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손철주다.
내 서재 검색창에 '손철주'라는 단어를 집어넣으니, 9개의 마이페이퍼와 4개의 리뷰가 뜬다.
내가 손철주를 좋아하긴 좋아하는 모냥이다, ㅋ~,
앞으로도 '손철주'는 내게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레파토리일 것 같다.
요번 책 같은 경우도, 그동안 손철주의 전작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별반 새로울게 없는 내용들이다.
그렇다고 그 내용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표현해내면 손철주가 고수가 아닌거라.
같은 그림, 같은 시, 같은 레파토리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이렇게 저렇게 다른 얘기들로 탄생시키는데,
그 접근 방식이 신선하다.
암튼 그러하다.
흥, 손철주의 음악이 있는 옛 그림 강의
손철주 지음 / 김영사 / 2016년 11월
오늘 내가 필이 꽂힌 꼭지는 '높은 격과 풍류를 살리는 기법'이다.
현재 심사정의 <송하다음>입니다. 소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시는 그림이지요. 술이 아니라 차입니다. 술의 별명과 차의 별명이 있습니다. 술은 망우물(忘憂物), 즉 '근심을 잊게 해주는 물건'이라고 했습니다. 물(物)이니까, 물건입니다. 차는 해번자(解煩子), 즉 '번뇌를 풀어주는 귀공자'라고 했습니다. 아들 자(子)를 붙였습니다. 끄트머리에 '자'를 붙이면 공자, 맹자 하는 식의 높임말입니다. 술은 그저 물건에 불과한 속된 것이고, 차는 번뇌를 풀어주는 높은 존재라고 해서 '자'를 붙인 거지요.
그러니까 풍류와 고격을 살리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술이 아니라 차라는 거죠. 그래서 차를 만신 후를 훨씬 더 높은 풍류의 아취로 분류한 사례가 글과 그림으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도 지금 두 사람이 야외에서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우리 옛 그림 중에는 차를 끓이는 다동(茶童)은 많이 나와도 직접 이렇게 차를 마시는 장면은 거의 없습니다. 이거 굉장히 귀한 그림입니다.
차에 담겨 있는 풍류를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혼자 마시는 차에 이름이 있습니다. 술은 혼자 마시면 뭐라고 하죠? 독작이죠. 그런데 차는 혼자 마실 때 뭐라고 그러느냐, 이속(離俗)이라고 합니다. "떠날 이'에 '속될 속'. 둘이 술 마시는 건 대작(對酌)입니다. 둘이 차를 마시는 건 한적(閑寂)이라고 했습니다. '한가로울 한'에 '적막할 적', 우리는 대부분 이속과 한적을 모르고, 독작과 대작을 알 뿐이지요. (일동 웃음) (228쪽)
이 뒤의 내용들은 셋이서 술을 마시면 품배(品杯), 차를 셋이서 마시면 '유쾌'라고 한다는데 이미 고요한 차맛은 사라진다는 둥 너스레를 늘어놓는다. 이 이상 더 모여서 마시면 속되게 되어버리는 것이 차의 세계란다.
여기서부터 끓는 찻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 따위 고품격 버라이어티 쇼가 아니라, 고품격 풍류가 시작된다.
나는 술도 그렇고, 차도 그렇고...저품격이다.
관계와 분위기에 덩달아 마시기는 하지만, 맛을 논할 정도는 아니다.
사람도 마음에 맞는 두서너 명 정도가 적당하지,
그 이상이 되면 불안하고 불편하다.
암튼, 여기서 그 유명한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법'이 소개 된다.
난 참 이런 쪽으로 문외한이어서,
혈서가 아니고서야 손가락으로 뭔가를 할일이 뭐 있을까, 생각도 못했었는데,
내가 요즘 그림에 관심을 가져 그렇겠지만, 새롭다.
이 그림을 실제로 한번 보고싶은데, 찾아보니 '리움'이다.
사진 속에서, 가 아니라 실제로 접하게 되면 어떻게 달라보일까...생각하니 갑자기 설레인다.
오늘의 1일 1그림은 소재를 제공해주신 Agalma님께 아주 미안시렵게,
까뮈의 먼 사촌 '까무룩'정도 되는 것 같다.
어떻게보면 박봉성 만화를 보면 담배 물고 폼잡고 나오는 사람 같기도 하고, ㅋ~.
창피해서 안 올리려다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모든 게 출발한다는 걸 알기에...
후다다다닥~=3=3=3=3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1216/pimg_7451441771542766.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