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도종환-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
비가 많이 내립니다.
바람이 너무 스산하게 불어 가을비같습니다.
수국은 장마의 시작을 알린다지요.
여름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면 서늘한 광 근처
수국과 더불어 피기 시작하던 봉숭아 가녀린 다리가 생각납니다
아니, 봉숭아가 먼저였는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수국보다 한참 늦게 나오는지도 모르구요.
거기 그렇게 서서 언제 피는줄도 모르게 피었다가 지는 꽃이었으니..
더워서 이리저리 뒤척이게 되는 그런 밤이면
낮에 백반 섞어 꽁꽁 찧어 두었던 봉숭아 꽃잎을
손톱에 한웅큼씩 올려놓아 잎으로 싸고 실로 동여맨 후
열 손가락을 최대한 이불과 멀리 두고 움직이지 않고 자려고
애쓰며 키득거렸었지요.
하지만 아침이면 손톱에서 빠져나온 봉숭아꽃잎들이 시커멓게 죽어
이리저리 이불이며 옷이며 방바닥에 패잔병처럼 널려있어
엄마 보기전에 부리나케 지우려고 허둥대던 기억이 선합니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 봉숭아 물이 손톱 끝에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그 설레는 말 때문에 해마다 꽃물을 들였지만
겨울이 오기도 전에 늘 말끔하게 사라져 아쉬움을 주었지요.
길어진 손톱을 자르려고 손톱깎이를 찾다가
어떤 색깔로도 채워지지 않고 윤기없이 투박한 내 손톱을 들여다봅니다
반지를 끼워주기에도 어색한 못생긴 손이지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가여운 생각이 듭니다.
올 여름엔 잊지 않고 봉숭아물이라도 들여줘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