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한 켤레의 시

-곽재구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쑥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 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점 꾸려주지 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

'나는 오늘 아침 신발이 되었다'

어제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주문한 것이다.

신발이 되어 하루를 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이들 대답의 대부분은 고린내에 집중되어 있었다

지저분한 것 말고도 할 말이 많을 텐데

나는 그게 좀 아쉬웠다

아이들의 상상력 부재.

 

오늘 아침 이 시를 만나면서 나는 내 구두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내 구두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내가 가는 길을 마다 않고 묵묵히 따라와 준 것에 감사하고

내 발이 아프지 않게 보호해 준 것을 감사하고

내 발에 맞춰 움직여주는 것으로 더 먼 길을 탐사할 수 있게

해 준일에도 깊이 감사하고 싶어졌다

걷는 일을 행복하게 느끼게 해 준 것에 제일 큰 점수를!

 

'어떻게 이런 표현들이 나오지?'

이렇게 감탄을 하느라고 나는 내 시를 쓰는 일에 게으르다

남이 내가 쓰려는 표현을 몽땅 해놓았기 때문에

늘 뒤쳐져서 감탄하고 좋아하다가 슬그머니 연필을 놓아버리는 것.

 

내 구두는 오늘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낄까?

구두의 주인인 나도 못 보는 걸 보고 말해주면 좋을텐데

주인이 게을러서 놓치는 그 많은 것들을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게 가만히 속삭여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혹시 알아?

내가 오늘 근사한 시 한 편 쓰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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