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墨정원 9
-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장석남-

**
사람들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장석남의 이런 시풍을 좋아합니다
번진다.. 이 말을 꽤 오랫동안 입안에서 굴려봤어요
어감이 그리 좋은 건 아니지만 의미심장하죠?
내 열정이 번져 아이들을 바꾸기도 하고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번져 다른 사람을 아프게도 하고
슬픔이 번져 죽음으로 가는 길을 만들기도 하고
사랑이 번져 세상을 아름답게도 합니다

내가 뻗은 팔과 다리와 온 몸에 난 촉수들은
어디를 향해 번지고 있는 중인지.
혹여 남을 싫어하는 마음과 미움, 질투, 시기들이
사랑을 제쳐두고 저만 앞서 번지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차분하게 앉아 먹물 곱게 갈고
화선지 가득 먹빛이 우아하게 번지는 걸 보고 싶습니다.
어둠이 그렇게 번지고 있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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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1983.12.6 너의 마니또 경원.
참 오래된 책입니다. 누렇게 바래서 글씨마저도 희미하게 보입니다
마니또. 한참 유행하던 거였는데 해보셨나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다닐 때였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걸 알고 이 친구가 시집을 선물했지요.
표지 안 쪽에 타는 듯한 눈빛을 하고 긴 생머리를 한 그녀,
강은교에 매료되어 시도 그렇게 마음에 들어했답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생동감이 가득했던 그녀도
이젠 할머니가 되었겠네요. 45년 생이니.

'내가 죽으면 물이 되어 네 곁으로 흐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친구에게 이런 얘길 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증기가 되었다가 비로 내리고
다시 물이 되어 강으로 바다로 흐르면서
그렇게 그 친구 주변을 맴돌고 싶었던 기억
따뜻한 기억이네요.
그 친구가 그리운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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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도종환-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
비가 많이 내립니다.
바람이 너무 스산하게 불어 가을비같습니다.

수국은 장마의 시작을 알린다지요.
여름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면 서늘한 광 근처
수국과 더불어 피기 시작하던 봉숭아 가녀린 다리가 생각납니다
아니, 봉숭아가 먼저였는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수국보다 한참 늦게 나오는지도 모르구요.
거기 그렇게 서서 언제 피는줄도 모르게 피었다가 지는 꽃이었으니..

더워서 이리저리 뒤척이게 되는 그런 밤이면
낮에 백반 섞어 꽁꽁 찧어 두었던 봉숭아 꽃잎을
손톱에 한웅큼씩 올려놓아 잎으로 싸고 실로 동여맨 후
열 손가락을 최대한 이불과 멀리 두고 움직이지 않고 자려고
애쓰며 키득거렸었지요.
하지만 아침이면 손톱에서 빠져나온 봉숭아꽃잎들이 시커멓게 죽어
이리저리 이불이며 옷이며 방바닥에 패잔병처럼 널려있어
엄마 보기전에 부리나케 지우려고 허둥대던 기억이 선합니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 봉숭아 물이 손톱 끝에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그 설레는 말 때문에 해마다 꽃물을 들였지만
겨울이 오기도 전에 늘 말끔하게 사라져 아쉬움을 주었지요.

길어진 손톱을 자르려고 손톱깎이를 찾다가
어떤 색깔로도 채워지지 않고 윤기없이 투박한 내 손톱을 들여다봅니다
반지를 끼워주기에도 어색한 못생긴 손이지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가여운 생각이 듭니다.
올 여름엔 잊지 않고 봉숭아물이라도 들여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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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소파를 위한 연가
-이미란-

머지않아 나는 너를 버릴 것이다
너는 이제 너무 낡았고 너의 숨결 또한 너무 낡았다
네가 처음 내게로 왔을 때
나는 흐뭇했고 기쁘게 너를 바라보았다
너는 제법 육중했고 품위가 있었고
너 나름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
세월은 흘렀고 우리는 서로를 길들여 갔다
네 위에서 차를 마셨고 네 위에서 책을 보았고
네 위에서 낮잠을 잤고 네 위에서 노래를 불렀다
세월은 계속 흘렀고 서서히 우리도 지쳐 갔다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내 안의 요구를 감당하기엔
너는 이제 너무 낡았다 더 이상의 안락함이 없다
머지않아 나는 너를 버릴 테지
또 다른 처음인 안락함에 허전했던 등을 묻고
목청을 가다듬어 흐르는 세월의 노래를 부르겠지
그렇게 너와 함께 했던 즐거움의 시절을 잊고
조금씩 나의 꿈도 낡아 가겠지
뒤틀린 용수철의 생으로 지상의 문 밖으로 밀려날 테지
내가 너를 그랬듯 나 또한 미련 없이 잊혀질 테지

***
이 시인은 몇 년전 사석에서 만나 안면을 트게 되어
가끔 볼 때마다 웃음만을 주고받는 언니뻘되는 시인입니다.
시집이 나왔을 때 첫 장에 적혀 있던 이 시가
어제, 오늘 새삼 생각이 나서 다시 훑어보았습니다.
시 안에 감춰진 무언가가 있거나 가슴을 꿰뚫는 큰 감동은 없어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귀절이 있네요.

'세월은 계속 흘렀고 서서히 우리도 지쳐 갔다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내 안의 요구를 감당하기엔
너는 이제 너무 낡았다 더 이상의 안락함이 없다
머지않아 나는 너를 버릴 테지'

내가 버리고 떠나는 것
내가 버려지는 것
모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분상의 묘한 차이는 있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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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가는 길 - 유배시첩 1
-고두현

물살 센 노량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
선천(宣川)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 날인가.
윤삼월 적은 흙길을
수레로 천 리 뱃길 시오 리
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
석양에 비친 일몰이 눈부신데
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
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
꽃 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
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
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
화전(花田)을 만들고 밤에는
어머님을 위해 구운몽을 엮으며
꿈결에 듣던 남해 바다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 앵강은 서포 김만중이 만년에 유배 살던 남해 노도 앞 바다 이름이다.

***
워낙 모든 멀미와 친한 지라 배를 타고 유유자적
섬이 꽃같은지 아닌지 즐길 여유를 부려보지 못했으나
한 번쯤은 멀미를 까맣게 잊고 산으로 물로 풀로 그렇게
있는 그대로 느껴보고 싶어집니다.

중학교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한문시간에 각주구검을 배울 때였지요.
모두들 어리석다고 했던 그 얘기가 이상했습니다.
어리석다기 보다 너무도 감상적인 그 사람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면서,
혹은 바다를 건너가면서 그걸 해볼 생각입니다.
바다 한 가운데 쯤에 내가 아끼던 귀고리 한짝 떨어뜨리고
뱃전에 표시를 할 겁니다.
그 다음달 다시 배를 타고 그 언저리를 지나며
귀고리를 가져오겠다는 생각만 갖고 바다에, 강에
뛰어들어 다시는 올라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올라오지 못하겠지요. 수영은 못하니까.

물은 참 무서워하는데 가끔 물의 유혹을 느낍니다.
태종대에 가면 자살바위가 있어요.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 위에서 한참동안
소용돌이 치는 좁은 물살을 황홀하게 쳐다본 게 생각나네요.
그 물은 저를 유혹하고 있었는데 무섬증이 나를 버티게 했지요.
또 한 번은 밤의 월미도에서
검은색 천을 깔아놓은듯 편편하고 말랑하게 굳어보이는 그 물살이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난간을 기어오르는 게 귀찮아서
이번엔 게으름이 나를 구했지요.

한동안 산이 그리웠는데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밤엔 바다가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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