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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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와 함께 만든 출판사가 내놓은 첫 작품이라고 했다.

일단 그의 안목을 믿기로 했다.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는 소녀 이야기'라는 부제는 순간적으로 '야생'을 스치게 했으나,

제목 자체는 플로렌스 하이드의 ≪줄어드는 아이≫가 겹쳤다.

https://blog.naver.com/wall612/80098060495

잡아당기는 듯한 숲속으로부터 빨간 옷을 입은 소녀가 뛰어나오는 표지 그림이 불길하다.


그리고 또 하나 지은이 소개글 (평소에는 잘 인용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꼭 필요하므로)



이것으로 완벽한 흥미유발 성공이다.

이 책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해나가는 모드 쥘리앵의 에세이지만

도저히 있으면 안 되는 이야기이기에 끝까지 소설로 장르를 바꿔 읽어야만 했다.

어린 시절 그 역시 아버지에게 선택되어 대학까지 마쳤지만 그 모든 것은

남편이 된 그 남자에게 자식을 낳아주고 그 자식에게 교육을 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끝까지 자식을 사랑할 줄 몰랐던 그 어머니조차 이런 말로 아이를 겁주기 일쑤다.

네가 거짓말을 하면 난 곧바로 알 수 있어.

내일 아침 네 아버지가 죽어있을 테니까

193쪽

아버지란 사람은 또 이런다.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중대한 과오다. (84쪽)

오염된 인간들이 절대 너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알아야 한다

(37쪽)

그래서 모드는 방에 난방은 꿈도 못 꾸고, 캄캄한 지하실에 홀로 남아 쥐들이 돌아다니는 걸 견뎌야 하고, 밥도 15분 안에 급하게 먹어야 하고, 안 맞는 구두라도 1년 내내 신어야 하며, 기계체조를 배우고, 싫은 악기들을 배우고, 잘 씻지도 못하고, 읽고 싶은 책도 마음대로 못 읽으며, 아침마다 제일 먼저 일어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깨우고, 아버지가 소변을 볼 때 병을 드는 시중도 들어야 했고, '6시에 일어나서 밤 11시 30분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 일과를 빈틈없이 정확히 지켜야(96쪽)' 했다.

이 모든 것들은 프리메이슨이었던 아버지가 성전 건축 책임자였던 히람의 환생이라고 믿는 데서 출발한다.

히람의 죽음은 나에게도 절망을 안겼다. 그가 비겁한 동료들에게 배반 당해서 죽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는 정상적인 삶을 살았을 테고, 그러면 나도 세상을 구원하라는 내 능력 밖의 임무를 맡지 않았을 것 아닌가

179쪽

따뜻한 말 한 마디, 포옹 한 번이 그리운 아이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집에서 키우던 동물들이다. 린다라는 개와, 아르튀르라는 말, 망아지 페리소, 우연히 돌봐준 비둘기, 오리들..그들이 있어 그녀는 죽음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노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몰래 보던 책들 (아홉 살 나이에 읽은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재미있었다고 하는 그녀의 말이 충격적이었지만)은 숨 쉴 구멍을 마련해주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구원해준 건 역시 몰랭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다. 됭케르크에서 제일 좋은 악기점을 운영했던 몰랭 씨가 중형그랜드 피아노를 사려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집에 왔을 때부터 모드의 앞날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한 눈에 사정을 짐작한 그로 인해 모드는 비로소 음악에 취할 수 있었고 시내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릴 수도, 마침내 악몽같은 집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니까.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과거는 수면 위로 올라와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힌다.

나에게는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고, 되풀이할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난 뒤, 내 안에 남아 있던 두려움들이 결국 나를 장악해버렸다. 더이상 유년기의 상처를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315쪽

보이는 상처는 치료가 쉽다. 괜찮게 보이지만 내부에서 곪은 이런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해댄다.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다정한 포옹이, 잘 들어주는 태도면 된다는 것 역시 알면서도 안 한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이러지 말자.

그 어떤 출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철저히 혼자가 되어 갇혀 있다고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김영하 추천의 말 중에서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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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버스의 극장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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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버스의_ 극장』, 필립 로스 글,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펴냄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의 삶은 무엇으로부터의 기나긴 도주인가? 206쪽‘

도입부부터 쉰두 살의 정부 드렌카가 예순네 살의 애인인 새버스에게 ’다른 여자들하고 박고 다니는 걸 그만두겠다고 맹세해라. 아니면 연애는 끝이다‘라고 통보하는 걸 듣는 순간 머리가 띵해지더니 읽어갈수록 가관이다. 이 외설적이고 미친 놈이 하는 소리 같은 글들이 700쪽이나 이어지면 어쩌지? 결국, 중간에 다른 책들을 읽는 것으로 정신을 수습해가며 사흘 만에야 간신히 다 읽었다.

’걸어 다니는 외설 찬양…(중략) 신성 모독을 설파하는 전도된 성자. 1994년에는 좀 지겨운 것 아니야. 그 반역자-영웅이라는 역할이? 섹스를 반역으로 생각하기에는 얼마나 이상한 시기인지. 558쪽.‘

’하지만 왜 굳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거예요? 원초적 감정과 품위 없는 언어와 질서 잡힌 복잡한 문장. 534쪽.‘

새버스 친구인 노먼과 그의 아내 미셸의 말들은 새버스를 정의하기에 아주 적합한 듯 들린다. 첫 번째 부인인 니키는 실종되고, 애인이었던 드렌카는 암으로 죽고, 두 번째 부인인 로즈애나는 알콜 중독, 캐시는 그를 고발하고, 형은 전사, 어머니는 형의 죽음으로 정신을 놓고 살다가 죽고. 음울하게 그의 인생 저변을 도는 죽음과 실종, 상실. 시작은 무엇으로도 치유되지 못한 형의 죽음이었지만 그를 미치게 만든 건 바로 드렌카의 죽음이다.

’그는 전혀 자비롭지 않은 자기 분열과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324쪽‘

이러한 정신 상태에서 그는 드렌카를 추억하고, 형을 추억하고, 어머니와 젊은 시절을 추억하며 죽음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친구 부인에게서 훔친 돈으로 자기가 묻힐 묘지를 사고, 묘석을 사고 묘석에 새길 말까지 작성했건만 결국 자살에 이르지 못한다.

로즈애나가 한 말’사람은 비밀만큼 병이 들어 147쪽 ‘ 처럼 새버스는 혼자 간직한 비밀 때문에 힘들었고 아팠지만, 드렌카 죽음 이후 방황하며 깊숙한 곳에 숨겨둔 그 많은 비밀들을 수면 위로 올라오게 했으니 스스로 치유한 셈이다. 앞으로 몇 년간은 그저 증오하며 살아갈 것이다.

좀 더 순화된 표현을 썼다면 읽기엔 편했을 테지만 작가의 의도는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해서 놀랐다. 꽁꽁 싸매두었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그것들. 누구나 말하고 싶지만 점잖은 척하기 위해 내보이지 않는 것들을 작가는 순수한 욕망으로, 포장되지 않은 날 것의 심리로 자유분방하게, 과감하게 표현했으니 시원했으리라.

분명한 것은 『에브리맨』의 필립 로스를 내가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죽음에 관한 고찰‘ 중 부드럽고 점잖은 쪽이라고나 할까? 더불어, 미하엘 엔데의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이 생각난 것은 손가락 인형으로 무대를 꾸렸던 미키 새버스와 작은 목소리로 인하여 배우가 못 되고 무대 아래서 대사를 불러주는 일을 해야만 했던 오필리아가 자연스레 연결된 탓도 있지만, 드렌카의 죽음 이후 방황하며 무대도 없이 자신의 인생을 보여준 새버스의 극장이 중첩된 까닭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미하엘 엔데와 필립 로스의 두 작품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아주 웃기는 짓이긴 하지만 이걸 읽으면서 떠오르는 걸 무시하기도 어려워 다시 읽어봤다. 프리드리히 헤헬만의 그림으로 베틀 북에서 만든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은 여전히 아름답고 따뜻했다.

늙고 병들어 극장을 떠나게 된 오필리아 앞에 주인을 잃은 그림자들이 찾아오고 그들을 맞아들여 연기를 가르치고 공연을 하며 남은 생을 살다가 마지막 그림자인 ‘죽음’을 맞아들인다는 이야기. 새버스에게 지친 마음을 위로받는 느낌이니 이 책을 읽은 뒤 나처럼 힘들었다면 오필리아에게 기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처음에는 있는 줄도 몰랐다가 다 읽고 나서야 벗겨두었던 책 표지를 다시 씌우다발견한『새버스의 _ 극장』작가가 굳이 제목에 이렇게 언더 바( _ )를 넣은 것은 읽는 독자들 스스로가 마음대로 넣어서 완성시키라는 뜻 아닐까. ‘네 집이고 아무도 네 짝이 아니며 아무도 아닐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로지다…(중략) 외딴 언덕바지, 아늑한 작은집, ‘12단계’ 마누라. 이것이 ‘새버스의 외설극장’이다. 698쪽‘ 라는 표현대로 외설이라는 낱말이 꼭 맞기는 하다. 그러나, 새버스의 인생을 따라다니다 보니 그의 외설적이고 직설적인 표현방식 아래에 너무나 진한 외로움과 고통이 배어 있는 게 느껴져 외설만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새버스의 극장_ 』이라고 부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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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작년에는 책을 별로 안 읽었다.

이런저런 핑계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나를 지배했던 가장 큰 암흑의 기운은 나태함.

몸무게가 한 200kg은 되는 것처럼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뒹굴거나

그토록 혐오하던 'TV껴안고 살기'에 편승하여 낄낄거리느라

소중한 시간들을 다 버린 까닭이다.

(그 시간들은 몽땅 내 살이 되어 붙어 버렸고!)

알고 지내는 어떤 이는 274권인가를 읽었다는데

나는 1월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읽은 책이 겨우 35권이라니..

물론 책의 양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한 달에 마지못해 한 권씩 읽은 꼴인 셈인데 양이고 질이고 따질 수 있어?)

무지하게 바빴다면 그건 인정할 만한 사유가 되지만

작년은 여유 시간이 아주 차고 넘쳤기에 어떻게든 포장을 해줄 수가 없다.

그래, 어쨌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자.

후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니까.

다시 1월이니 얼마나 좋은가. 시작하기에 딱 알맞은 달.

그런 의미에서 작년에 읽은 책을 정리해보니


내 맘대로 가장 좋은 책은 바로 옌렌커의 <연월일>이다.


 
 
연월일
저자
옌롄커
출판
웅진지식하우스
발매
2019.10.21.

작년 1월 2일에 쓴 글인데 와우, 나 신통력 있나보다.

최고의 책이 될 것 같다는 예상은 빗나가질 않았으니!

장편에 대한 지독한 편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단편집이 내 사랑을 받았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새해는 왔고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할 수 있어서 참 좋다.

올해는 100권읽기가 목표.

올해 읽을 책들이 눈 반짝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너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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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도 지지 않고 시 그림이 되다 1
미야자와 겐지 지음, 곽수진 그림, 이지은 옮김 / 언제나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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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의 시를 바탕으로 그림책, 혹은 에세이집이 탄생했다.



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과 욕심 없는 마음으로

결코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웃음 짓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내 잇속을 따지지 않고

사람들을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가 있다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가 있다면 가서 볏짐을 날라 주고

남족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서 두려움을 달래주고

북쪽에 다툼이나 소송이 있다면 의미없는 일이니 그만두라 말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 흘리고

추운 여름이면 걱정하며 걷고

모두에게 바보라 불려도, 칭찬에도 미움에도 휘둘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

서른일곱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훌륭한 작가 미야자와 겐지.

생전엔 단 두 권 ≪주문 많은 요리점≫과 시집인≪봄과 수라≫만 출판되었지만

그뒤 겐지 동생이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수첩을 발견해 많은 유작이 발표되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첼로 켜는 고슈>도 그 수첩에 있었고,

이 시 또한 그가 죽기 2년 전에 써 놓은 작품이라고 한다.

그림을 그린 곽수진은 동화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2019 볼로냐 국제도서전 사일런트북 콘테스트 대상,

2020 월드 일러스트레이션 어워즈 롱리스트 아티스트에 뽑히고

2021 영국 케이트 그린어웨이상 후보에 올랐단다.

(상들은 잘 모르지만 그림을 보니 좋은 작가인 줄은 알겠다. )

그의 그림들과 미야자와 겐지의 시가 너무나 잘 어울려서

읽고 또 앞으로 돌아가 한 번 더 읽고 또 돌아가고..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특히,



이 그림은 너무 좋다.

지칠 때 한 번씩 들여다보면 좋을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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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올리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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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를 처음 만난 건 2010년. 10년이 흐른 뒤 다시 만난 올리브는 여전했다. 무뚝뚝하고 남이 들어서 기분 좋은 말 따위는 할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 그러면서도 <빨간머리 앤> 속 ‘마릴라’처럼 마음 깊숙한 곳에 애정이 넘쳐나는데 그걸 깨닫는 이는 몇 안 되는 사람이 올리브다. 그리고 ‘사람들은 뭔가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느꼈는지 알지 못하거나, 정말로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올리브 키터리지가 그리운 이유였다.(17쪽)’ 잭이 말하듯 올리브는 솔직한 게 매력이다.

올리브는 이 책에서 주인공이자 ‘크로스비’라는 작고 아름다운 마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 속 숨겨진 조연이기도 하다. 이제는 사라진 줄 알았던 계급 문제 -심지어 노인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에서도 스스로 상류층이라 생각하는 하버드 출신자들이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태도들에서 아직도 볼 수 있는-나, 치매를 겪는 사람들, 가난, 배우자의 외도, 노인 문제, 가족간의 소외 문제에 조언자로 등장하거나 배경처럼 스쳐 지나가며 존재감을 뿜어낸다.

어찌 보면 딱 <전원일기>같은 이 소도시의 이야기에 마음이 울리는 것이 어떤 이유일까 생각해보다가 다음 문장들에서 답을 찾았다.

‘배브콕의 집에서는 치료제가 없는 외로움의 악취가 나는 것 같았다. (76쪽)’ ‘잭은 너무 무서워서 의자에 앉아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무서운 것은 인생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자신이 누군지, 혹은 뭘 하는지 모른 채 살아왔는가 하는 점이었다. (266~267쪽)’ ‘올리브는 깨달았다. 자신을 즐겁게 만들어주지 않은 것은 그녀 자신이었음을. 그녀는 의자에서 조금 뒤척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459쪽)

사는 모습은 이름이 어떻든, 사는 곳이 어떻든, 생긴 게 어떻든 다 비슷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후회하는 이유까지도. 단지, 내가 누구와 함께(가족이든 친구든 이웃이든) 인생을 걸어가느냐와 얼마나 만족을 하느냐 못 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잭이나 올리브가 느낀 저런 감정들이 내게 쿵쿵대며 걸어오는 것은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감정을 들켜서 나는 죽도록 창피해 어딘가로 숨어들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심장발작을 일으킨 뒤 잭의 집(그와 함께 부부생활을 한 집이건만)에 사는 것이 싫어서 노인들만 사는 메이플트리아파트에 입주한 여든세 살의 올리브.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타자기로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게는 내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어떤 단서도 없다. 진실로 나는 한 가지도 알지 못한다.(460쪽)’ 이 문장을 써놓고는 친구인 이저벨과 저녁을 함께 먹기 위해 일어선다. 그리고 갑자기 훅 돌아서서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넌 잘 살아라. 후회하지 말고.”

그녀는 이후로도 한참을 더 올리브답게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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