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버스의 극장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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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버스의_ 극장』, 필립 로스 글,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펴냄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의 삶은 무엇으로부터의 기나긴 도주인가? 206쪽‘

도입부부터 쉰두 살의 정부 드렌카가 예순네 살의 애인인 새버스에게 ’다른 여자들하고 박고 다니는 걸 그만두겠다고 맹세해라. 아니면 연애는 끝이다‘라고 통보하는 걸 듣는 순간 머리가 띵해지더니 읽어갈수록 가관이다. 이 외설적이고 미친 놈이 하는 소리 같은 글들이 700쪽이나 이어지면 어쩌지? 결국, 중간에 다른 책들을 읽는 것으로 정신을 수습해가며 사흘 만에야 간신히 다 읽었다.

’걸어 다니는 외설 찬양…(중략) 신성 모독을 설파하는 전도된 성자. 1994년에는 좀 지겨운 것 아니야. 그 반역자-영웅이라는 역할이? 섹스를 반역으로 생각하기에는 얼마나 이상한 시기인지. 558쪽.‘

’하지만 왜 굳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거예요? 원초적 감정과 품위 없는 언어와 질서 잡힌 복잡한 문장. 534쪽.‘

새버스 친구인 노먼과 그의 아내 미셸의 말들은 새버스를 정의하기에 아주 적합한 듯 들린다. 첫 번째 부인인 니키는 실종되고, 애인이었던 드렌카는 암으로 죽고, 두 번째 부인인 로즈애나는 알콜 중독, 캐시는 그를 고발하고, 형은 전사, 어머니는 형의 죽음으로 정신을 놓고 살다가 죽고. 음울하게 그의 인생 저변을 도는 죽음과 실종, 상실. 시작은 무엇으로도 치유되지 못한 형의 죽음이었지만 그를 미치게 만든 건 바로 드렌카의 죽음이다.

’그는 전혀 자비롭지 않은 자기 분열과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324쪽‘

이러한 정신 상태에서 그는 드렌카를 추억하고, 형을 추억하고, 어머니와 젊은 시절을 추억하며 죽음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친구 부인에게서 훔친 돈으로 자기가 묻힐 묘지를 사고, 묘석을 사고 묘석에 새길 말까지 작성했건만 결국 자살에 이르지 못한다.

로즈애나가 한 말’사람은 비밀만큼 병이 들어 147쪽 ‘ 처럼 새버스는 혼자 간직한 비밀 때문에 힘들었고 아팠지만, 드렌카 죽음 이후 방황하며 깊숙한 곳에 숨겨둔 그 많은 비밀들을 수면 위로 올라오게 했으니 스스로 치유한 셈이다. 앞으로 몇 년간은 그저 증오하며 살아갈 것이다.

좀 더 순화된 표현을 썼다면 읽기엔 편했을 테지만 작가의 의도는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해서 놀랐다. 꽁꽁 싸매두었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그것들. 누구나 말하고 싶지만 점잖은 척하기 위해 내보이지 않는 것들을 작가는 순수한 욕망으로, 포장되지 않은 날 것의 심리로 자유분방하게, 과감하게 표현했으니 시원했으리라.

분명한 것은 『에브리맨』의 필립 로스를 내가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죽음에 관한 고찰‘ 중 부드럽고 점잖은 쪽이라고나 할까? 더불어, 미하엘 엔데의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이 생각난 것은 손가락 인형으로 무대를 꾸렸던 미키 새버스와 작은 목소리로 인하여 배우가 못 되고 무대 아래서 대사를 불러주는 일을 해야만 했던 오필리아가 자연스레 연결된 탓도 있지만, 드렌카의 죽음 이후 방황하며 무대도 없이 자신의 인생을 보여준 새버스의 극장이 중첩된 까닭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미하엘 엔데와 필립 로스의 두 작품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아주 웃기는 짓이긴 하지만 이걸 읽으면서 떠오르는 걸 무시하기도 어려워 다시 읽어봤다. 프리드리히 헤헬만의 그림으로 베틀 북에서 만든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은 여전히 아름답고 따뜻했다.

늙고 병들어 극장을 떠나게 된 오필리아 앞에 주인을 잃은 그림자들이 찾아오고 그들을 맞아들여 연기를 가르치고 공연을 하며 남은 생을 살다가 마지막 그림자인 ‘죽음’을 맞아들인다는 이야기. 새버스에게 지친 마음을 위로받는 느낌이니 이 책을 읽은 뒤 나처럼 힘들었다면 오필리아에게 기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처음에는 있는 줄도 몰랐다가 다 읽고 나서야 벗겨두었던 책 표지를 다시 씌우다발견한『새버스의 _ 극장』작가가 굳이 제목에 이렇게 언더 바( _ )를 넣은 것은 읽는 독자들 스스로가 마음대로 넣어서 완성시키라는 뜻 아닐까. ‘네 집이고 아무도 네 짝이 아니며 아무도 아닐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로지다…(중략) 외딴 언덕바지, 아늑한 작은집, ‘12단계’ 마누라. 이것이 ‘새버스의 외설극장’이다. 698쪽‘ 라는 표현대로 외설이라는 낱말이 꼭 맞기는 하다. 그러나, 새버스의 인생을 따라다니다 보니 그의 외설적이고 직설적인 표현방식 아래에 너무나 진한 외로움과 고통이 배어 있는 게 느껴져 외설만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새버스의 극장_ 』이라고 부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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