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정호승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설해목/정호승
천년 바람 사이로
고요히
폭설이 내릴 때
내가 폭설을 너무 힘껏 껴안아
내 팔이 뚝뚝 부러졌을 뿐
부러져도 그대로 아름다울 뿐
아직
단 한번도 폭설에게
상처받은 적 없다
별들은 울지 않는다/정호승
자살하지 마라
별들은 울지 않는다
비록 지옥 말고는 아무데도
갈 데가 없다 할지라도
자살하지 마라
천사도 가끔 자살하는 이의 손을
놓쳐버릴 때가 있다
별들도 가끔 너를
바라보지 못할 때가 있다
왼쪽에 대한 편견/정호승
한쪽 날개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겨울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가 더 아름답다
한쪽 어깨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더 아름답다
나는 젊은 마음의 육체를 지녔을 때부터 왼쪽 길로만 걸어가
지금 외로운 마음의 육체마저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멀리 사람을 바라볼 때
꼭 왼쪽에서 바라본다
왼쪽에서 바라본 사람의 옆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벽돌 /정호승
위로 쌓아올려지기보다 밑에 내려깔리기를 원한다
지상보다 먼 하늘을 향해 계속 쌓아올려져야 한다면
언제나 너는 발밑에 내려깔려
누구든 단단히 받쳐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어느날 너와 함께 하늘 높이 쌓아올려졌다 하더라도
지상을 가르는 장벽이 되길 바라지는 않는다
산성이나 산성의 망루가 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다
그저 우리 동네 공중목욕탕굴뚝이나 되길 바란다
때로는 성당의 종탑이 되어 푸른 종소리를 들으며
단단해지기보다 부드러워지길 바란다
쌓아올린 것은 언젠가는 무너지는 것이므로
돌이 되기보다 흙이 되길 바란다
밥 한번 먹자는 말을 인사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말하는 밥은 사심이 담긴 접대를 얘기하기 때문에,이들이랑 같이 밥먹는 자리가 편할 수만은 없다.
오래전부터 밥을 같이 먹자는 이를 크게 인심쓰는 양 따라 나섰다.
"이 밥은 우리 회사가 사는 게 아니라,내가 사는 거예요.
내가 평상시 먹는 것처럼,따뜻한 국밥 한그릇 먹자구요."
고급 레스토랑이나 고깃집 대신 시장에서 순대국 한그릇을 얻어먹었고,
100원 주고 자판기 커피를 한잔 뽑아 입가심으로 한모금씩 나눠 먹었다.
더 비싼 밥을 얻어먹고도 입을 잘 닦던 내가
밥값을 하려고 '밥값'시집과 애기들 보라고 동화책 몇 권을 구입하였다.
나는 너무 모진 사람도 싫지만,너무 착한 사람도 싫다.
정호승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착해지는 것 같다.
뭐랄까,두루두루 모두에게 착한 만병통치약 같다.
난 때로 때때로 나만을 위한 맞춤처방,맞춤 시 하나 정도 있었으면 좋겠다.
'벽돌'이라는 시를 읽다가 '테드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중 '바빌론의 탑'이라는 짧은 소설을 인용하면 이렇다.
이제는 왜 야웨가 탑을 무너뜨리지 않고,정해진 경계 너머로 손을 뻗치고 싶어하는 인간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는지를 뚜렷이 알 수 있었다.왜냐하면 인간은 아무리 오랫동안 여행을 해도 결국은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몇십 세기에 걸친 인간의 노력도 천지 창조에 관해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 이상의 것을 밝혀 주지는 않았다.그러나 인간은 그런 노력을 통해 상상을 초월한 야웨의 에술성을 흘끗 보고,이 세계가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를 깨달을 수가 있다.이 세계를 통해 야웨의 창조는 밝혖고,그와 동시에 숨겨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우주에서의 자기 위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