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리테쉬 바트라 감독, 짐 브로드벤트 외 출연 / 에프엔에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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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 지은이 : 줄리언 반스

◎ 옮긴이 : 최세희

◎ 펴낸곳 : 다산책방

◎ 2017년 9월 11일, 초판 42쇄, 267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사과해야 할 인물에 줄리언 반스도 추가됐다. 이 책이 처음 나왔던 2012년에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분명 그때 이 책을 구입했으나 읽다가 던져버렸고 『시대의 소음』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더랬다. 그는 나와 맞지 않는 작가라고 거리를 두기를 몇 해. 그러다 또 무슨 변덕인지 며칠 전 책장 속에 팽개쳐진 『시대의 소음』을 읽은 뒤에야 비로소 이것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욕구가 생겨 중고서점에서 (혹시 또 실망해서 집어던질 것을 대비해. 그럼 전에 있던 책은 어디로?)데려왔다. 내 예감은 틀렸다. 별 다섯 개 획득이다. 진작 못 알아봐서 미안하외다, 줄리언 씨!

화자인 앤서니(토니)와 고교시절 몰려다니던 친구 콜린, 앨릭스, 그리고 에이드리안 핀. 그리고 앤서니의 연인이었던 베로니카가 주요 인물이다. 베로니카는 그와 헤어진 후 에이드리안과 커플이 되었지만 얼마 후 에이드리안은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88쪽) 이유로 자살한다. 앤서니는 마거릿과 결혼하고 딸을 낳고 이혼을 하고 퇴직 후 병원 도서 관리를 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사라 포드, 즉 베로니카 엄마의 유산을 상속받으라는 편지를 받는다. 사라가 남긴 편지에는 에이드리안의 일기장도 그의 것이라는 명시가 되어 있다. 앤서니가 끝까지 일기장을 찾으려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 일기장은 증거였다. 확실한-아마도-증거물. 진부하게 반복되는 기억을 구제해주고 물꼬를 터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136쪽) 그러나 베로니카의 거부로 일기장을 받지 못하자 몇 번의 이메일을 보낸 후에 그녀에게서 일기장 일부의 복사물을 받지만 일기보다는 문서에 가까운 글을 보며 혼란이 가중될 뿐이다. 그리고 그녀가 건네준 건 앤서니가 그 둘을 비난하며 보낸 편지. 아이가 생겨 각자의 인간관계에 독처럼 작용하는 고통이 평생 이어지길 바란다는 그 편지.

그리고 또 다시 그녀를 보게 되었을 때 그녀는 차를 타고 가며 일행 중 누군가를 보라고 했으나 앤서니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다. 베로니카가 화를 내고 가버린 후 그 일행들이 드나들던 펍에서 에이드리안을 닮은 청년을 발견한다. 다시 펍에서 에이드리안의 아들 (에이드리안이라 불리는)과 마주쳤을 때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된다. 그가 사라의 아들이라는 것. 그리하여 '그러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연결고리가 끊길 거라고 할 때, 그와 같은 단절의 책임 소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150쪽) 라고 적힌 이 문서도 해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34쪽) 이라고 파트리크 라그랑주의 말을 빌어 얘기했던 에이드리안 핀. 그가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했던 이 말은 이 책을 관통하는 중요한 문장이다.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11쪽) 우리는 늘 같은 사건을 겪고도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기억을 왜곡시키길 서슴지 않는다. 이소라의 노래처럼 '기억은 다르게 적힌다'.

베로니카가 '아직도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러니 그냥 포기하고 살지그래.'(246쪽)라는 비아냥을 흘릴 때 나는 같이 주눅이 들어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내가 놓친 게 뭐야? 혼자 당황하며 앞으로 뒤로 가기를 여러 번 했다. 나도 앤서니처럼 모자란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했던 나쁜 베로니카. 복선이라고는 베로니카의 엄마와 앤서니 둘이서만 함께 했던 아침 식사, 그리고 앤서니가 둘에게 보냈던 편지뿐인데 어떻게 알아챌 수가 있냐고! 그러나 이런 장치들 덕분에 이야기는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고 유주얼서스펙트급 반전을 선사하는 것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를 안 볼 수가 없었다. 러닝타임 108분의 비교적 짧은 영화, 짐 브로드벤트와 샬롯 램플링이 주연이라니 그것부터 신뢰도 상승이다. 샬롯 램플링은 <45년후>에서 정말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기에 이 영화에서 그녀를 보는 게 어찌나 반갑던지. 게다가 그녀가 읽고 있던 츠바이크의 소설도!

영화는 책과는 약간 다른 부분들이 있지만 그것이 영화를 해치거나 원작을 훼손시키지는 않는 방향으로 흐른다. 좋은 연출과 좋은 배우들이 만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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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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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시대의 소음

◎ 지은이 : 줄리언 반스

◎ 옮긴이 : 송은주

◎ 펴낸곳 : 다산책방

◎ 2017년 5월 29일 초판1쇄, 269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이 책은 이름만 익히 아는 음악가, 1906년 9월 25일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Dmitrii Dmitrievich Shostakovich. 그의 일생을 다룬 소설이다.

파국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진짜 시발점은 그의 명성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의 오페라, 아니면 절대 무오류의 존재이므로 모든 것에 다 책임이 있는 사람,

스탈린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오케스트라의 배치처럼 단순한 것에서 촉발되었을 수도 있다.

32쪽

많은 이들처럼 윤년에 악운이 든다고 믿은 그에게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 것도 1936년 윤년이었다. <므체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공연할 때 스탈린 동무와 정부 인사들 자리가 하필이면 타악기와 금관악기 바로 위였기 때문에 시끄러운 소리에 그들이 진저리를 쳤으며, 그에 아부하는 인사들이 <프라우다>지에 '꽥꽥 꿀꿀 으르렁대는'소리 운운하며 '소비에트 음악에 이러한 경향이 미칠 위험은 명백하다며 이렇게 교활한 재주로 장난치는 행위는 끝이 대단히 안 좋을 수 있다.'는 기사를 실었던 것이다.

매일밤 끌려갈 것에 대비해 짐을 싸고 옷을 다 입은 채 엘리베이터 옆에서 밤을 새우던 그는 결국 그를 지원하던 투하쳅스키 대원수가 반역 음모에 휘말리자 함께 죽음의 위기까지 몰렸다가 벼랑 끝에서 살아난다.

스탈린의 러시아에는 이 사이에 펜을 물고 작곡을 하는 작곡가 따위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두 가지 종류의 작곡가만 있게 될 것이다. 겁에 질린 채 살아 있는 작곡가들과, 죽은 작곡가들.

75쪽

스탈린이 오페라를 보러 갔던 또 다른 여행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의 오페라도 아니고 무라델리의 것이었지만 끝에 가서는, 실은 처음부터, 아무 상관이 없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윤년인 1948년이었다.

100쪽

무라델리가 하필이면 조지아인이었던 스탈린 앞에서 잘못된 역사를 그려냈고 무라델리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므첸스크의 백베스 부인>을 쓴 드미트리 드미트리에비치 쇼스타코비치 탓에 잘못된 길로 빠진 것이라는 변명을 늘어놓은 것이다. 그로인해 쇼스타코비치는 음악학교에서의 지위를 잃었고 당의 지시에 따른 작곡만을 할 것이라는 약속을 해야 했다.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예술은 귀족과 후원자의 것이 아니듯, 이제는 인민과 당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인민이고, 누가 그들을 정의하는가?

135쪽

'모두들 항상 그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에게서 원했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오직 음악뿐이었다.'(158쪽) 그런 그에게 러시아 연방 작곡가 조합 의장으로 임명하기 위해 입당까지 하게 만들었고 자기 의지가 아닌 당의 입이 되어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연설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그는 스탈린상을 여섯 번, 레닌 훈장도 세 번 받았으나 끝없는 공포 속에서 살았던 그는 1976년이 오기 전에 죽기를 바랐다. 자유롭지 못한 예술가의 초상이다.

아침마다 그가 암송하던 옙투센코의 시 <경력> 중 한 대목에서 그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갈릴레오의 시대에, 한 동료 과학자

갈릴레오 못지않게 어리석었다.

지구가 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먹여 살려야 할 대가족이 있었다.

(중략)

그러니 나는 내 일을 하련다

하나를 좇지 않음으로써.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젊은이는 아이러니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중략) 아이러니는 파괴자와

사보타주 주동자들의 언어로 통했기에, 그것을 쓰면 위험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는-어쩌면 가끔씩은, 그는 그러기를 바랐다.- 시대의 소음이 유리창을 박살낼 정도로 커질 때조차-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지킬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일까? 음악, 그의 가족, 사랑. 사랑,

그의 가족, 음악. 중요도는 바뀔 수 있었다.

126~127쪽

'물론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는 있겠지만, 장담하건대 최악의 경우가 될 겁니다.' (21쪽) 쇼스타코비치가 좋아했던 고골의 소설 <코>에 나오는 이 구절은 작곡가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았으나 예술의 자주성을 잃게 된 그의 인생 이야기 그 자체일 것이다. 예술을 정치 도구로 사용하는 비겁한 위정자들때문에 우리는 많은 예술가들을 잃었다. 우리에게도 넘치게 있지 않은가. 일제강점기, 목숨을 바쳐서 저항한 존경받을 인물들은 물론이고, 겁에 질려 어쩔 수 없이 동조한 이들과 직접 나서서 찬양을 바친 이들까지도.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면 우리에겐 훨씬 더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평이 어떻든, 실제 그의 삶이 어떻든 이 책에 나타난 그는 가엾은 예술인일 뿐이다. 꽤 흥미로운 책이긴 했으나 도돌이표를 찍어놓은 듯 반복되는 부분들이 -처음에는 이조차도 괜찮았으나 - 나를 지치게 하고 흥미를 떨어뜨려 별점이 조금 낮아졌다. 과감하게 쳐냈으면 좋았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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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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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디어 라이프 Dear Life

◎ 지은이 : 앨리스 먼로 Alice Munro

◎ 옮긴이 : 정연희

◎ 펴낸곳 : 문학동네

◎ 2014년 1월 10일 1판 8쇄, 437쪽

◎ 수록작품 : <일본에 가닿기를>, <아문센>, <메이벌리를 떠나며>, <자갈>, <안식처>, <자존심>, <코리>,

<기차>, <호수가 보이는 풍경>, <돌리>, <시선>, <밤>, <목소리들>, <디어 라이프>

◎ 내 마음대로 별점 : ★★★★☆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는 짧고 굵은 한 마디가 앨리스 먼로에게 2013년 노벨상을 수상한 이유란다. 구질구질하고 길게 이야기할 생각 없으니 닥치고 읽어보라는 듯한 이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든다. 누누이 말해왔듯 단편은 좋은 작품을 만나기 어려운 분야라 자주 발을 들여놓지는 않지만 저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안 읽어보면 내 손해지.

400여 쪽을 단숨에 읽어내린 후 내 머릿속을 채운 건 바로 이문세의 노래 <슬픔도 지나고 나면>이었다. 이노래가 주제였던 드라마는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지만 노랫말과 노래에 깃든 감성이 닮았다. 사실, 인생이라는 것이 누구의 인생을 막론하고 (물론 성공한 인생, 비참한 인생, 실패한 인생, 평범한 인생 따위로 나눌 수는 있겠으나) 큰 맥락으로 보면 거의 다 비슷하므로.

어디쯤 와있는 걸까 가던 길 뒤돌아본다 / 저 멀리 두고 온 기억들이 나의 가슴에 말을 걸어온다

그토록 아파하고도 마음이 서성이는 건 / 슬픔도 지나고 나면 봄볕 꽃망울 같은 추억이 되기에

서글퍼도 그대가 있어 눈부신 시간을 살았지 / 오래 전 내 그리움에게 가만히 안부를 묻는다

서러워도 그대가 있어 눈부신 시간을 살았지 / 오래 전 내 그리움에게 가만히 안부를 묻는다

다시 내게 불어온 바람 잘 지낸단 대답이려나 / 흐느끼는 내 어깨위에 한참을 머물다 간다

또다시 내 곁에 와줄까 봄처럼 찬란한 그 시절 / 가난한 내 마음속에도 가득히 머물러주기를

어디쯤 와있는걸까 가던 길 뒤돌아본다 / 저멀리 두고 온 기억들이 나의 가슴에 말을 걸어온다

그대를 만나 따뜻했노라고 / 그대가 있어 참 좋았노라고

인생이 노을질 무렵 진심으로 '그대를 만나 따뜻했다, 그대가 있어 참 좋았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상대방이 이성(異性)이어도, 동성(同性)이어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일본에 가 닿기를>에서 그레타가 해리스에게, <아문센>에서 비비언이 닥터 폭스에게, <메이벌리를 떠나며>에서 레이가 리아에게, <자존심>에서 주인공이 오나이다에게, <코리>에서 코리가 하워드에게, <기차>에서 잭슨이 일린에게, <돌리>에서 주인공이 프랭클린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믿는다. 당시에는 상대방으로 인해 아프거나 별다른 느낌이 없었더라도 훗날 그때가 있어 내 삶이 풍요로웠다고 말이다.

이 책에는 14편이 실려있지만 뒤에 네 편<시선>, <밤>, <목소리들>, <디어 라이프>는 자전적이지만 완전 사실은 아닌, 내밀한 작품으로 어찌 보면 에세이에 가까울 수도 있으므로 온전히 앞 10편만을 봤을 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일본에 가 닿기를>이다. (앨리스 먼로와 처음 눈을 마주친 순간이라 생각보다 더 큰 점수를 준 것을 인정한다.) <코리>나 <호수가 보이는 풍경>은 반전이 기다리고 있어 충격을 주었고 나머지 작품들도 고루 좋았다.

<일본에 가 닿기를>

<에코 엔서>라는 잡지에 시 두 편이 실리게 된 그레타는 파티에 초대되었고 그곳에서 '그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그 꿈은 밴쿠버 날씨와 흡사했다. 침울한 그리움, 비에 젖은 꿈결 같은 슬픔, 심장 주위를 서성이는 무거움.'(21쪽) 같은 감정을 갖게 만든 해리스 라는 남자를 알게 된다. 남편 피터의 일 때문에 그해 여름을 딸 케이티와 함게 토론토 친구 집에서 보내게 된 그레타는 출발 전 토론토에 있는 해리스에게 한 통의 편지를 쓴다.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유리병 속에 편지를 넣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바라죠. 편지가 일본에 가 닿기를.

유리병 속 편지는 누구에게 발견될 수도 있고 물결따라 그저 흘러가기만 할 수도 있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발신인도 적지 않은 그 편지가 해리스에게 닿기를, 그래서 신비로움을 간직한 동양의 '일본'처럼 그와 꿈꾸는 것 같은 시간을 갖게 되길 바라는 것이다. 기차가 역에 멈춰섰을 때 해리스는 그녀에게 다가와 처음으로 키스한다. 둘 다 결혼한 사람들이지만 그녀는 그저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릴 뿐이다.

그녀가 해리스를 만났을 때는 취한 상태였으므로 서로를 알아갈만한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었고 단지 그가 키스하려다 말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는데도 그녀는 그를 그리워했다. 그녀가 원한 것은 '그의 밝은 피부는 그녀처럼 붉어지지 않았고 햇볕 때문에 생긴 반점도 없었으며 어떤 계절에든 잘 그을려 있었다. 그의 생각도 그의 피부색 같'(11쪽)은 밋밋한 남편이 아닌 그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 다른 사람이었으리라. 그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자갈>에서 닐이 주인공에게 했던 말로 대변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142쪽) 혹은 <디어 라이프>에서 나왔던 이 말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416쪽)

시간은 쌓여 누군가의 인생이 되고 그 인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일본에 가 닿기를>, <아문센>, <기차>같은 작품에서 기차가 중요한 매개체로 등장하는 것은 그 당시에 기차가 흔한 이동수단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기차에 내리고 올라타는 행위가 누군가는 내 인생에 등장하고 누군가는 퇴장하는 것을, 혹은 내가 인생의 중요한 사건에서 비껴가거나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불어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결국엔 종착역에 내려야 하듯 삶 또한 종착역이 있다는 동질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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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스
폴 하딩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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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팅커스 tinkers

◎ 지은이 : 폴 하딩 Paul Harding

◎ 옮긴이 : 정영목

◎ 펴낸곳 : 문학동네

◎ 2022년 2월 14일 초판1쇄, 237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사람들은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그가 걸어왔던 인생이 주르륵 펼쳐진다고 한다. 어떤 부분은 전체적인 형상만이, 또 어떤 부분은 아주 세밀하게 추억에 새겨진 그대로 떠올려질 것이다. 아직 그 앞에까지 안 가봐서 자세히 모르겠고 그걸 명확하게 고증해줄 이도 없는 시점에서는, 그냥 이렇게 상상으로 그쳐야하기에 작가들이 사후세계나 사후세계로 가는 길에 대한 궁금증을 그렇게도 많이 얘기하는 것 같다.

'고등학교에서 학생지도를 하고 퇴직한 후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로 단체여행을 다니고 삼십 년 동안 시계를 수리했고 손자들의 응석을 받아주었고 파킨슨병에 걸렸고 당뇨병에 걸렸고 암에 걸렸고 거실 한가운데 놓인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25쪽) 건 주인공 조지. '조지 워싱턴 크로즈비는 죽기 여드레 전부터 환각에 빠지기 시작했다.'로 시작되는 이 소설 또한 죽음에 이른 여든의 노인 조지가 인생을 반추하는 이야기다. 천천히 처음부터 차근차근이 아니라 마구 뒤죽박죽인 상태로. 그러나 환각에 빠지기 시작한 건 조지만이 아니어서 독자도 환각에 빠진 듯한 느낌으로 이 책을 읽어나가게 된다.

분명 아픈 조지를 보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갑자기 수레에 잡동사니들을 싣고 장사를 다니던 조지의 아버지 하워드가 불쑥 튀어나오고, 간질발작을 일으킨 하워드 얘기구나 싶으면 횡설수설 엉망진창으로 설교를 하다 병원으로 끌려가 다시는 보지 못한 하워드의 목사 아버지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셋의 인생이 마구 겹쳐서 달리니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누구의 인생 이야기를 보는 건지 헷갈릴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죽음을 앞둔 사람의 기억이 아닐까 생각하면 이것 또한 단점이 될 수는 없다. 조지와 조지의 하버지 하워드, 하워드의 아버지로 이어진 삼 대를 보고 있으면 언뜻 『백년동안의 고독』이 스쳐지나간다. 분위기가 그렇다는 거지만 굳이 접점을 찾자면 셋 다 그 속에 흐르는 피로 고통을 받았다는 점에서.

어린시절 병원에 끌려간 아버지를 그리워한 하워드는 자신의 간질발작으로 충격을 받은 조지가 가출하자 '네가 네 뒤에 끌고 다닐, 아마도 주로 나 때문에 끌고 다닐 슬픔과 씁쓸함과 원한의 자취는 신경쓰지 않기를, 그저 네가 이 춥고 좁은 구역의 테두리 너머로 나아가는 데 성공했기를 .'(142쪽) 바라지만 조지는 멀리 가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병원에 넣으려는 아내의 계획을 알게 된 하워드는 어느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대신 멀리멀리 가고만다. '그의 절망은 아내가 그를 바보로, 쓸모없는 땜장이로, 2페니짜리 종교 잡지에서 엉터리 시를 베끼는 사람으로, 간질병 환자로 볼 뿐,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을 더 나은 무언가로 보려 할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왔다.' (151쪽) 비록 간질발작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지만 낭만적이었던 하워드가 집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해 살면서 두 번째 부인을 만나 약을 먹으며 간질발작을 줄이고, 첫 번째 부인과는 달리 명랑한 그녀와 행복한 시간들을 보낸 건 그래서 참 다행이다.

스스로에게 아버지 생각을 허락하지 않던 조지 워싱턴 크로즈비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기억한 것은 1953년 크리스마스 저녁식사였다. 두 딸, 부인과 함께 즐거운 식사를 하려던 그 순간 문을 두드린 건 열두 살 이후로 보지 못했던 아버지 하워드였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조지. 그래, 그래, 그러마. 잘 있어라.' 이런 아버지의 인사와 더불어 이 세상에도 하직을 고한 조지. 아버지와 함께 하지 못한 많은, 힘들었을 시간들은 그가 어찌 살아왔다는 설명속에서도 사라지고 없었는데 마침내 죽음에 이르러 다시 아버지와 재회하며 닫아둔 시간들이 이어지는 느낌이다.

누워있는 조지에게 책을 읽어준 건 손자들 중 하나가 아니라 하워드나 하워드의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그가 평생 혐오하면서도 그리워했던 아버지. 조지가 시계를 수리했던 이유는 열두 살 이후 정지된 그 시간으로부터 나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사라진 그 시간들을 되돌리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조지가 죽은 뒤 그가 태엽을 감던 시계들도 조용해졌겠지만 조지의 시간은 그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속 쉼없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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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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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어제는 봄

◎ 지은이 : 최은미

◎ 펴낸곳 : (주)현대문학

◎ 2019년 3월 25일 초판1쇄, 175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최은미

1978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 『목련정전』

장편소설 『아홉번재 파도』가 있음. <대산문학상> 수상.

양주에 대해 쓰기 시작한 지 10년째가 되는 봄이었다.

아이를 낳은지 10년째가 되는 봄이기도 했다.

그런 때에 나는, 오래전에 발생한 어떤 죄의 만료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경찰관을 만났다. 나는 물을 등진 절벽 위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소설을 쓰고 있었고,

서른아홉이었다.

49쪽

수진은 아무도 청탁하지 않은 원고를 쓴다. 그리고 그 자문을 위해 이선우라는 경찰관을 만나고 그 만남은 다시 숨겨두고 싶은 여자의 과거로 가 닿는다. 엄마의 외도와 아버지의 자살, 엄마의 외도를 알려준 이웃집 아줌마의 행방불명. 욕망이 없는 남편, 사랑하지만 애정표현 대신 화를 내기 일쑤인 딸 소은과의 메마른 생활은 죽음의 탈을 둘러쓴 그녀가 자초한 일이다.

아버지의 자살은 아버지와 꼭 닮은 자신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그녀는 안다. '나는 어쩌면 아빠가 자살했던 마흔여덟까지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살아 있지 못할 수도 있다.'(92쪽) 이렇게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던 그녀는 이선우와 묘한 감정이 흐르는 사이로 발전하지만 서로의 엄마가 외도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술자리 이후 멀어졌다가, 소은이의 봄소풍 때 숲에 나타난 멧돼지를 이선우가 잡으면서 다시 기회가 열린다. '나를 극복하고 너에게 가는 길은 이렇게도 멀어서, 나는 여전히 매일매일 1층으로, 엘리베이터 밖으로, 유리문 너머로, 니가 나를 기다리던 곳으로, 힘을 다해 달려 나간다.' (153쪽) 그녀는 이선우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이야기는 한 가지 미스테리를 품고 있으나 끝까지 해결하지 않는다. 보는 사람 몫이다. 알아서들 정리해보시지.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 '나는 해결할 일이 있어 그곳에 간 게 아니다. 나는 는 있어도 민원은 없었다. 나는 경찰서에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10쪽)

- '나는 그날 양주에 대해 얘기했다. 양주 북부의 한 읍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양주에서 살던 여자가 양주에서 저지른 일에 대해서.'(12쪽)

- '나는 알 수가 없어서 엄마를 계속 쳐다본다. 엄마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아니, 알 것 같아서, 아니, 처음부터 알았으니까, 아니, 여전히 알 수가 없어서, 엄마의 얼굴을 뚫어버릴 것처럼 쳐다보다가 한마디 한다. "좋아?" "……." "살아 있으니까 좋으냐고." (130~131쪽)

양주에서 일어난 그 일이 수진에게 엄마의 외도를 알려주었던 그 아줌마의 실종을 의미하는 건지, 아버지의 자살과 엄마의 외도를 다룬 것인지, 죄라 칭한 것이 엄마를 미워한 것에 대한 것인지, 실종사건과 관계된 것인지, 양주에서 일을 저지른 여자가 엄마인지 수진인지, 숲에서 검은 늑대를 보는 이유가 어린 날에 목격한 엄마의 외도 장면인지, 아빠의 자살인지 명확하지 않다. 모든 것은 한 덩이로 뭉쳐다닌다. 그럼에도 수진이 그 아줌마의 실종과 관계가 있다는 설정이 있어야 이야기가 좀더 완벽해 보인다.

선우와 이별을 통해 10년간 쓰던 소설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여자, 자신때문에 나타난 검은 늑대라 여겼던 멧돼지를 선우가 잡아줌으로 해서 트라우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여자, 수진. 그녀는 이제 자신이 그렇게 혐오했던 엄마의 외도를 똑같이 따라 할 것이다. 그러고나면 선우처럼 자신의 엄마를 이해하게 될 지도 모른다.

자신이 하는 건 사랑이라고 믿으며.

결혼은 사랑이 존재할 때는 따스한 봄이었다가 사랑이 식어버리면 바싹 메마른 가을로 건너뛰고 끝끝내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겨울이 이어진다. 서로에게 사랑을 허락할 이들에게 어제는 봄이었고 앞으로 다가올 계절은 여름이리라. 강렬하고 뜨거운 계절처럼 그들의 사랑도 그렇게 불타오를 것을 제목에서 예고하고 있는 것 같다. 부디 그들의 만남은 그저 사랑으로 귀결되기를, 그리하여 딸 소은은 수진같은 트라우마를 겪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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