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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에서 애초에 느낀 것이지만 고미숙은 골수분자라는 느낌이다. '열하일기---' 에서도 고미숙은 온전한 연암이 되어있었다. '네가 나이고 내가 너이다'라는 우정론과 맞아떨어지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이러한 고미숙의 열정과 몰입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에서 그녀는 온전한 연암이되어 있었고, 그러므로 열하일기를 마치 연암과 마주하는 느낌으로 접할 수가 있었다. 연암과 독자간의 간격을 최대한으로 좁혀준 매체, 아니 독자를 다이렉트로 연암을 만나고 있다는 착각을 일이킬 정도로 그 역할은 대단히 컸다. 이 점은 고작가가 아니었더라면 느낄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부분일 것이라 느낀다. 고작가는 정말 몰입형이며, 완벽한 골수분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골수분자가 마음에 든다. 비록 몰입한 나머지 그 옆을 바라보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해도 나는 그 몰입이 좋다. 그리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 골수분자가...
골수분자의 원심적 시각이 남기는 한계...그러나...그 가능성...
고작가는 임꺽정에서도 몰아일체의 형식을 보여준다. 이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미 출판 협회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은 [임꺽정]의 안내서이니 말이다. 이처럼 몰입의 골수분자가 되다보니 안에서 원심력만을 발휘하게되는 측면이 없지 않아보인다. 그 예로는 고작가는 청석골을 추방된 아니 이탈한 마이너들, 결국 도망자들의 막다른 거점이자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이 말은 지극히 반박의 여지가 없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느끼는 막다른 골목에는 고작가가 말하는 거점이 없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현대인들은 대학을 가기위해 죽어라 공부하고, 대학에서는 학점에 목숨을 걸며, 그리고는 백수가된다. 이게 우리 시대 청춘의 자화상이다' --13쪽--
'고로 우리시대의 마이너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마이너라는 낡은 습속에서 벗어나 삶의 새로운 형식을 창안 할 수 있어야 한다.' --56쪽--
임꺽정의 시대적 배경은 사실상 요즘이나 크게 다를 바는 없다. 빈부의 격차가 매우 크며, 지배자(기득권)와 피지배자(농공상), 즉 요즘으로 말하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역사적 판박이나 다름이 없던 시대였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막다른 골목이 문제가 된다. 임꺽정의 시대는 막다른 골목에서도 꼬뮌을 형성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다시말하면 고작가의 말대로 타자를 수용하는데 거부감이 없던 시대였다. 그들은 타자를 몸으로 부딪히며 서로를 이해한다. 그들의 방식은 생각과 행동의 급간차이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현대는 사고와 행동간의 시간차가 너무크며 그러므로 온갖 생각이 들어차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이질적 문화의 변화속에서 현대의 마이너들이 만나는 막다른 골목은 당시의 골목과는 거리가 너무나 요원하기만 하다.
우선 꼬뮌을 형성할 수 없다. 우선 자본의 시대적 성질이다. 당시의 시대는 자본을 따로이 필요로하지 않았다. 꼬뮌을 형성하는데 웬만한 기술을 보유한 마이너의 인물들을 청석골로 데려오기만하면 된다. 시대적 조건으로는 전혀 무리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현대의 마이너들은 철저한 단독이다. 그러므로 꼬뮌을 형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은 88만원 세대이거나 아니면 백수들로 꼬뮌을 형성할 수 있는 여력도 없다. 가장 요긴한 자본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둘째로는 마이너들의 미래이다. 이 책의 등장 인물들은 본디 가진 것이 없었다. 게다가 희망도 없다. 어찌어찌해서 한밑천 확 잡아서 신분 상승도하고 권세가들 부럽지 않게 잘먹고 잘 살아보겠다는 야심을 가질 수 있는 시대적, 사회적 여건이 애초에 되어주질 못했다. 신분 자체의 제약이 그것이다. 그러니 사고와 행동 사이에 시간차가 없어도 되는 좋은 조건을 갖춘 것이다. 현대와의 차이점이라면 큰 차이점이 될 수 있다. 현대는 쿵푸를 하면 그것이 곧 부를, 지위를 약속하는 사회이다. 그에 대한 제약적 신분사회도 아니니, 그 가능성은 두령들과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이러한 신분의 변화에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것이 오히려 꼬뮌을 형성하는데 장애물이 되어주고 있는 사회가 현대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은 조선의 마이너들과는 다르다. 조선의 마이너들에게는 미래가 없으며, 필요에따라 3일 잔치를 벌이고 먹어줘도 되는 마이너들이지만 현대의 마이너들은 이루기 힘든 희망의 불씨가 그나마 남아있기에 꼬뮌을 형성하기 어렵다. 온전한 포기, 즉 가장 밑바닦으로 내려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골수분자 고미숙의 희망을 찾으시라...
그렇다고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비록 외형적으로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고는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밀폐되어있는 막다른 골복이 아니냐고 말한다면 너무나 자괴적인 생각이다. 고작가가 이 책을 통하여 말하고 싶은 부분도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고 있다. 너무 골수분자라 잘 안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고작가의 핵심을 마음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한사람의 독자인 나는 고미숙이라는 골수분자의 한계속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 가능성을 말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이 사고를 좀 바꾸어주기만 하면된다. 자본도, 단독적 추진형태도 모두 바꾸어주면 가능한 일이 된다. 그리고 쿵푸를 하는 것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이 쿵푸를 하기위해서는 반드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고작가처럼 말이다. 사실 고작가도 알고보면 마이너였다. 그런 마이너가 이제는 메이저가 된 것이다. 한 사람의 마이너로서 꼬뮌을 형성하고, 몸으로 부딪히면서 앞길을 헤쳐간 대표적인 마이너가 고작가이다. 사고의 전환이란 무형에서 유형의 본질속으로 탐구해가는 것이다. 무엇을 탐구하는가? 바로 자신이다. 자신의 쿵푸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것이다. 저기저...두령들이 그러했듯이...그리고 마이너들끼리 뭉치고 뭉치는 사회적 성향을 가꾸어가야 한다. 현대의 사상적 배경을 고려할 때 대단히 엄청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반드시 결실은 오고야 말것이다. 고작가가 마이너였지만 메이저가 된 것 처럼...마음먹고 이제 찾아 나서면 된다. 내가 뛰게될 마이너 리그의 거점을 행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