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그런 생각을 한다.
이 세상의 전쟁은 누굴 위하여 하는 건가?
내가 지금 총뿌리를 겨누는 이 대상은 나의 적이 확실한가?
니편과 내편으로 나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해관계나 입장에 따라,
나로부터냐 나로 말미암음이냐, 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오늘의 동지가 내일은 적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던가?
이렇게 되면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로 이어지고...
그리하여 세상에 홀홀 단신, 나 자신 밖에 믿을 수 없어지고...
그러다 보면 세상은 더 삭막해져 가지만,
그게 다 인지상정이라고 허허롭게 웃게 되는게 우리네 인생살이 아닐까?
코브라
프레데릭 포사이드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7월
이 책엔 흔들지지 않는 견고한 이념을 가진 사람 둘이 나온다.
"나는 평생 동안 두 주인을 모셨습니다. 신과 조국이죠. 신은 한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국은 당신을 배신했단 말이오?"
"네."
"왜요?"
"내가 젊은 시절 충성을 맹세했던 조국이 더 이상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패하고 나약해졌어요. 고도비만에 걸린 오만한 멍청이들의 나라죠. 이젠 내 조국이 아닙니다. 연대도 끊어지고 충성 서약은 휴지로 변했습니다."
"난 어느 나라에도 충성을 바친 적 없소. 이 콜럼비아에도. 왜냐하면 나라는 인간들이 다스리기 때문이오. 그럴 자격이 전혀 없는 인간들이 말이지. 나도 두 주인만 섬기는데, 나의 신과 돈이오."(399~400쪽)
책을 끝까지 읽게 되면 어느 편이 끝까지 남게 되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이념인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네 입장에선 어느 쪽이 되어도 씁쓸하긴 마찬가지이다.
코브라를 읽었다.
프레더릭 포사이스를 읽을 때는 가치관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그게 이 작가가 좋은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가 영국 출신이라고 하여 영국이나 미국을 좋은 나라로 묘사하고 있지 않다는 거다.
그는 사건을 나열하고 기술할 뿐이고, 모든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가치판단을 종용하지 않는다.
코브라는 좀 힘들었다.
코카인 얘기가 우리랑 낯선 것이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의 안목이 좀 더 거시적으로 바뀌어서 전체를 조망하고 두루 꿰뚫어내는 힘을 가졌다.
책의 앞부분 조금만을 읽어서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그의 진가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무조건 믿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근데 무조건 믿고 따라가다 보면,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책의 내용과 관련하여선 이 정도 얘기밖에 할 수 없다.
책의 앞 부분, 코브라는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듯...이런 얘기를 한다.
'세 사람 사이에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뿐이고...'(43쪽)
덱스터가 위험을 무릅쓰고 코브라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대체로 편안하고, 스트레스 없고, 차분한 작은 마을 중산층 생활이었다. 그런데 좀 지루했다.(66쪽)
우리는 흔히 '대체로 편안하고, 스트레스 없고, 차분한 작은 마을 중산층 생활을 삶의 목표로 하는데, 단지 지루하다는 이유로 목숨을 담보로 하다니 아이러니 컬 하다 싶기도 하지만, 뭐.
코브라는 적인 돈 디에고의 사람됨을 이렇게 평가한다.
'코브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는 돈 디에고도 <손자병법>을 읽진 않았기를 바랐다.(284쪽)'
'돈 디에코는 어릴 때부터 사소한 일로 짜증이 나더라도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다. 큰일이 벌어졌을 땐 신사답게 조용해야 한다고 배웠다.(295쪽)
정치에서는 사실 그 자체보다 어리석은 유권자들에게 사실처럼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처럼 보이는 것은 언론 매체들이 퍼뜨리고 어리석은 시민들이 믿으면 된다.(395쪽)
코브라의 두 주인 중 하나인 조국의 배신을 이렇게 적고 있다.
책 뒷표지엔,
'퍼블리셔스 위클리'를 인용하여, "베테랑 포사이스는 다시 한 번 정치 스릴러 장르 마스터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선보인다. 단순하지만 완벽하게 독창적이고, 힘과 김장감이 넘치며 지적이다."라고 적고 있는데...(김-->'긴'의 오자)
정치물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읽기엔 지나치게 힘이 들어갔다 싶기도 했지만 뭐, 오랫만에 전체를 아우르고 조망하는 다른 스케일의 책 읽기를 택하게 된 건 나쁠게 없었다.
찾아보니,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작품을 읽고 쓴 리뷰가 두 개 더 있다.
어벤저
프레데릭 포사이드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6월
언젠가 '동의수세보원'을 평역한 이가,사람들의 사상체질을 감별하며 줄자를 사용하였다는 얘길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었다.
사람의 체질이라는 게 줄자를 사용하여 규격화시키고 그 틀에다 집어넣으려 하는 이가,
적어도 인간의 몸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있어야 가능한...인체와 나아가 우주의 심오한 뜻을 담고 있는 동의수세보원을 제대로 이해하였을까 궁금하였었다.
동의수세보원이나 사상체질은 단지 '기준'을 정할 때 필요한 것이다.
사람이란 제각각의 개성과 특징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에...나름대로의 사정과 상황에 맞게 일일이 마음을 쓰고 배려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재미있어서 영화화된 이런 류의 작품들처럼 줄거리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굵직한 액션 위주여서 시각적 자극만을 줬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데...
그것이 바로 작품 속 인물 개개인에 대해 일일이 마음을 쓰고 배려를 해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책을 읽을 독자들의 입장도 배려했다는 점이다.
이건 최소 작가의 내면에서 '사람에 대한 존중과 깊은 이해'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킬러'라고 하면 피도 눈물도 없을 줄 알았지만,
따뜻한 피가 흐르는 심장 따위는 갖고 있지 않을 줄 알지만...
작가는 이 책에서 주인공 '캘빈 덱스터'를 통하여 '사람에 대한 존중과 깊은 이해'를 녹여냄으로써 우리의 선입견을 또한번 깨뜨린다.
얘기는... 처음 철인삼종경기를 하며, 필요한 근육이 제각기 다르다며 시작한다.
"수영인의 강력한 어깨와 가슴,팔의 근육은 스피드 사이클리스트나 마라톤 선수에겐 필요없는 근육이다.그런 근육들은 달리는 데 무게만 더해줄 뿐이다."
"어느 한 운동의 반목적인 리듬은 다른 운동에는 맞지 않는다."
"그가 다른 고통과 싸우기 위해 이런 고통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지문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귀도 제각각 다르며 수술을 하지 않는 한 변형되지 않는다."
같은 부분에선 탄성이 절로 나왔다.
제목'어벤저' 만을 봤을 때,
'보복하는 사람'정도로 해석하고, 한사람이 보수의 칼날을 가는 액션 위주의 스릴과 서스펜스를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벤저'는 2차대전 때 활약한 미군의 대표적 전투기이며, 주인공의 암호명이기도 하다.
다른 액션물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각적 효과만 클거라고 생각했었는데...복수를 하는 과정과 방법 모두 독특하다.
한가지 더, 자연스런 깨달음은 '복수자'는 '은혜도 갚을 줄 안다'는 거다.
암튼, 이 책은 아주 오랫만에 보는...재미와 작품의 완성도와 작가의 내공의 깊이 등 모두가 갖춰진 훌륭한 책이다.
재미도 재미지만, 보통의 책은 작가가 자리에 지도를 펴놓고 앉아서 머리로 썼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이책은 작가가 직접 발품을 팔아가며 쓴 체험의 산물이라는 느낌이 든다.
가장 큰 놀라움은, 문장이 지극히 무미건조하고 사실적이다.
그런데,이런 문장만으로도 얼마든지 깊이있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프간
프레데릭 포사이드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아프간'이 나라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읽었을 때와, 다 읽고 끝부분 '옮긴이의 말'에서 '디 아프간'이 '아프간 사람'을 나타내는 거란 걸 알게 된 후...이 책에 대한 느낌이 많이 틀리다.
그냥 '아프간'이 나라라고 생각하고 읽었을 때는, 아프간이라는 나라를 놓고 벌어지는 그냥 '스파이소설'정도로 생각되었었고,
그의 전작 '어벤저'에서 느껴졌던 '인간적임=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는 전혀 느낄 수 없어 다른 사람의 작품 같았다.
그러나, 'the'가 붙어 그 나라의 국민성을 대표하는 일반적인 '아프간인'이 제목이 되었을 때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
진정한 의미에서 아프간인이란 이즈마트칸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주인공 '마이크 마틴'도 '아프간인이라 불리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얘기는 우연히 도청장치에 포착된 알카에다의 자금책을 잡으려다가,
'알이스라'라는 암호명의 계획을 발견하고,계획을 저지하기 위하여 영국과 미국이 편먹고 스파이를 침투시키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스파이역학을 하도록 지명된 사람이 '마이크마틴'이라는 영국과 아랍계 혼혈이다.
이 사람은 영국의 공수부대 출신으로 세계분쟁지역에서 활약하다 퇴역하여, 낡은 집이나 수리하고 여생을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다.
난 여기서, '마이크마틴'의 혼혈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되었는데...
서남아시아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이란 나라와 영국인 사이에서 혼혈이 태어날 수 있었을까?
아프가니스탄은 19세기부터 영국과 제정러시아의 침략대상이었고,
1905년 영국의 보호국으로 지정되었고,1919년 독립을 했지만,
1979년 구소련군에 공격을,
2002년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나라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쯤되면 영국과 아랍의 혼혈이라는 게 일리있어 진다.
마이크 마튼의 동생 '테리마틴'은 저명한 대학교수로 아랍문제전문가이다.
'알이스라'라는 계획을 파헤치기 위해 스파이를 파견하는 문제에 있어,
'우리 형은 할 수 있는 데'라고 얘기를 해서 형을 다시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스파이를 부각시키기 위한 소설이거나,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를 근거로 한 거대한 태러를 부각시키기 위한 소설이 아니라,
아프간인의 일반적인 국민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쯤에서,아프간인의 일반적인 국민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 데...
자료를 찾아보니...남성우월주의와 혈연 부족에 의해서 좌지 우지됨이라고 나오는데...
'마이크마틴'의 경우,아내보다는 국가를 우선으로 하는 것이나(P128),
동생의 실수를 떠안고 '스파이'가 되는 것들이 다 들어맞는다.
책초반부에 마이크마틴과 어린 이즈마트 탄이 만났을 때,
'고문을 당해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새 친구를 배신하진 않을 것이다.그것은 규약이다.'
라고 다짐하는 부분도 아프간의 국민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리하여, '마이크 마틴'이 위장하여 '이즈마트 칸'이 되는 과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여기에 위장한 마이크마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조사하는 과정은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하여 스피디함을 십분 살려내고 때문에 긴장감이 한층 고조된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하여 얘기하려던 건 이게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내가 이 책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9.11테러로 쌍둥이 빌딩을 무너뜨린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나, '오사마 빈 라덴'을 숨겨준 '탈레반'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아프가니스탄'이 힘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였고,
영국도 구소련도 미국도...아프가니스탄을 자기네 통제하에 넣었을 때의 이득 때문에 오랜세월에 걸쳐 아프가니스탄을 건드린다.
힘이 없으면 계속 강대국의 이권에 의해 움직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아프간'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가족과 친지를 지켜준 알카에다나 탈레반보다는,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의 목숨을 앗아간 미,영 등 연합국을 향하여 증오와 복수심을 키우는 건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이크마틴이 스파이노릇을 수락한 것이...
이들로 대변되는 엄청난 테러를 막기위해서란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자기와 가족 혈연을 끔직히 여기는 '아프간'적인 국민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알카에다, 그중에서도 탈레반을 배격하는 것은,
그들의 과격함이 '자살테러'등으로 인간을 '인간병기'처럼 사용한다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보면,'이즈마트 칸'이나 '마이크 마틴'도 대테러를 막아내기 위하여 목숨이 안타까이 스러지기는 마찬가지이다.
표면적으로 보면,9.11테러 이후...거대한 푹탄테러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소수가 전사한 것이지만,
이 책에서 얘기하고자 했던 것은,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한사람 한사람 의 목숨이 다 소중하다는 게 아닐까?
이게, '아프간'에서 보여주려 했던 일반적인 국민성이 아니었을까?
이들이 내 주변의 또 다른 나는 아닐까?
그러고 보니,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책을 제법 읽었다.
한때는 참 좋아하고 열을 올렸었는데...요번엔 예전 같지는 않다.
'코브라'의 '옮긴이의 말'을 빌리면,
포사이스의 작품을 읽고 나면 마치 지평선 너머를 바라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작가가 지구 꼭대기에 올라앉아 세상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조곤조곤 얘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그의 넓은 시야를 만끽할 수가 있다. 그래서 포사이스를 읽은 사람은 다시는 그 이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고 한다. 일단 넓혀진 시야는 다시 좁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425쪽)
라고 되어있다.
관조적인 시야도 아니고, 지구 꼭대기에 올라앉아 세상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조곤조곤 얘기를 들려주는 거라니...'쫌' 멋지지 않은가?
하지만, '코브라'를 이해하기 위해 노 작가의 혜안을 닮으려고 나이를 먹을 수도 없고 말이다.
시간이 그렇게 그렇게 좀 지나가 주어야 하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