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사이언티스트> 특별기사(2016.09.03)의 세 번째 주제는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 있는가?Why is there something rather than nothing?'이다. 이러한 의문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다. 유신론적으로 표현하면, 왜 신은 번거롭게 우주를 창조했을까? (여기에는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인간적 게으름도 내포되어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한 '쉬운' 과학적 대답은 이렇다: 양자장 이론에 따르면 '진공'이라는 것도 사실은 무가 아니고 입자와 장이 마구잡이로 생겼다가 없어지는 활발한 공간이다. 현재는 이러한 무작위적 요동의 하나가 우리 우주를 만들어냈다고까지 생각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없는 것이 더 어렵다.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 무언가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사는 더 '어려운' 질문을 제시한다. 양자 요동이 있는 진공은 진정한 '무'가 아니다. 진정한 무란 무엇일까? 양자 요동이 없는 진정한 진공이라도,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팽창하고 휘어지고 (블랙홀과 같은) 구멍이 생기는, 마치 물질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고전 물리조차도 진공이 한 가지 속성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크기'가 그것이다. 아무 것도 없어도 물체를 담고 분리시키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은 하고 있다. 그럼 진정한 무란 무엇일까?
진정한 무란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물리법칙도 없는 것이다. 왜 물리법칙은 있는 것일까? 왜 물리법칙은 없으면 안 되는 것일까? 왜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법칙이 있는 것일까? 이 대답에 대해 가능한 답은 '다른 물리법칙에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중우주'라는 요즘 유행하는 이론은 이러한 모든 가능성(물리법칙이 없는 경우까지 포함한 다른 물리법칙)이 '다른 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옥스퍼드 대학의 데이비드 도이치David Deutsch 교수는 결국 이 모든 것이 "철학적 질문"일 뿐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음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심지어는 궁극적 해답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생각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니까. 학자다운 답이다. 일면 동의가 된다. 궁극적 질문에 대한 답을 안다면 그 이후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지도. 도이치는 다음과 같은 농담을 한다: "왜 무언가 있냐구요? 왜냐하면 아무 것도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불평할 것이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