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탄생하게 된 책으로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주제가 다양한 작품들이 모여 있다.
'이 책 한 권에 담긴 것은 문장들이기도 하고, 독특한 인물들이기도 하고, 어떤 어렴풋한 정서이기도 할 것입니다. 작가들의 이름이 될 수도, 읽는 이마다 다르게 마주칠 경이로운 순간이 될 수도 있겠지요. 오직 새로운 작가, 새로운 작품을 소개하겠다는 의지로 센강에 정박한 곡물 운반선에서 원고를 보살폈을 오래전 편집자들의 어떤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할 것입니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레이먼드 카버, 제임스 설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말고는 죄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들이다보니 새로운 작가, 새로운 작품을 읽는다는 설렘을 오랜만에 느꼈다. 하루에 한 편씩 야금야금 읽으려는 계획을 갖고 시작했으나 첫 작품부터 너무 강렬해서 하루를 더 기다릴 수가 없었고 결국은 내리 읽는 방법을 택했다.
문화 차이가 큰 탓에 해설하는 이들이 극찬한 것처럼 모든 작품이 다 좋다고 할 수는 없으나 내 눈길을 잡아끄는 몇 작품은 흥미로웠다. 약에 취한 탓에 모든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 주인공이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기까지 하고, 심지어는 모든 빗방울의 이름까지 알게 되는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를 읽으면서 그럴 수 있다면 약에 한 번 취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욕망을 갖기도 했으니 참으로 위험한 작품이 아닌가! 에비!
-'출장 중인 세일즈맨이 혈관 내막이 벗겨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약을 먹였다. 턱이 아팠다. 나는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일어나기도 전에 모든 일을 감지했다. 어떤 올즈모빌 자동차가 속도를 줄이기도 전에 내 앞에 멈춰 설 것을 알았고, 차에 탄 가족의 다정한 목소리만 듣고도 우리가 폭풍우 속에서 사고를 당할 것을 알았다.'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 중 20쪽.
-'온전한 정신과 절제는 그 자체로 소중하지만, 삶의 비극적인 무감각을 보완해주지는 못한다. 속죄는 훌륭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속죄는 한 번에 한 사람만을 구하고 세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 해설 33쪽
나이 예순여섯에 학회에 참석했다가 심한 야유를 받게 된 주인공이 '계약전문가'인 게이브리얼 래칫과 얽히면서 일어나는 기괴한 일을 그린 <스톡홀름행 야간비행>은 웃기면서 슬프고 '그럴 수 있다면 나도 한 번?'그와 계약이란 걸 해보고 싶게 만든 작품이다. 작가가 되고 싶은 주인공이 새끼 손가락을, 고환 두개를, 왼손을, 귀 한 쌍을, 왼발을, 두 눈을 차례로 주는 댓가로 노벨상까지 받게 되어 고름 투성이인 몸이 바구니에 담긴 채 스톡홀름으로 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마치 악마와의 계약과도 같다. 나라면 무엇을 포기할 수 있으려나? 아직은 그 무엇도 포기할 상태가 아닌 모양이다.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상도 포기하라.)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잼이나 땅콩버터 병의 뚜껑을 따기 위해 거리를 헤매며 아들에게 전화를 하는 동안 아들은 새장 같은 노인들의 집을 구상하며 다시 침대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늙은 새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인문제를 다뤘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부모는 자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지만자식들은 부모를 포기하기도 한다. 슬픈 현실이다.
-'내가 거의 소유하게 된 화장실에 서 있으려니 나와 내 역사 사이 거리가 너무 멀어 도저히 좁혀질 것 같지 않았다. <늙은 새들> 중 306쪽
이밖에도 <궁전 도둑>, <모든 걸 기억하는 푸네스>, <브리지 부인의 상류사회>, <하늘을 나는 양탄자> 등도 꽤나 매력적이었다. 생각날 때마다 다시 들춰볼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다. 다음은 작품과 관계 없이 마음에 들었던 문장들이다.
-'삶은 더러운 메뉴판이었다. 난독증으로 인한 죽음. 그러나 모든 것이 아주 똑같았다.
<어렴풋한 시간> 중 55쪽.
'사람은 차이점에 관해서는 그리 오래 곱씹지 않는다. 정체를 오해할 때 충실할 수 있다. 같은 책 58쪽.
-끊임없는 망각이 생각과 언어와 문학을 위해, 그저 인간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함을 암시한다.
<모든 걸 기억하는 푸네스> 해설 2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