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과 가죽의 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4
구병모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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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바늘과 가죽의 시

◎ 지은이 : 구병모

◎ 펴낸곳 : 현대문학

◎ 2021년 5월 18일 초판 4쇄, 191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닷새간 지속된 장마로 삼나무 결이 뒤틀리지나 않았는지 염려되어 환기부터 할 요량에 슬쩍 젖혀본 커튼 사이로 틈입한 햇빛은 라스트의 코에 닿아 부서진다.'(11쪽) 이렇게 시작한 이야기가 구두를 만드는 과정과 모르는 용어로 이어졌을 때 참으로 난감했다. 불친절하게도 각주가 없으니 찾아봐야 할 텐데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는 건 싫어서 투덜대며 대충 빈 종이에 몇 개만 휘갈겨 쓰고 지나갔는데, 가난한 구두장이 집에 나타나 구두를 지어주고 부부가 답례로 선물해준 옷과 신발을 갖고 돌아간 요정이 시원(始原)이라는 걸 알았을 때 누군가 내게 불시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물과도 흙과도 불과도 바람과도 닮지 않았으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만 같았던 존재들은 원래의 특성이 조금씩 지워지면서 천천히 인간이 되어간다.' (83쪽) 언제부터인지도 모르면서 구두를 지으며 살았던 이 정령들은 사람의 몸을 얻은 뒤 각자 다른 의미를 찾아 나섰고 지금 현재는 그와 미아 둘만 남은 걸로 보인다. 늙지도 않고 병들지 않지만 고통은 느끼는 존재로 살면서 얀은(이제는 이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며) 처음 그가 했던 것처럼 계속 구두를 만들며 살아간다. 늙지 않는 모습을 감추려 10년내지 15년 주기로 거처를 옮기는 수로고움도 감당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제 손으로 하기에 구두 한 켤레를 짓는 데 최소 4주가 걸리니 생활이 될 리 없어 공방에 수강생까지 받고 있다.

'사람이 만들어준 옷을 입고 증여와 보답, 이익과 대가라는 삶의 보편 양식을 채용한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서 오랜 세월 당연하게만 여겨졌던 업이, 어쩌면 업보다는 호흡에 가까웠던 무엇이 조금씩 뒤틀린다.' (81~82쪽) 먼지와 같고 햇볕과 같은 시간을 덤덤히 보내던 그에게 어느 날 미아가 결혼할 사람이라며 발레를 전공한 유진을 데려와 구두를 만들어달라 한다. 이제는 구두 짓는 일 대신 사업가로 변신한 아름다운 미아를 보며 안은 유진이 먼저 죽은 뒤 미아가 겪을 또 하나의 상실을 염려하지만 미아는 '사라질 거니까, 닳아 없어지고 죽어가는 것을 아니까 지금이 아니면 안 돼.'(149쪽) 라는 대답을 전한다.

우연히 재회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노부인이 된 옛 연인을 본 안은 '새로 빨래하고 풀을 먹여 햇빛 냄새가 나던 베갯잇 같은 나날을, 혀끝이 얼얼할 정도로 다디단 시간을 안은 견딜 수 없었고, 그보다는 그 감각에 마비되고 만 뒤 그녀를 잃게 되는 당연한 수순을 밟고 싶지 않았.' (92쪽)기에 그녀를 떠나왔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녀를 다시 만나지 않겠노라 했던 생각은 미아와 함께 유진의 공연을 보면서 달라진다. 미와와 안은 '숙명이나 법칙과 무관하고 부나 명예나 아름다움에의 탐닉이 아닌, 다만 누군가의 미소와 누군가의 평화를 위해 구두를 지은 것이 그들의 시작이었음을 잊지 않았.'(167쪽)으며 '언젠가는 망각과 기억 사이에 난 미로 같은 길들을 따라 육신의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하는 일이, 자신의 몫' (168쪽)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평생을 '그 어느 날 밤, 노부부가 지어준 옷과 함께 우리가 얻은 것은 편리함인가, 저주인가.' (38쪽) 라는 생각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비로소 '가죽과 가죽을 바늘과 실로 잇는 행위는, 우리에게 있어서 숨 쉬는 것이나 물을 마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고. 무두질이 잘되어 싱그러운 냄새를 풍기는 가죽에 바늘을 대는 순간, 바늘은 저절로 노래를 불렀다. 노동은 영원한 이명과도 같이 그들에게 달라붙은 것이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듯 일하는 것이 존재의 몫이었다. 목소리만이 아닌 온몸의 노래.' (145쪽) 라고 깨닫는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찰나에 불과한 시간만을 머물렀다가 부서지고 사라질 세상의 모든 것을 붙들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뻗고야 마는 손을, 변함없이 바늘을 쥐는 손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170쪽) 안은 미아와 유진을 보며 이제는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행복하게 살 생각을 하지 않을까. 노부인을 배웅하고 난 뒤에는 유일하게 남은 형제인 미아만을 그리워하며 살기보다는 자기 곁에 있는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을 꿈꾸었으면 좋겠다.

처음에 갈겨 썼던 몇 개의 낱말들을 인터넷에서 찾는 걸 잊었는데 희한하게도 그게 굳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 걸 몰라도 머릿속에서 구두를 만드는 작업이 착착 진행이 되는 (물론, 내 맘대로 구두 만들기였겠지만) 상상이 되더란 말이다. 우리가 영어를 모를 때도 팝송을 흥얼거리며 멜로디와 그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처럼 중요한 건 구두를 만드는 공정이나 용어 따위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세심하게 심혈을 기울여 그 작업을 했는가니까.

뒷부분에는 작가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참고했던 4권의 구두 관련 책이 실려있다. 작가가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들이는 수고를 늘 잊고 산다. 그 책들이, 수없이 봤을 발레와 공방에 들락거리며 맡았을 가죽냄새들이 뿔뿔이 흩어져 제가끔 뻗정다리로 돌아다니지 않고 한 편의 시에 녹아들어 자연스레 아름다운 직물 하나를 완성했음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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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기린의 말 - 「문학의문학」 대표 작가 작품집
김연수.박완서 외 지음 / 문학의문학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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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깊은 밤, 기린의 말

◎ 지은이 : 김연수 외 9명

◎ 펴낸곳 : 문학의 문학

◎ 2011년 5월 10일 초판 3쇄, 382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다수 포진해 있어 반가웠던 책이다. 김연수 <깊은 밤, 기린의 말>, 박완서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 이청준 <이상한 선물>, 이나미 <마디>, 권지예 <퍼즐>, 이승우 <한 구레네 사람의 수기>, 윤후명 <소금창고>, 조경란 <파종>, 이명랑 <제삿날>, 최일남 <국화 밑에서> 이렇게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엄선했다고는 하지만 내 입맛에 다 맞는 건 아니라서 몇 작품은 인상까지 쓰면서 읽었으나, 김연수, 박완서, 이청준, 이승우의 작품은 내 나름의 감탄사인 '역시'와 고개끄덕임을 동시에 꺼내게 만들었다. 원래는 하루에 한 편씩만 읽고 차분하게 정리를 하려고 했으나 좋은 작품들이 줄줄이 있으니 읽고 싶은 욕망을 제어하기 힘들어서 그대로 마지막 장까지 달려버렸다. 그렇다고 10편을 다 정리하기는 지루하니 (다음 책도 이미 책상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며 재촉을 해대고 있고) 표제작이면서 가장 좋았던 작품인 <깊은 밤, 기린의 말>만 해보기로 하자.

전반적인 발달장애 의심이란 진단을 받은 태호를 데리고 죽을 생각으로 집을 나선 그 밤에, 엄마는 태호가 관심을 보였던 강아지를 입양하고 '기린'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특정한 소리에 민감하고 서로를 좋아하며 비슷한 점이 많은 태호와 강아지 기린.

잡지의 신인상 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정식으로 시인이 된 엄마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기린을 본 엄마의 친구는 기린에게 장애가 있음을 알려주었고, 화가 난 아빠는 기린을 애견센터에 돌려주고만다. 그 기린을 구하려고 밤 12시에 태호와 쌍둥이 누나들은 집을 나선 참이다. 가게를 못 찾고 어두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기린이라는 말에만 반응하던 태호가 아무 것도 없는데 계속 좋아하는 걸 보고 어이가 없던 그때 애견센터가 나타난다. '애견센터의 쇼윈도에는 기린이 앉아서 애처로운 표정으로 보이지 않는 거리와 그 거리를 걸어가는 우리 쌍둥이와, 그 사이에서 마냥 좋아하는 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42쪽) 말하지 않는 태호와 보이지 않는 기린, 두꺼운 유리에 막혀 들릴 리 없는 기린의 소리를 듣는 쌍둥이들은 서로가 온 마음으로 소통하고 있었던 것일 게다.

장애를 가진 아이도, 그 부모도, 또 그 가족들도 힘들 것이다. 누나인 쌍둥이들은 엄마가 태호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것때문에 마음을 다치기도 하고 엄마는 엄마대로 반응 없는 태호를 돌보는 게 힘겨워서 시 쓰는 일에 기대보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가 한 마음으로 사랑하기에 이들은 기린과 함께 서로의 손을 잡고 씩씩하게 걸어갈 것을 믿는다.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해준 이 작품. 특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우리 머리 위에는 거대한 귀 같은 게 있을 거야 .(중략) 그런 귀가 있어 깊은 밤 우리가 저마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들은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은 거야. (26쪽) 이 부분은 시도 때도 없이 혼자 중얼거리는 습관이 들어버린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울컥했다. '그러니까 슬퍼하지 마. 외로워하지 마.' 하는 것만 같아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대화를 해도 서로의 말이 들리지 않을 것이고, 내가 보는 것을 똑같이 볼 수도 없으므로 사람들과의 불필요한 만남을 줄여왔더니 요즘 부쩍 혼잣말이 는 모양이다. 그저 태생적인 외로움이라고 나를 달래보고 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 보이지 않는 길, 잡히지 않는 손…… 우주는 한없이 넓다고 했으니 어딘가에는 그런 것들로만 이뤄진 세계도 분명히 존재하리라. 그런 곳에서는 보이는 길은 우리를 어디로도 데려가지 못하리니, 그런 곳에서는 모두들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소망하는 곳에 이르리라. 심지어 우리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만약 우리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잡히지 않는 손을 잡을 수만 있다면.' (28~29쪽) 나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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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의 씨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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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석류의 씨 Pomegrante Seed

◎ 지은이 : 이디스 워튼

◎ 옮긴이 : 송은주

◎ 펴낸곳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7일 1판 1쇄 발행, 247쪽

◎ 수록작품 : <편지>, <빗장 지른 문>, <석류의 씨>, <하녀의 종>

◎ 내 마음대로 별점: ★★★★☆

네 편의 비교적 짧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 이 책은 책장을 덮고나면 참으로 허무해진다. 도대체 뭐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고 그 다음에는 결과를 얘기해주지 않는 작가가 미워지면서 동시에 무한한 애정이 솟구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흡인력이 대단한 이야기들이다. 매력적인 단편이다. 마지막 부분이 애매하다는 걸 빼놓고는 결점을 찾기가 어렵다. (그 때문에 별 하나가 흐릿할 수밖에 없다.)

<편지>

리지 웨스트는 유명한 미국 화가 빈센트 디어링의 딸 줄리엣을 가르치다가 그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는 아내가 갑자기 죽으면서 미국에 남겨놓은 아내의 유산을 따라 아이와 함께 가버린다. 그리고 계속되는 그녀의 편지에도 묵묵부답. 그렇게 3년이 흘렀고 그 사이 리지는 어느 친척의 유산을 받아 풍족한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되는대로 넣은 가구가 있고, '일단 보고 마음에 들면'사기로 한 장식품들이 끝없이 들어오는 정리가 덜 끝난 집의 소유자 같았다. (39쪽)

그런 그녀 앞에 디어링이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마법에 이끌리듯 그와 결혼하여 아이를 둔 리지. 친구인 앤도라와 함께 아이를 돌보다가 미국에서 보내온 디어링의 낡은 가방 하나를 보게 된다.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뜯어보지도 않은 리지의 편지들. 분노가 그녀를 뒤덮지만 지금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아 혼란스럽다.

'너무 많은 것을 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토대에는 항상 피가 섞여 있는 법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어떤 것은 감춰둔다.' 고통과 악의 어두운 비밀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한다. 그리고 그런 보호가 없다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어느 누가 메두사의 얼굴을 보고도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68쪽)

결국 그녀는 그를 용서할 것이다. 아니, 용서한다는 말보다는 지금의 행복 속에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게으르고 나태한 그와 함께.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행복을 위해 많은 시간들을 포기하는 것 같은 그녀가 안타깝다. 길게 보면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실망도 많아질 게 뻔하다. 알몸으로 쫓아버려도 시원찮을 인간이구만.

<빗장 지른 문>

'생기 없는 일상을 반복해야 한다는 (기계적인 몸짓을 또 하루 수행해야 한다는) 공포가 다시 그를 사로잡았다.' (86쪽)

휴버트 그래니스는 글을 써서 유명해지고 싶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어느 날 변호사인 애스첨을 불러 자신이 10년 전에 유산 상속을 위해 사촌인 조지프 렌먼을 죽였노라고 실토한다. 이런 고백에도 애스첨이 믿지 않자 신문 편집자인 오래 된 친구 로버트 덴베에게, 또 지방검사에게, 신문기자에게 차례로 털어놓지만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 3월의 어느 날 길을 걷다 낯선 소녀에게 말해보려했지만 소녀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는 경찰에 붙잡힌다. 그렇지만 그는 살인죄로 체포된 것이 아니다. 우연히 경찰서 안에서 기자인 피터 매캐런과 그의 지인에게 자신의 진술서를 들려주고 다시 한 번 봐달라고 한다. 기자는 지인에게 그가 진범인 것을 알게 되었지만 결코 말할 수 없다며 그가 경찰서 안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한다.

"아, 아시는군요. 제가 유죄인 줄 아는군요!" (141쪽)

누군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정해주길 바라는 그래니스의 절박한 심정이 드러난 문장이다. 양심 때문일까? 결코 아니다. 그는 후회한 적이 없노라고 했다. 그저 실패한 삶이 싫었고 죽을 용기 또한 없었을 뿐이다.

'그의 동기가 변호사를 납득시키지 못했다면 덴버에게는 훨씬 더 무게를 갖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둘 다 성공한 사람들이고, 성공은 실패의 미묘한 고뇌를 이해하지 못한다.'(110쪽)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이 성공한 살인이 인정받길 원했다니 인간이 가진 인정욕구란 얼마나 무서운지.

<석류의 씨>

케네스가 뜨겁게 사랑했던 첫번째 부인 엘시가 죽은 지 2년 후 샬럿 애슈비는 그와 결혼한다. 하지만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처음 마주하게 된 회색봉투의 편지는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시간들을 어지럽힌다. 남성적인 필체에 묻어나는 여성 이미지. 그런 편지를 받은 날이면 남편은 '몇 년은 더 늙어보였고, 생기와 용기가 다 빠져나가 텅 비어버린듯했다.(153쪽)' 그리고 샬롯에게 트집을 잡고 잔소리를 해댔다.

그녀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에게 설명을 요구하지만 케네스는 의뢰인이 보낸 편지라고만 한다. 그녀의 청대로 여행을 가기로 한 바로 전날 케네스는 교외로 나가 늦도록 돌아오지 않고 불안해진 샬럿은 시어머니를 찾아갔다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 또 회색봉투의 편지가 도착했음을 알고 샬럿은 시어머니와 함께 편지를 뜯어본다. 그리고 그 필적이 첫번째 부인이었던 엘시의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너무나 희미해서 아무런 내용도 발견하지 못하지만 시어머니는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한다며 경찰에 전화를 걸라고 한다.

해설에서 <석류의 씨>는 케네스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이유가 죽은 아내를 따라 명부를 방문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지만 선선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처음에는 죽은 아내가 페르세포네처럼 석류 씨를 먹었기 때문에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들에 돌아오는 것일까 생각했으나 어디서도 그런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편지에서 도망가고 싶어하는 케네스는 죽은 아내를 만나 더 이상은 이승에 집착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러 간 것일까?

<하녀의 종>

하틀리는 장티푸스를 앓고난 뒤 브림프턴 부인을 소개받아 시골 저택으로 가게 된다. 하인들도 마님도 마음에 들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다. 결코 종을 울리지 않는 마님이건만 어느 날 종이 울리고 오랫동안 주인마님을 보필하다 죽었다는 하녀 에마가 그녀 앞에 나타난다. 뭔가 할 말이 있는듯 그녀를 마님의 친구인 랜퍼드 씨 저택으로 이끌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고 마님은 에마가 또 나타났던 날 죽는다. 그리고 주인인 브림프턴 씨는 장례식 후 바로 떠나버렸다.

누가 에마의 죽음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인지, 에마가 랜퍼드 씨 집으로 데려간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짜증이 난다.

아무리 열린 결말이라고 해도 <편지>와 <빗장 지른 문>은 그런대로 유추가 가능해서 완벽한 단편으로 보이지만, <하녀의 종>이나 <석류의 씨>는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작가가 옆에 있다면 '그래서요? 이게 뭔데요?' 라고 다그치고 싶을 정도다. 나만 이해를 할 수 없는 걸까?

'호러스 월폴의 《오트란토 성》(764년)에서 기원한 고딕소설은 음산한 중세의 성이나 수도원 등 고립된 장소를 배경으로, 유령과 같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대상을 주로 다루었다.

- 해설중에서. 240쪽-

고딕소설라는 용어는 친숙하지 않아도 매리 샐리의 『프랑켄슈타인』과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어셔가의 몰락』을 비롯한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에도 고딕적인 요소가 있다니 어렴풋하게 감이 잡히기는 한다. 음산한 분위기와 유령 등장, 알 수 없는 힘에 지배되는 주인공.

'고딕소설의 정신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워튼의 말은, 그녀가 여성 작가로서 고딕소설의 잠재력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해설 중에서 241쪽-

이해하기 어렵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끝까지 얘기를 다 해줘야지(이건 억지를 쓰는 거지만). 좋아. 정 그렇다면 마음대로 생각해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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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데니스 존슨 외 지음, 파리 리뷰 엮음, 이주혜 옮김 / 다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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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레이먼드 카버 외

◎ 옮긴이 : 이주혜

◎ 엮은이 : 파리 리뷰

◎ 펴낸곳 : 다른

◎ 2021년 11월 22일 초판 1쇄, 453쪽

◎ 내마음대로 별점 : ★★★★

수록작품: 15편

-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 데니스 존슨 글, 제프리 유제니디스 해설

- <어렴풋한 시간> 조이 윌리엄스 글, 다니엘 알라르콘 해설

- <춤추지 않을래> 레이먼드 카버 글, 데이비드 민스 해설

- <궁전 도둑> 이선 캐닌 글, 로리 무어 해설

- <하늘을 나는 양탄자> 스피븐 밀하우저 글, 다니엘 오로즈코 해설

- <애미 무어의 일기> 제인 볼스 글, 리디아 데이비스 해설

- <방콕> 제임스 설터 글, 데이브 에거스 해설

- <펠리컨의 노래> 메리베스 휴즈 글, 메리 겟스킬 해설

- <모든 걸 기억하는 푸네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글, 알렉산다르 헤몬 해설

- <늙은 새들> 버나드 쿠퍼 글, 에이미 헴펠 해설

-<라이클리 호수> 메리 로비슨 글, 샘 립사이트 해설

- <플로베르가 보낸 열 가지 이야기> 리디아 데이비스 글, 앨리 스미스 해설

- <거짓말하는 사람들> 노먼 러시 글, 모나 심슨 해설

- <브리지 부인의 상류사회> 에번 S. 코널 글, 웰스 타워 해설

- <스톡홀름행 야간비행> 댈러스 위브 글, 조이 윌리엄스 해설

장르의 대가 열다섯 명에게 <파리 리뷰>가 발표한

단편소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 하나를 고르고,

그 소설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결정적인 이유를

서술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편집자의 말 중에서

이렇게 탄생하게 된 책으로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주제가 다양한 작품들이 모여 있다.

'이 책 한 권에 담긴 것은 문장들이기도 하고, 독특한 인물들이기도 하고, 어떤 어렴풋한 정서이기도 할 것입니다. 작가들의 이름이 될 수도, 읽는 이마다 다르게 마주칠 경이로운 순간이 될 수도 있겠지요. 오직 새로운 작가, 새로운 작품을 소개하겠다는 의지로 센강에 정박한 곡물 운반선에서 원고를 보살폈을 오래전 편집자들의 어떤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할 것입니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레이먼드 카버, 제임스 설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말고는 죄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들이다보니 새로운 작가, 새로운 작품을 읽는다는 설렘을 오랜만에 느꼈다. 하루에 한 편씩 야금야금 읽으려는 계획을 갖고 시작했으나 첫 작품부터 너무 강렬해서 하루를 더 기다릴 수가 없었고 결국은 내리 읽는 방법을 택했다.

문화 차이가 큰 탓에 해설하는 이들이 극찬한 것처럼 모든 작품이 다 좋다고 할 수는 없으나 내 눈길을 잡아끄는 몇 작품은 흥미로웠다. 약에 취한 탓에 모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 주인공이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기까지 하고, 심지어는 모든 빗방울의 이름까지 알게 되는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를 읽으면서 그럴 수 있다면 약에 한 번 취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욕망을 갖기도 했으니 참으로 위험한 작품이 아닌가! 에비!

-'출장 중인 세일즈맨이 혈관 내막이 벗겨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약을 먹였다. 턱이 아팠다. 나는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일어나기도 전에 모든 일을 감지했다. 어떤 올즈모빌 자동차가 속도를 줄이기도 전에 내 앞에 멈춰 설 것을 알았고, 차에 탄 가족의 다정한 목소리만 듣고도 우리가 폭풍우 속에서 사고를 당할 것을 알았다.'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 중 20쪽.

-'온전한 정신과 절제는 그 자체로 소중하지만, 삶의 비극적인 무감각을 보완해주지는 못한다. 속죄는 훌륭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속죄는 한 번에 한 사람만을 구하고 세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 해설 33쪽

나이 예순여섯에 학회에 참석했다가 심한 야유를 받게 된 주인공이 '계약전문가'인 게이브리얼 래칫과 얽히면서 일어나는 기괴한 일을 그린 <스톡홀름행 야간비행>은 웃기면서 슬프고 '그럴 수 있다면 나도 한 번?'그와 계약이란 걸 해보고 싶게 만든 작품이다. 작가가 되고 싶은 주인공이 새끼 손가락을, 고환 두개를, 왼손을, 귀 한 쌍을, 왼발을, 두 눈을 차례로 주는 댓가로 노벨상까지 받게 되어 고름 투성이인 몸이 바구니에 담긴 채 스톡홀름으로 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마치 악마와의 계약과도 같다. 나라면 무엇을 포기할 수 있으려나? 아직은 그 무엇도 포기할 상태가 아닌 모양이다.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상도 포기하라.)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잼이나 땅콩버터 병의 뚜껑을 따기 위해 거리를 헤매며 아들에게 전화를 하는 동안 아들은 새장 같은 노인들의 집을 구상하며 다시 침대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늙은 새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인문제를 다뤘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부모는 자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지만자식들은 부모를 포기하기도 한다. 슬픈 현실이다.

-'내가 거의 소유하게 된 화장실에 서 있으려니 나와 내 역사 사이 거리가 너무 멀어 도저히 좁혀질 것 같지 않았다. <늙은 새들> 중 306쪽

이밖에도 <궁전 도둑>, <모든 걸 기억하는 푸네스>, <브리지 부인의 상류사회>, <하늘을 나는 양탄자> 등도 꽤나 매력적이었다. 생각날 때마다 다시 들춰볼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다. 다음은 작품과 관계 없이 마음에 들었던 문장들이다.

-'삶은 더러운 메뉴판이었다. 난독증으로 인한 죽음. 그러나 모든 것이 아주 똑같았다.

<어렴풋한 시간> 중 55쪽.

'사람은 차이점에 관해서는 그리 오래 곱씹지 않는다. 정체를 오해할 때 충실할 수 있다. 같은 책 58쪽.

-끊임없는 망각이 생각과 언어와 문학을 위해, 그저 인간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함을 암시한다.

<모든 걸 기억하는 푸네스> 해설 295쪽

-'위대한 이야기는 영원히 긁어야 하는 가려움과 같다. <춤추지 않을래> 해설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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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들의 세계사 - 2014년 제4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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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치르는 것마냥 다 읽은 뒤 다음 책을 위하여 책을 덮고 있던 커버를 벗겨냈다.

앞표지에 좌회전 표시(우리의 주인공 나복남 씨가 사고 이후 하지 못해서 쩔쩔맸던 좌회전이다.)를 발견하고

무심코 뒤집어 뒤를 읽어봤다가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신형철 교수가 말한 데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지만 이거라도 남겨두자.

들어 보아라.

이것은 이 땅의 황당한 독재자 중 한 명인

전두환 장군의 통치 시절 이야기이다.

11쪽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연루되어 삶이 망가진 사람 중 한 명인 나복만.

이름과 달리 박복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간 우리의 주인공은 고아로 자라 김순희라는 여자를 만나고

그녀의 인도 아래 택시 운전사가 되었으며 돈을 차곡차곡 모아 결혼하는 게 꿈인 사람이다.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는 것을 감춘 채 어찌어찌 겨우 면허를 땄지만

운전 중 뭔가를 분명히 친 것만 같고 그후 좌회전을 할 때마다 그 느낌이 전해져 괴롭다.

결국 자수를 하러 경찰서에 갔으나 글을 모르니 강력계에 발을 들였고

빨갱이 사건에 혈안이 된 형사 하나가 그의 이름을 잘못 엮는 바람에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더불어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도.

분명 나복만이 주인공이지만 그가 주인공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오래 걸린다.

그가 왜 주인공이 되어야만 하는지를 설명해주는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넘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각색하고 연출한 사건의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나는 이 책이 거북하다.

『최순덕 성령충만기』나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김박사는 누구인가』에서 보여주던 대로

이기호식 문장은 여전히 재기발랄하지만 (그래서 책장은 휙휙 잘도 넘어가지만)

글을 몰라 진술서도 쓰지 못한다 하면 면허를 잃을 게 두려워 그저 고문을 당하고만 있는 가여운 나복만처럼

그 진실 안에서 분명히 숨을 쉬고 살았던 나는 거짓뉴스에 가려진 '진실'을 모른 척 외면하고 살았던 게,

굳이 찾아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이 미안해서 목이 멘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 만난 이 부분이 나를 전율케 했다.

'어쩌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나복만이 아닌 '수배'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그 말인즉슨 나복만에게 일어났던 운 없는 사건들이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연속적으로 벌어진다면,

당신도, 나도, 그 누구도, 별수 없이 나복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소리이다.

설령 그 누군가가 전두환 장군이라 할지라도……. 30년이 흘렀지만 변함없이.(12쪽)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읽고 넘어간 부분이었다. 다시 읽어보니 무섭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소심한 나는 '이렇게까지 썼다가 작가가 진짜 국정원에 끌려가는 거 아냐' 라는 걱정을 했더랬다.

이런 걱정 따위는 절대 할 필요 없는 그런 세상이라고 누가 말해줬음 좋겠다.

또한, 차남들의 세계가 아니라고.

바로 이 지점에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 이야기의 핵심을 그대로 단정지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아무것도 읽을 수도 없는 세계. 눈앞에 있는 것도 외면하고 다른 것을 말해 버리는 세계, 그것을 조장하는 세계 (전문용어로 '눈먼 상태' 되시겠다.) 그것이 어쩌면 '차남들의 세계'라고 말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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