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거의 모든 역자가 '사느냐 죽느냐'로 옮겼다. (최재서의 '살아 부지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와 이덕수의 '과연 인생이란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강우영의 '삶이냐, 죽음이냐'는 예외이다.) 그런데 원문의 To be, or not to be는'사느냐 죽느냐'를 포함하는 존재와 비존재를 대립시키고 있기 때문에, 또 이 독백이 살고 죽는 문제를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명시하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쉽고 모호하며 지극히 함축적인 일반론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것을 생사의 직설적인 선택으로 옮김은 미흡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원문의 뜻에 가장 적합한 순수 우리말은 '있다'와 '없다'의 적당한 변형이 될 것이고, 필자는 앞선 번역에서 이 부분을 '있음이냐, 없음이냐'로 옮겼다. 그러나 있음과 없음에 아직 역사적, 철학적, 언어학적 무게가 충분히 실리지 않아 역자의 의도가 잘 전달되지 못했다고 판단하여 이번에는 원문의 뜻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한자어를 쓰는 번역으로 바꾸었다.'(105쪽 역자 주석에서)
내 생각에는 '사느냐 죽느냐'로 해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셰익스피어와 희곡 연구를 바탕으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고, 전 작품을 번역하신 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라 내 감흥까지 학습된 느낌이다. 신선함이 떨어지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분명한 건 희곡은 무대에서 감상할 때 가장 빛이 난다는 것이다. 읽는 동안 무대를 꾸미고 그 위에 배우들을 올리는 상상을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