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1983.12.6 너의 마니또 경원.
참 오래된 책입니다. 누렇게 바래서 글씨마저도 희미하게 보입니다
마니또. 한참 유행하던 거였는데 해보셨나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다닐 때였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걸 알고 이 친구가 시집을 선물했지요.
표지 안 쪽에 타는 듯한 눈빛을 하고 긴 생머리를 한 그녀,
강은교에 매료되어 시도 그렇게 마음에 들어했답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생동감이 가득했던 그녀도
이젠 할머니가 되었겠네요. 45년 생이니.
'내가 죽으면 물이 되어 네 곁으로 흐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친구에게 이런 얘길 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증기가 되었다가 비로 내리고
다시 물이 되어 강으로 바다로 흐르면서
그렇게 그 친구 주변을 맴돌고 싶었던 기억
따뜻한 기억이네요.
그 친구가 그리운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