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제목 : 플라멩코 추는 남자
◎ 지은이 : 허태연
◎ 펴낸곳 : 다산책방
◎ 2021년 9월 17일 1쇄 발행, 274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이 작은 팻말이 붙어 있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책이다.
작가도 생소한 데다, 세비야 스페인 광장이 틀림없을 배경과 그 앞에서 배를 탄 두 남녀.
표지 그림과 이 제목이 주는 가벼움이라니!
이런 식의 표지를 한결같이 싫어하는 내 취향 탓이지만
까놓고 말해서 어딜 봐도 '로맨스 소설이오' 라는 냄새를 폴폴 풍기지 않는가.
그러나, 집안으로 들어서면 전혀 다른 향기가 난다.
이래서 첫 인상은 믿을 게 못 된다. (그러나 첫 인상은 얼마나 중요한가! 이 아이러니!)
67세의 주인공 남훈 씨는 굴착기 기사였다.
스스로에게 안식년을 주기로 결심한 그는 차도 렌트로 줘버리고
오랜 세월 책장 속에 들어 있던 '청년일지'를 꺼내
그동안 해보고 싶어했던 일을 찾아낸다.
과제 1. 남보다 먼저 화내지 않기
과제 2. 청결하고 근사한 노인 되기.
과제 3. 외국어 배우고 해외여행 하기
과제 4. 건강한 체력 기르기
이것들에 따라 그는 화내는 성격을 누그러뜨리고, 양복을 맞추고,
플라멩코와 스페인어를 배운다. 그러면서 드러나는 첫째 딸 보연의 존재.
이혼한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보연을 여태 잊고 살다가
일을 그만둔 지금 시점에야 떠올린 것이다.
딸이 열일곱일 때 이후 처음인 어색한 만남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그런 딸을 위해 스페인 여행을 함께 떠나고 거기에서 비로소 남훈은 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계획대로 맞춤 정장을 입고 광장에서 무희와 함께 플라멩코를 춘다.
여기까지 썼어도 괜찮았을 텐데 사족이 붙었다.
작가는 남훈과 보연의 관계가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보연은 휴대폰에서 아버지가 굴착기 공사 후 찍은 사진들을 보고
직접 그 장소를 찾아가 완공된 건물을 다시 찍어 보낸다.
그리고 'Te quiero, hija mía.(사랑한다, 내 딸)'이라는 문자에
Yo también, papá. (나도요, 아빠)라고 답해준다.
아빠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말과 함께.
남훈 씨는 벅찬 마음으로 마지막 과제를 이렇게 적는다.
과제8. 한 달에 한 번은 꼭 보연을 볼 것.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더 어려워진다는 걸 알기에
남훈 씨가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대리만족이 되기도 했다.
몸치인 내가 절대 배우려 하지 않을 춤과 스페인어라니.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연기한 <버킷리스트>라는 영화도 자연스레 떠올라
잠시 책은 엎어두고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생각했는데 쉽지 않았다.
지금은 완전 잘 한 일 중 한 가지로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하지만
20년간 장롱면허였던 운전을 다시 시작할 때도 큰 결심이 필요했다.
앞으로 하고 싶은 몇 가지 일들에도 그런 결심이 필요할 테지만
67세의 남훈 씨도 했는데 그보다 훨씬 젊은 내가 못 해낼 일이 뭐가 있으랴.
(라고 말은 하지만 벌써부터 덜덜 떨린다. 이 겁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