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사이언티스트> 특별기사(2016.09.03)의 여섯 번째 주제는 ‘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가?Do I have free will?’이다. 오늘 점심으로 자장면과 짬뽕 중 짬뽕을 먹기로 한 결정한 것이 정말 나일까? 이런 질문으로 인류는 수천 년을 고민해왔다. 결정하는 것은 정말 나일까, 아니면 어떤 외부적 대리자 – 전능한 신 또는 물리법칙 – 이 우리 인생의 행로를 미리 결정해 놓은 것일까? 역시 쉽지 않은 질문이다. 우리 느낌으로는 당연히 ‘내’가 결정한다. 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앞의 기사에서 논의되었던 것처럼, 과학에서 볼 때 ‘나’는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다. 1980년대에 신경과학자인 벤저민 리베트Benjamin Libet는 ‘내’가 행동을 결정하기 전에 이미 뇌에서는 그 행동을 위한 작용이 시작됨을 보인 바 있다. 물론 리베트가 시험한 행동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지만, 신경과학자들은 모든 행동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의지를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리학자인 런던 정경대학의 니콜러스 험프리Nicholas Humphrey 명예교수는 뇌에서 발생하는 물질적 원인으로 행동이 일어난다고 해서 자유의지가 없다고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나’라는 것을 내 몸으로 체현된 모든 것(embodied self) – 나의 생각, 믿음, 욕망, 성향 등 – 으로 생각한다면 여전히 내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 결정을 인식하던, 인식하지 못하던 말이다. 정말 그런가?


옥스퍼드 대학의 물리학자인 블라트코 베드럴Vlatko Vedral 교수는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라는 ‘인격’도 결국 물질에 기인하므로 물리법칙에 의해 모든 것이 사전에 결정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은 환원론이다. 생물과 생리현상을 원자와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게 되면 다음 행동까지 예측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복잡계’의 연구 등을 통해 물리학계에서도 요즘 많이 비판된 바 있다.


더욱이 양자역학에 따르면, 원자 수준의 세계에는 불확정성이 본질적으로 들어와 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원자와 분자 수준으로 환원해도 모든 것이 사전에 결정되어 있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양자역학적 불확정성이 자유의지가 숨쉴 여지를 만들어 주는 것일까?


하지만 양자역학의 다른 해석에 따르면 완전히 다른 결론에 다다른다.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은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고 말한다. 다른 우주에서 말이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우주는 완전히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단지 내가 어느 우주에 있을지 모른다는 것뿐. 이 우주에서는 내가 짬뽕을 주문했지만, 다른 우주에서는 내가 자장면을 주문했다는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네덜란드 우트레히트 대학의 게라드 토프트Gerard ‘t Hooft 교수는 우주가 초결정적superdeterministic이라고까지 말한다. 우주 밖의 무언가가 우주가 어떻게 될지 완벽하게 결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졌는지 시험한다면, 그렇게 시험할 것까지 사전에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신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베드럴 교수는 이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유한하고 우주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우주가 비결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자유의지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가 무한할 수는 없으니까.


이 기사를 읽고 드는 생각? 자유의지 문제는 우주적 문제이다! 또 한편으로는 인공지능 연구를 통해 자유의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는 생각도 든다. 알파고를 설계한 사람들이 알파고가 어떤 수를 둘지 알았을까? 알파고 설계자가 알파고의 선택을 결정한 것인가? 알파고는 자유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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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6-10-13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스 헬무트 코른후버(Hans Helmut Kornhuber)와 뤼더 데커(Lüder Deecke, 뤼더 데케),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의 준비전위(readiness potential) 발견은 정말 노벨상을 받을 만한 위대한 신경과학적 성과였긴 하죠. 그러나 그것은 자유의지 유무에 대한 결정적인 과학적 논거는 되지 못하죠. 왜냐면, 예컨대 우리가 팔을 들어올리려고 마음 먹었을 때, 그 생각보다 앞서는 신경작용이 준비전위를 야기했다면, 그 신경작용을 야기한 것은 무엇이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고, 다시 그 ‘신경작용을 야기한 신경작용’을 야기한 또 다른 신경작용은 무엇이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고, 결국 이런 식의 문제 제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무한퇴행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죠. 즉 이런 무한퇴행에 빠지게 되면 과학적으로 유의미한 아무런 해답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벤저민 리벳의 실험 결과를 논거로 자유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장이 있다면, 그 주장은 그른 주장이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이나 신경과학/뇌과학은 아직도 완성된 단계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학문이죠. 암흑물질이나 암흑에너지가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하지만 현대 물리학은 그것에 관해 아직까지 거의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죠. 또한 현대 신경과학/뇌과학도 뇌의 기제나 작용을 5~10%밖에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고 합니다. 그 5~10% 정의 연구 성과조차 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백질(white matter)에 관해서는 거의 건드린 게 없다고 하죠. 즉 회백질(gray matter)에서 거의 모든 뇌 작용이 일어난다고 보아 최근까지도 회백질 부분만 주로 연구를 해왔는데, 백질 부분에서도 중요한 뇌 작용이 다수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발견되어 최근에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또한 뇌 연구의 해상도가 아직 나노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현대 신경과학/뇌과학의 결정적인 한계죠. 연구 해상도가 나노 단계로 내려가야 뇌에서 일어나는 양자역학적 작용을 해명할 수 있을 텐데, 아직도 인류의 신경과학/뇌과학 수준은 조잡한 수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존(amazon.com)에서 나노신경과학(Nanoneuroscience)으로 검색하면 겨우 네 권의 책밖에 뜨지 않습니다. 즉 지금 우리가 21세기 최첨단과학 시대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이 분야는 무인지경의 황무지 혹은 미지의 대륙이라고 할 수 있는 분야라는 것이죠. 따라서 이렇게 빈약한 현대 물리학/신경과학/뇌과학 수준을 논거로 자유의지의 존재를 부정하고, 의식을 한낱 뇌가 만들어낸 환영이니 환상이니 착각이니 주장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봅니다.

이런 사실이 아니더라도 자유의지/의식 부정론자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간단하게 논파될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무한퇴행의 역설을 자유의지/의식 부정론자들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환영/환상/착각이라 하더라도 그것과 함께 따라오는 생생한 감각질(느낌의 질감, qualia)은 부정할 수 없는데, 그렇다면 과연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환영/환상/착각과 동반하는 감각질도 환영이고 환상이고 착각이라고 주장한다면 위에서와 같이 똑같은 형태의 무한퇴행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부정론자들의 주장은 일단 논파된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 자유의지와 의식의 존재가 역입증되는 것은 아니죠. 그건 또 다른 과제로 남게 되는 것이죠.

제 어렴풋한 생각으로는 “의식”이라는 것은 우주의 근본적 속성이거나 실체가 아닌가 합니다. 즉 철학자 데이비 차머스(David J. Chalmers)의 자연주의적 속성 이원론(naturalistic property dualism)이나 범심론(panpsychism), 혹은 현대 질료형상론(hylomorphism), 혹은 중립적 일원론(neutral monism)에 의식에 대한 궁극적 해답이 숨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blueyonder 2016-10-14 14:30   좋아요 0 | URL
qualia 님, 장문의 댓글 감사합니다! ^^ 지적하신 대로, 현대과학(물리학, 신경과학 등)이 아직 풀어내야 할 문제가 많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저와 의견이 다른 부분은 지금까지 밝혀진 과학적 사실에서 어떤 의미를 끄집어 내느냐 입니다. 저는 과학이 부족한 대로 한 번 귀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구요, qualia 님은 과학이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겠지요. 사실 과학자 중에도 의식이 우주적 실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단지 주류가 아닐 뿐이겠지요. 하지만 과학의 역사를 보면 비주류가 주류가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것이구요. 거기에 과학의 본질과 적응적 우수성이 있습니다. 현대과학이 `의식`은 뇌가 만들어내는 환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할 때, 그 `생각`이 수학적 증명은 아닙니다. 경험적, 실험적 사실들을 종합한 `모델`에 기반한 합리적 믿음일 뿐이지요. 모델이 틀릴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모델이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사실이 나올 때, 그 모델은 수정되거나, 아니면 폐기되고 다른 모델로 대체되어야 하겠지요.

blueyonder 2016-10-14 14:41   좋아요 0 | URL
벤저민 리베트 실험의 의의는, 제가 이해하기로는, 행위(혹은 의식적 선택)의 원인이 반드시 의식이 아니라 물질에 기반할 수도 있음을 보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오늘은 점심으로 짬뽕이 아니라 자장면을 선택할 때에, 복잡한 신경생리적 원인으로 내 `몸`이 자장면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나는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요. 맞습니다. 리베트의 실험이 이런 결론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추론의 여지를 줄 뿐입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고, 어쩌면 기사의 논조처럼 끝내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뉴 사이언티스트> 특별기사(2016.09.03)의 다섯 번째 주제는 ‘선과 악은 어디서 오는가?Where do good and evil come from?’이다. 글은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3살짜리 아이가 엄마의 팔에서 빼앗겼다. 그리곤 이마를 물어 뜯겨 살해당하고, 잡아 먹혔다. 아이와 같은 공동체에 속한 어느 엄마와 딸이 한 짓이었다. 이들은 이후에도 적어도 두 건의 유아살해 및 식‘인’에 연루되었다. 도덕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연쇄살해는 정말 ‘악’이라고 부를만한 짓이다. 단, 여기서 피해자와 공격자들은 탄자니아의 국립공원에 사는 침팬지들이었다. 우리는 침팬지를 악하다고 할 수 있을까? 또는 다른 경우,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선과 악의 문제는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씨름해 온 문제이다. 선과 악은 나눌 수 없는 쌍둥이일까? 어떤 일이 본질적으로 선하거나 악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과학이 답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학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왜 동물들은 이타적인가?’, ‘왜 침팬지들은 때때로 서로를 잔인하게 죽이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될 수 있다. 선과 악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자연선택이라는 중립적 손이라는 것이 과학의 답이다.


캐나다 사이먼 프레이저 대학의 진화생물학자인 버나드 크레스피Bernard Crespi 교수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일어나는 일이다. 왜 어떤 동물은 어린 동생을 돌볼까? 자기 자식이 아니어도 공통된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 수준에서는 이타적 행동이 유전자 수준에서는 이기적 행동이다. ‘선한 행동’은 종종 ‘숨겨진 이득’을 동반한다. 물론 유전자 수준에서의 이득이다. ‘악한 행동’ 역시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유아살해한 침팬지들은 식량과 자원 획득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었음이 이후 드러났다. 이 경우 유전자 수준에서는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이 이득이다.


물론 모든 악행이 유전자 이득으로만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끔찍한 일을 저지른 인간의 많은 경우가 폭력적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는 결과도 있으니까. 이러한 과학의 답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선과 악은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 이러한 답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도 할 수 있다: 진화적 압력이 우리를 폭력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평화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배부르고 등 따스운데 누가 싸우고 싶겠는가? 이것이 선과 악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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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사이언티스트> 특별기사(2016.09.03)의 네 번째 주제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What is the meaning of life?’이다. 이 질문에 대한 냉정한 답은 ‘아무 의미도 없다’이다. 우리 각자에게 인생은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인생이란 무심한 우주 속에서 물질과 에너지가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것일 뿐이다. 인생이 끝나면 내 주변의 몇몇은 얼마 동안 나를 기억하겠지만 이들 역시 언젠가는 죽는다. 역사책에 나올 커다란 일을 했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내 공헌은 점점 잊혀질 것이다. 인류는 멸종할 것이고 지구와 태양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최후에는 우주도 종말을 맞는다. 이러한 끔찍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 인생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사실은 왜 사람들이 종교(신에 대한 믿음)를 갖는지에 대한 답이 되기도 한다. 종교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해서 존재의 잔혹함을 완화시켜준다. 어떤 신학자들은 신이 없는 인생의 무의미함이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이 존재한다는 어떠한 ‘객관적’ 증거도 현재로는 없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른 주제에서 다뤄진다.)


양자역학의 해석 중 하나는, 우리가 관찰할 때 우주는 존재하게 되며 관찰 행위가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여 다음에 무엇이 발생할지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좀 더 가설적 해석은, 선택할 때마다 우주는 나누어지며 다른 가능성은 다른 우주에서 펼쳐진다고 말한다. 이게 사실이면, 나 때문에 우주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하, 이게 종교와 뭐가 다른가 하는 질문이 문득…)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실제적 대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심리학자들이 찾아냈다. 그냥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당신의 인생은 얼마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평가해 달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인생보다 더, 자신의 인생에는 의미와 목표가 있다고 긍정적으로 대답했다는 것이다. 주관적인 대답에 어떻게 객관적 의미를 부여하느냐는 비판에, 미주리 대학의 로라 킹Laura King 교수는 어차피 객관적 답이 없는 질문에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이 오히려 넌센스라고 답한다. 내가 인생에 의미가 있다는데 누가 나를 판단할 것이냐는 말이다. 아, 모두 제멋대로,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이다. 그래도 뭔가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사는 것이 좀 더 충만한 삶인지,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는지는 각자 고민해야 하겠지만, 누구는 맞고 누구는 틀리다고 말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결국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내 인생은 ‘내’가 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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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10-09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택할 때마다 우주가 놔눠진단 설명에 멀티 유니버스가 연상됩니다. ㅎ
영생하지 못하는 인간이라 자신이 만든 기업 등에 상속 등으로 영생과 존속에 집착한단 얘기도 기억납니다. ^^

blueyonder 2016-10-09 22:25   좋아요 0 | URL
네, 많은 물리학자들이 `믿는` 가설이랍니다. 상속이든 뭐든 결국 없어질 우주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때때로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전우주적으로 관점을 확대할 때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순진한 생각을 합니다. ^^
 

<뉴 사이언티스트> 특별기사(2016.09.03)의 세 번째 주제는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 있는가?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이다. 이러한 의문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다. 유신론적으로 표현하면, 왜 신은 번거롭게 우주를 창조했을까? (여기에는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인간적 게으름도 내포되어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한 '쉬운' 과학적 대답은 이렇다: 양자장 이론에 따르면 '진공'이라는 것도 사실은 무가 아니고 입자와 장이 마구잡이로 생겼다가 없어지는 활발한 공간이다. 현재는 이러한 무작위적 요동의 하나가 우리 우주를 만들어냈다고까지 생각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없는 것이 더 어렵다.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 무언가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사는 더 '어려운' 질문을 제시한다. 양자 요동이 있는 진공은 진정한 '무'가 아니다. 진정한 무란 무엇일까? 양자 요동이 없는 진정한 진공이라도,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팽창하고 휘어지고 (블랙홀과 같은) 구멍이 생기는, 마치 물질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고전 물리조차도 진공이 한 가지 속성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크기'가 그것이다. 아무 것도 없어도 물체를 담고 분리시키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은 하고 있다. 그럼 진정한 무란 무엇일까?


진정한 무란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물리법칙도 없는 것이다. 왜 물리법칙은 있는 것일까? 왜 물리법칙은 없으면 안 되는 것일까? 왜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법칙이 있는 것일까? 이 대답에 대해 가능한 답은 '다른 물리법칙에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중우주'라는 요즘 유행하는 이론은 이러한 모든 가능성(물리법칙이 없는 경우까지 포함한 다른 물리법칙)이 '다른 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옥스퍼드 대학의 데이비드 도이치David Deutsch 교수는 결국 이 모든 것이 "철학적 질문"일 뿐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음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심지어는 궁극적 해답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생각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니까. 학자다운 답이다. 일면 동의가 된다. 궁극적 질문에 대한 답을 안다면 그 이후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지도. 도이치는 다음과 같은 농담을 한다: "왜 무언가 있냐구요? 왜냐하면 아무 것도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불평할 것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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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사이언티스트> 특별기사(2016.09.03)의 두 번째 주제는 '의식은 무엇인가?What is consciousness?'이다. 앞의 주제와 연결되는 이야기로서, 정말로 존재하든 시뮬레이션으로 존재하든, 결국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나'는 있다는 얘기인데, 이 '나'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는 '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너무나 확실히 잘 알고 있다. 데카르트가 말했듯이 '나'는 물질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불멸의 영혼'일까? 아니면 단지 오랜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정보를 처리할 목적으로 만든 뇌로 인한 부산물일까? 과학에서 무엇이라고 생각할지는 아마 누구나 짐작할 것이다. 


결국 '나'라는 느낌, 넓게 얘기하면 '의식'이라는 것은 실체라기 보다는 환상, 신기루라는 것이 과학적 입장인데, 그럼 뇌가 어떻게 이러한 '의식'을 만들어내는지 이해하는 것이 과학이 시도하는 바가 되겠다. 뉴런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네트웍이 어떻게 물질세계 밖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만들어내는가?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일 수밖에 없다. 결코 과학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 이 어려움을 뉴욕 대학의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 교수는 1970년대에 이렇게 말했다: '박쥐 뇌의 모든 물리적 작용을 이해할지라도 박쥐인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박쥐 뇌를 완벽히 이해할지라도 내가 박쥐가 된 느낌을 알 수는 없다, 내가 박쥐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내가 남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학은 '내'가 '환상illusion'일 뿐이라고 말한다. 뇌가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도 '나'는 환상인 것이 맞다. 나는 '우주'이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우주와는 별개인 존재, 우주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존재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내 손을 바라보면서 나와는 상관 없는 객체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과학은, 내가 죽은 후 뇌와 몸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주'는 남아 있다. 이것은 과연 '내'가 사라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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