로서도 북을 포용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동북아시아를 자신들이 영향력안에 두고 서태평양의 패자로 남으려면 북한과 수교에서 그쪽까지 영향력을 확대할 필요성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국제정세를 잘 이용한다면 통일과 대북관계 개선에 유리할 것이란게 저자의 판단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을 가능하게 하는 시작은 국민의 지지라고 말한다. 통일과 평화를 바라는 지지세력이 많아지면 국내의 구심력이 높아질 것이고 이를 통해 수많은 반대론자와 그들의 기득권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일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