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꿈에 보는 

                         -신경림

 

 

복사꽃이 피어 있었을 거야.

장마당 앞으로 길게 강물이 흐르고 강물 위로는 안개가 피어나고.

사람들은 모이고 흩어지면서 웅성웅성 뜻 모를 말들을 주고받고

나는 덜렁덜렁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면서 즐거워도 하고 슬퍼도 했지.

어디선가 물새도 울었어, 아침인데도 닭들이 홰를 치고.

나는 노새였던가, 아니면 나귀였던가.

 

어쩌다 꿈에 보는 이것이 내 전생일까!

 

나는 나무가 되는 꿈을 꾸는 일도 있다.

낮이고 밤이고 여름이고 겨울이고 바람과 눈비에 시달리면서

안타까이 그 전생의 나만을 추억하고 있는 꿈을.

조금은 거짓되기도 하고 또 조금은 위선에 빠지기도 하면서

그것이 부끄러워 괴로워도 하고 또 자못 안도도 하던 전생의,

그것이 억울하고 한스러워 밤새 잠을 이루지도 못하던

그 전생의 나만을 추억하고 있는 나무가 되는 꿈을.

 

어쩌다 꿈에 되는 이 이 나무가 내생일까!

 

**

 

사실 마지막 행은 어쩌다 '꿈에 보는'이 아닐까..생각하면서 읽지만

그게 사실 '꿈에 되는'이라고 해도 별 지장은 없으니 패쓰~

이 시가 실려있는 <낙타>에는 신경림 시인의 친필사인이 들어있어서

송구스런 마음이 앞서니 조심스레 읽게 되는 시집이다.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라 아침자리가 뒤숭숭할 때도 참 많다.

요 며칠 죽는 꿈을 연속으로 꾸면서 꿈에서조차

"또야?"라고 느낄 정도니 강박관념이 작용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 전생이 무엇이었건 그건 상관 없다.

나는 來生에서는 사람이 되고프지 않다.

될 수만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미류나무가 되어

땅속 깊이 묻은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어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바람에게 몸을 맡겨 흔들려보고 싶다.

오늘 밤 꿈에는 미류나무가 된 나를 만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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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을 보며 

                               -유하

 

시푸른 청개 가실 날 없네

잘 날 없는 바람 매질에

분주히 등 굽혀가며

등 굽혀가며

시푸른 청개 가실 날 없네

 

그러나 그 어떤 삶이 있어

저리도 옹골차게 울창하리

구부러짐으로 온전할 줄 아는

청개든 지혜여

 

나도 대숲으로 가 대숲처럼

온몸으로 구부러지는 법 배우고 싶네

청개들도록 울창하고 싶네

 

*청개: 멍

 

 

****

 

쿠궁..하는 소리에 깨어 창밖을 내다보니 건너편 지역에 정전이 되었는가

이른 아침이라 분명 불빛이 하나둘 쯤은 보일 터인데 버리고 간 집마냥

온통 다 시멘트 색깔들이다.

작은 일에도 활들짝 놀라기를 잘하는 내 간은 벌써 십 리 아래로 도망가버려

내것인지 남의 것인지 감각도 없다가 다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반복되자

아예 집을 나가버렸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긴 하나 딱히 물어볼 곳도 알아낼 방도도 없어

그저 내 집 전기가 여전히 흐르고 있음에 감사하며 인터넷을 켰다.

새로운 소식이 없는 걸 보니 큰 일은 없는 것 같군.

안도하며, 잠을 더 자려고 했지만 제 주인을 닮아 소심한 잠도

겁이 많아 도망가버려 살금살금 걸어가 커피 한 잔을 내려들고

영화 한 편을 봤다.

 

The Music Never Stopped

20년 전 집을 나간 아들이 뇌종양에 걸렸다는 소식이 어느 날 들려오고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에 치명적인 손상이 있어 20년 전 그때 이후 일들은

물론 지금 방금 일어난 일들도 전혀 기억을 못하는 상태.

아들이 하고 싶어하던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는 음악으로 치료가 가능하단 걸 알고

그 이론을 써낸 교수에게 부탁을 하게 된다.

전혀 반응이 없던 아들은 그때 좋아하던 음악을 들으면서 아버지와 조금씩

대화를 하게 되고 자기가 듣던 음악만이 진정한 음악이라 했던 아버지는

아들이 왜 그런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그 음악은 어떤 뜻을 가졌는지를

알아간다.

그러다가 아들이 제일 좋아하던 그룹 공연 티켓을 극적으로 손에 넣게 되어

둘이서 공연장을 찾아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맞는 아버지의 죽음. 결국 아들은 공연장에서 보낸 그 시간을 기억하며

아버지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린다.

 

이 시를 읽는 순간 그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가 아끼던 음반을 갖다 주고 그 당시 아들이 즐겨들었던

음반으로 바꾸어 노래와 가사를 모두 익히던 사람.

부모 말고 어떤 누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집 나간 아들의 생사도 몰라 애를 태우다가 겨우 찾은 아들이 뇌종양에 걸려

방금 전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고

심장이 언제 멈출지 몰라 의사가 만류하는 공연에 아들과 대화하고 싶다는 이유로

찾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부모님이다.

 

나는 아직 이런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해 늘 아들과 부딪히고 있지만

청개들어도 좋으니 언젠가는 울창한 대숲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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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을 생각함 

 

                           -윤제림

 

 

 

친정에 다니러 온 딸과

엄마가 마루 끝에 나란히 누워

서로의 얼굴에 부채질을 한다

치우지 못한 여름 습관이다.

 

무슨 이야기 끝인지 한 사람이 운다

나쁜 습관이다

 

오래 울진 않는다

해가 짧아졌구나, 저녁 안쳐야지

부채를 집어던지며 일어선다

엄마의 습관이다

 

가을이다.

 

 

**

 

바람이 잔뜩 성이 난 모양이다.

누가 11층까지, 아니 25층까지 만들어놓으랬냐고 골을 내고

투덜대며 올라오니 소리가 시끄럽다.

거 참 점찮지 못하게.

한 마디 하는 화분을 냅다 집어 던지는 몽니까지 부리는 걸 보고서야

나는 문을 닫았다.

하루 새에 가을이 왔구나.

인식하는 순간,

울컥 눈물이 난다.

 

습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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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 不惑, 혹은 부록 附錄 

 

                            - 강윤후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봄이 온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부록에서 맞는 첫 봄이다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

 

밥통을 닦아서 물기를 없애려고 뒤집는 순간

손목이 시큰거린다.

오른손잡이라고 이놈만 마구잡이로 부려먹어서 그런가보다.

손가락도 마디가 더 굵고 쪼글쪼글 주름도 더 많이 잡혀있다.

가련한 것!

친구들끼리 우스개소리로 종합병원 다 됐다고 하곤 하는데

요즘엔 진짜로 고장나는 데가 늘어났다.

부록으로 살고 있어서 그런가.

누가 찢어서 딱지로 만들기 전에

오공본드 듬뿍 발라서 본 책에 단단히 붙여야겠다.

우선 손목에 파스 한 장 발라주고

그 다음에 가야 할 병원이 어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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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모노레일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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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김중혁답다.

김영하 이후 다시 만난 신선하고 발랄한 작가.

문제가 발생하면 풀기보다는 엉뚱한 해답을 내놓고 시치미 떼기

-가령 달리는 기차 안에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는데

기차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0호차에서 빨간 제복을 입은 특별기동검표반

44번이 나타나 순간적으로 구해준다던지-

볼교라는 걸 창시해놓고 그럴싸하게 구라(?)를 풀어내기

-우주는 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형제님, 주위의 자연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모든 것이 볼이고 원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원리죠. 하지만 인간들을 보십시오.

인간들은 끊임없이 사각형의 물건들을 만들어냅니다.

수많은 모서리를 만들면서 우주에다 흠집을 내고 있습니다..-

등이 특기다.

 

어쩌면 이 작가는 밥 한 숟가락을 먹다가, 혹은 코를 한 번 후비다가,

술을 한 잔 마시다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몽땅 엮어

이 책을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인 모노가 자신이 만든 '헬로, 모노레일' 게임을 그대로 현실에서 하듯

주사위를 던져 여행지를 선택하고 급작스럽게 일정을 변경하는 일 따위가

볼교를 위해 가출을 해버린 고갑수 씨가 믿는 볼을 닮았다.

어디로 튈 지 모른다.

우연은 남발하고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은 난무한다.

그런 면에서는 로알드 달을 닮았다.

그런데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가 난다거나 짜증이 나는 일은 없다.

 

어떤 숫자가 나오든 상관없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

주사위는 공평한 거니까.

 

1의 반대쪽에는 6이 있고

2의 반대쪽에는 5가 있고

3의 반대쪽에는 4가 있으니까.

 

이제는 내가 던질 차례다.

 

작가가 한 말처럼 이제는 독자의 몫이 된 거다.

내가 어떻게 읽든 그뿐이다.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그럼,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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