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얼려진 외래어 중에는 뉘앙스(nuance)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에서 온 말이라고 하는 이 뉘앙스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음색, 명도, 채도, 색상, 어감 따위의 미묘한 차이, 또는 그런 차이에서 오는 느낌이나 인상, 느낌, 말맛, 어감' 이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의 풀이로 보아 비단 언어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예술, 건축등 매우 폭 넓은 범주에 통용될 수 있는 말이며 인간의 모든 행위는 물론 자연의 모든 느낌을 표현 할 수 있는 참으로 유용한 말이지 싶다.
우리 말에는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표현상의 기법을 지적하는 말인 듯 하다. 사실 누군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언어는 언어 그 차제만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드물것이다. 상대방의 몸짖, 눈빛, 억양등 모든 이해 가능한 방법들이 동시에 총동원되는 그야말로 종합적인 수렴 과정을 거쳐 드디어 이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일련의 혹은 멀티 태스킹은 동시에 발생한다. 참으로 판단이라는 것은 복잡하고도 복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우리 속담 중에는 '말 한마디에 천냥 빚 갚는다'라는 말도 있다. 말 한마디로 어떻게 천낭 빚을 갚을 수 있을까 싶지만 이는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지 싶다. 어쩌면 천냥 빚이 아니라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에 직면 할 수도 있다. 이럴 땐 말을 잘 해야 살아 남을지도 모른다. 귀중한 목숨을 말 한마디로 살려 낼 수 있다면 말이란 참으로 잘하고 볼일이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경우에 해당하지만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되었다 ㅠ.ㅠ
그러고 보면 언어는 마술사와 같다. 말은 단순한 언어적 행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사전적인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음색, 명도, 채도, 색상, 어감등 종합세트를 갖추고 있는 것이 말인가 싶다. 아...말이란 창조의 신이 관여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아주 많은 것들을 동시에 전달하는 것이 말이건만, 흔히 말하는 text(문자)는 이러한 뉘앙스를 올올이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는 방법은 아닌가 싶다. 물론 문자보다 더 말을 잘 전달 할 수 있는 다른 매체는 없어보인다. 직접 상대방을 대면하지 않는 한 말이다.
현대는 '발전' 혹은 '발달'의 시대이다. 그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는 속도의 시대라는 뜻이다. 책은 그저 문자로 의사를 전달하기는 하지만 일방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인터넷과 기타 서로 주고받는 문자(texting)은 상대방과 비록 거리감은 있으나 상호 목적을 달성하는 싱호 수단이다. 누군가가 글을 포스팅하거나 문자를 주면 그에 상응하는 반응이 오게 마련이다. 이 반응을 기대하고 뜻을 표현하는 것이 주된 것은 아니겠지만 일부 목적이 될 수 있다.
하여 현대의 필수적인 소통의 방식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그 편리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필요에 따라 상호간의 은밀함이나 보안성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참 좋은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통의 방식에 문제가 하나 있는 것이 단점이라면 큰 단점이 될 수 있다.
Nuance를 전달할 수 없는 그 치명적 약점, texting...
Texting은 문자만을 전달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매체이다. 그 한계를 극복해보고자 다양한 이모티콘들이 등장했지만 역시나 그 약점을 보완하기에는 턱없는 부족함이 있다. 상대방의 몸짖과 표정, 그 눈빛, 그 상황에서 발생하는 총체적인 판단의 근거들이 제약을 받기 때문에 상대방의 감정을 온전하게 읽어 낼 수가 없다. 이것이 현대의 필수적이면서 중요한 소통 방식이 가지는 치명적 약점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종종 해주는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말을 주고 받을 때의 자세인데, 남여의 학생들에게 따로이 전해준다.
1) 여학생들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면, 절대로 그의 입술을 믿지 마시라...그의 눈빛을 바라보고 그의 마음을 읽으려고 하시라...그의 눈빛은 그의 입술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과 일치하는지를 읽어내려고 노력하시라...
2) 남학생들에게: 여자 친구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절대로 '고개를 숙인다거나 땅바닦을 바라보며 혹은 하늘을 쳐다보며 고백하지 마시라...'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술이 아니라 그대들의 가슴과 눈빛으로 사랑하고 있느라고 전달하시라...그대의 진정성을 그녀에게 고스란히 보여주시라...상대방은 땅바닦도 아니고 하늘 도 아니지 않은가...
3) 모두에게 :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하시라... 정말로 그대가 그나 혹은 그녀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언어가 아니라 온 마음을 담이 전달하시라...정녕 미안해 하고 있다는 그대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전해주시라...
물론 마주하기가 쑥스러운 상황에 당면하기도 한다. 이땐 되려 문자가 좋은 감정의 전달 수단이 되기도 한다. 경상도 싸나이들은 아마도 문자로 전달만해도 충분히 이해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 부부싸움 후의 일이 이에 해당하겠지만...
문자는 종합적인 감정을 담아낼 수 없는 매체라는 한계를 가진다. 우리들이 서로를 종종 오해하고 상처입고, 또 서로 멀어지기 쉬운 이유이다. 게다가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주로 상대방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상대방의 성격, 상대방의 환경, 상대방의 표현 방식, 상대방의 나이, 상대방의 사회적 조건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소통에 중요한 참고사항들이건만 이를 반영할 수가 없다. 이것이 쉽게 친해질 수 있지만 오히려 쉽게 헤어지는 이유가 되어주기도 한다.
발달 혹은 발전이라는 용어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기술이 발달하고 매체가 발달하지만 소통은 왠지 발달하는 것 같지가 않아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단지 전달의 방식이 발달하는 것만으로 문명이 발달하고 매체가 발달한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것을 발달이라 말하고 싶지 않다. 매우 미묘하고 섬세하며 감정적이고 총체적인 전달 수단인 언어가 문자라는 매체를 통과할 때 오는 그 왜곡현상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알고보면 우리들은 text의 세계속에 살고 있다. 상대방을 직접 대면하기보다는 신속하며 편리한 text를 사용한다. 각종 공문이 그러하고 책이 그러하며 인터넷 정보가 그러하고 알라딘의 리뷰가 그러하다. text는 그 효율적인 면에서 매우 훌륭하지만 더불어 건조한 전달 방식이다. 단점을 가지지 않은 완벽한 것이 존재가 있을까...그것은 자연의 섭리는 아닌 것 같다..자연의 모든 존재들도 언젠가는 스스로 멸하는 순간이 오기때문이다. text가 가지는 건조함이라는 특징이 바로 왜곡의 주된 원인은 아닐까 싶다.
자손심에 손상을 입지 않는 한 화해는 가능하다..
그러나 text가 가지는 건조함을 우리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아마도 우리는 여기에서 개인적인 딜레마에 봉착하지 않나 싶다. 그것은 개인이 가지는 감정, 바로 이것이다. 혹자는 이성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성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최고의 '선 혹은 이데아'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말그대로 형이상학적인 방법론에 불과한 것이다. 현실의 세계에서 막상 부딪는 내용들은 대부분 감정에서 비롯한다. 그렇지 아니한가...
자존심이라는 것이 그 중 가장 강력한 방어기제이다. 자존심은 이성을 곧잘 뛰어 넘는다. 오늘은 새벽 6시에 기상하여 일과를 시작하기로 되어있는 내가 알리딘에서 이러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성적으로 본다면 나는 잠들어 있어야 한다. 분명 나는 이성적인 시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것들에서 나의 이성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성은 때로 이토록 무기력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텍스트의 결정적 결함을 말하려다가 딴 곳으로 흘러 버렸다. 생각해보니 극복이랄 것도 없다. 서로 얼굴을 맞대지 않는 한 극복은 애초에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한가지 대안은 있을 것도 같다. 바로 자존심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는 한, 그는 스스로 일어설 수가 있다. 마지막까지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려 죽음도 불사하는 동서양의 여러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지는 줄 알면서도 싸운다는 것은 바로 스스로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허락하는 texting...이러한 texting이 가능한 일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것으로 일말의 해답을 찾으려 한다. 소통은 상호적이고 교환이라는 특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상대방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을 각자는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극히 개인 저마다에 달려있으므로 주관적일 수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역시 한계가 있다. 매뉴얼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희망을 잃지 않고 싶은 것이다.
나는 자존심도 없나봐...라고 말하며 자괴감에 빠진 사람에게 그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아무리 화가 난 사람이라도 자손심에 손상을 입지 않은 한, 그 사람은 화를 쉽게 가라앉힐 수 있고 서로 화해를 하기도 쉽다. 서로 스스로가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쉽다. 어쩌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동안 그대를 잘 몰랐노라고...순간 화가 많이 났었노라고...그러나 이제 보니 당신도 멋진 사람이었노라고...말이다. 이것이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현대의 미덕은 아닐까...그런 것이 자존심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