耳鳴을 따라서

-장석남

 

무엇하러 나는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시퍼렇게 번져오는 새벽 유리창을 쳐다보다 나는

내 귀에 살고 있는 耳鳴을 따라나서기로 한다

깨어 있는 새벽에만 오는 손님이기에

멀리서 온 손님이기에 나는

조급하다 그것은 미숙한 사랑이다

조급한 손길, 떠는 음성, 그리고 조급한 구애 직전의

아슬아슬한 망설임

얼음보다 더 차가운 연못 물 같은 절제

늦추위에, 일찍 꽃망울 맺은 나무의 가지들은

몰래 밭은기침을 한 말(斗)이나 쏟아낸 듯 새파랗다

耳鳴은 조용히 조용히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고 뜰을 나선다

그리고 저 조급의 풍경을 지나서 나를 끌고는

팔당으로도 가는 또는 새벽 순댓국집으로 가는 듯

그러나 나는 좀 근사한 도둑이라도 되어서

물욕을 버리고 싶지 않고

성욕을 버리고 싶지 않고

정치를 버리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너를 버리고 싶지 않다

너,

너,

너,

너,

너, 너.

 

육신을 끌고 육신 밖으로 나가는 길을

나는 배운 바 없어

육신을 끌고 육신 안을 떠돌 뿐

복숭아가 복숭아를 끌고 복숭아를 떠돌 뿐

마당이 마당을 끌고 마당을 헤맬 뿐

밀물이 밀물을 이끌고 썰물을 헤맬 뿐

 

새벽 별빛은 점점 옅어진다

조금씩 핏기가 가시는 마흔

耳鳴은 나를 데려다가 오래 깨인

창백을 보여주려는 듯

하지만 나는 눈감을 수 없다

차가운 꽃나무도 어떤 耳鳴을 따라온 거겠지

사랑의 조급을 따라온 거겠지

그러나 지금은

망설임의 시절!

얼음보다 더 차가운 연못 물 같은 절제!

육신을 끌고 육신 밖으로 나가는 길을

배운 바 없어 나는

배운 바가 없어 耳鳴 끝으로 다시

돌아오고

돌아온다

 

*****

耳鳴은 내게 친숙하다

耳鳴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깊이 숨을 내쉬고

깊이 숨을 들이쉰다.

이 시인처럼 누군가가 나를 찾아온 것 같아서.

 

윙윙 울려대는 그 소리가 내 안에서 나를 불러대는

또 다른 나 같아서

쉽게 버리지 못하고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가 조용히 물러갈 때까지 곁에 앉아있다

 

전에는 내 안에서만 耳鳴을 들었는데

요새는 다양한 곳에서 그 소리가 들린다

나를 부르는 소리들

 

그 소리를 따라가면 어딜 가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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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ㅣ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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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영화가 원작을 고스란히 살려내진 않지만 얼마 전에 봤던 '나는 전설이다'라는 영화는

책에서 소스만 뽑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보는 느낌이다.

이 책은 1976년 1월부터 1979년 1월까지 약 3년 간 로버트 네빌이 겪은 투쟁의 역사라고 볼 수 있는데

미래가 가진  불투명성 때문인지 작가들은 항상 무겁고 두렵고, 혼탁한 시기로 미래를 상상한다.

이 책을 쓴 게 1954년이라 하니 그가 봤을 때 약 20년 후 미래의 모습이 이렇게 끔찍하고

암울한 시대가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것이겠지.

 

흡혈귀와 좀비가 판을 치는 영화는 이제 식상할 때도 됐지만 이 책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혼자 살아남아 외로움 때문에 차라리 그들 손에 죽을까 매일 밤 고민하면서 술로 위안을 삼으려 하고,

비쩍 마르고 못 생겼지만 친구가 되어 줄 것 같았던 개를 잃은 순간에 그가 느낀 공허감은

인간이란 존재가 결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문득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는 없다.

흡혈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파괴되어야 할 아나테마(가톨릭에서의 저주)이자 검은 공포였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다수가 지배하는 곳에 끼여있는 소수는 살 권리조차 없다.

며칠 전 자살했다던 베트남 신부 이야기가 떠오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시위현장을 덮친 경찰들의 이야기도 생각난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많은 '로버트'들에게 환약을 빨리 삼키라고 종용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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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톨이 동물원 ㅣ 일공일삼 47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허구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비룡소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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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을 보고 허겁지겁 달려들어 정신없이 움켜쥔 모양새와 비슷했을 것 같다.

'하이타니 겐지로'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어두운 얼굴을 한 아이 하나가 우리에 갇혀있는 표지의 답답함을 헤아려 볼 새도 없이

그저 반가운 마음에 무턱대고 집어 들고 온 내 모습은.

5편의 이야기 모두 보는 내내 누군가가 슬그머니 내 입꼬리를 치켜올리는 듯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져 따뜻함이 퐁퐁 샘솟았다.

그리고나서 앞 뒤를 뒤적여가며 작가의 말을 읽고 앞장에 놓쳤던 글을 발견했는데

겐과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설교하는 투가 되어 쑥쓰러워진

<외톨이 동물원>의 가메야마 씨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한 이 글은

매일 지나는 길목이라 신경쓰지 않고 있던 맛있는 찻집을 우연히 발견한 기분이랄까?

너희가 모르는 곳에

갖가지 인생이 있다.

너희 인생이

둘도 없이 소중하듯

너희가 모르는 인생도

둘도 없이 소중하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모르는 인생을 사랑하는 일이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다가 무심코 찰칵찰칵 찍어대는 사진 속 숨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작은 사건 하나 하나를 아주 감칠맛나게 이야기해주는 작가가 너무 좋다.

기저귀를 차고 6학년 교실을 벌벌 기어다니는 '기저귀'도 보이고,

밋짱을 경찰서에서 꺼내기 위해 대나무 잠자리를 날리는 아이들의 결의에 찬 얼굴도 보이고,

외톨이인 자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비단뱀 우리에 들어가 토끼를 구해내는 가메야마 아저씨의 모습도 보인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봄에 날아오는 황사처럼 버석버석한 가슴을 가진 어른들도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초등학교 3학년 이후가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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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의 마을을 꿈꾼다

-유하

 

내 몸 물처럼 출렁이는 꿈을 꿉니다

내 몸 그대에게 물처럼 흐르는 꿈을 꿉니다

나 그대 앞에서 물처럼 투명한 꿈을 꿉니다

물처럼 투명한 내 몸 속, 물처럼 샘솟는 내 사랑 보입니다

내 사랑에 내가 놀라 화들짝 물방울로 맺힙니다

드맑은 그리움 온통 무거워지면

물방울로 맺힌 내 몸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수만 가지로 샘솟는 길을 따라 내가 흩어져 흘러갑니다

그러나 물방울의 기억이 그대 눈빛처럼 빛나는 시냇가에

내 사랑 고요히 모이게 합니다

오오, 달비늘로 미끄러지는 내 사랑

갈대 밑둥을 가만히 흔들고 지나갈 뿐입니다

바위 틈에 소리없이 스미고 스밀 뿐입니다

내 몸 투명한 물이기에

이 세상 어느 것보다 낮게 흐릅니다

이 세상 모오든 것을 비켜갑니다

그대마저도 비켜갑니다

그 비켜감의 끝간데, 지고한 높이의 하늘이 있습니다

놀라워라, 그 순간 그대 가슴속에 끝없이

범람하고 있는 내 사랑 봅니다

나 그대 몸 속에서 오래도록 출렁입니다

나 그대 시내 같은 눈을 보며 물의 마을을 꿈꿉니다

그 물의 마을, 꿈꾸는 내 입천장에서 말라붙습니다

내 몸 물처럼 출렁이다 증발되듯 깨어납니다

오늘도 그대를 비켜가지 못합니다

 

****

어젯밤, 수영도 못 하는 내가 물 속에 들어가

허우적대다 급기야 기절하는 꿈을 꾸었다.

감기 걸려있어서 그런 꿈을 꾼 것일까?

물을 너무나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무서워하는 나는

이런 꿈에 약하다

 

물은 회귀본능을 나타낸다고도 하는데

난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은 걸까?
언제나 현실도피적인 나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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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한 켤레의 시

-곽재구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쑥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 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점 꾸려주지 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

'나는 오늘 아침 신발이 되었다'

어제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주문한 것이다.

신발이 되어 하루를 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이들 대답의 대부분은 고린내에 집중되어 있었다

지저분한 것 말고도 할 말이 많을 텐데

나는 그게 좀 아쉬웠다

아이들의 상상력 부재.

 

오늘 아침 이 시를 만나면서 나는 내 구두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내 구두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내가 가는 길을 마다 않고 묵묵히 따라와 준 것에 감사하고

내 발이 아프지 않게 보호해 준 것을 감사하고

내 발에 맞춰 움직여주는 것으로 더 먼 길을 탐사할 수 있게

해 준일에도 깊이 감사하고 싶어졌다

걷는 일을 행복하게 느끼게 해 준 것에 제일 큰 점수를!

 

'어떻게 이런 표현들이 나오지?'

이렇게 감탄을 하느라고 나는 내 시를 쓰는 일에 게으르다

남이 내가 쓰려는 표현을 몽땅 해놓았기 때문에

늘 뒤쳐져서 감탄하고 좋아하다가 슬그머니 연필을 놓아버리는 것.

 

내 구두는 오늘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낄까?

구두의 주인인 나도 못 보는 걸 보고 말해주면 좋을텐데

주인이 게을러서 놓치는 그 많은 것들을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게 가만히 속삭여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혹시 알아?

내가 오늘 근사한 시 한 편 쓰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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