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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평점 :
◎ 책제목 : 디어 라이프 Dear Life
◎ 지은이 : 앨리스 먼로 Alice Munro
◎ 옮긴이 : 정연희
◎ 펴낸곳 : 문학동네
◎ 2014년 1월 10일 1판 8쇄, 437쪽
◎ 수록작품 : <일본에 가닿기를>, <아문센>, <메이벌리를 떠나며>, <자갈>, <안식처>, <자존심>, <코리>,
<기차>, <호수가 보이는 풍경>, <돌리>, <시선>, <밤>, <목소리들>, <디어 라이프>
◎ 내 마음대로 별점 : ★★★★☆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는 짧고 굵은 한 마디가 앨리스 먼로에게 2013년 노벨상을 수상한 이유란다. 구질구질하고 길게 이야기할 생각 없으니 닥치고 읽어보라는 듯한 이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든다. 누누이 말해왔듯 단편은 좋은 작품을 만나기 어려운 분야라 자주 발을 들여놓지는 않지만 저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안 읽어보면 내 손해지.
400여 쪽을 단숨에 읽어내린 후 내 머릿속을 채운 건 바로 이문세의 노래 <슬픔도 지나고 나면>이었다. 이노래가 주제였던 드라마는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지만 노랫말과 노래에 깃든 감성이 닮았다. 사실, 인생이라는 것이 누구의 인생을 막론하고 (물론 성공한 인생, 비참한 인생, 실패한 인생, 평범한 인생 따위로 나눌 수는 있겠으나) 큰 맥락으로 보면 거의 다 비슷하므로.
어디쯤 와있는 걸까 가던 길 뒤돌아본다 / 저 멀리 두고 온 기억들이 나의 가슴에 말을 걸어온다
그토록 아파하고도 마음이 서성이는 건 / 슬픔도 지나고 나면 봄볕 꽃망울 같은 추억이 되기에
서글퍼도 그대가 있어 눈부신 시간을 살았지 / 오래 전 내 그리움에게 가만히 안부를 묻는다
서러워도 그대가 있어 눈부신 시간을 살았지 / 오래 전 내 그리움에게 가만히 안부를 묻는다
다시 내게 불어온 바람 잘 지낸단 대답이려나 / 흐느끼는 내 어깨위에 한참을 머물다 간다
또다시 내 곁에 와줄까 봄처럼 찬란한 그 시절 / 가난한 내 마음속에도 가득히 머물러주기를
어디쯤 와있는걸까 가던 길 뒤돌아본다 / 저멀리 두고 온 기억들이 나의 가슴에 말을 걸어온다
그대를 만나 따뜻했노라고 / 그대가 있어 참 좋았노라고
인생이 노을질 무렵 진심으로 '그대를 만나 따뜻했다, 그대가 있어 참 좋았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상대방이 이성(異性)이어도, 동성(同性)이어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일본에 가 닿기를>에서 그레타가 해리스에게, <아문센>에서 비비언이 닥터 폭스에게, <메이벌리를 떠나며>에서 레이가 리아에게, <자존심>에서 주인공이 오나이다에게, <코리>에서 코리가 하워드에게, <기차>에서 잭슨이 일린에게, <돌리>에서 주인공이 프랭클린에게 그런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믿는다. 당시에는 상대방으로 인해 아프거나 별다른 느낌이 없었더라도 훗날 그때가 있어 내 삶이 풍요로웠다고 말이다.
이 책에는 14편이 실려있지만 뒤에 네 편<시선>, <밤>, <목소리들>, <디어 라이프>는 자전적이지만 완전 사실은 아닌, 내밀한 작품으로 어찌 보면 에세이에 가까울 수도 있으므로 온전히 앞 10편만을 봤을 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일본에 가 닿기를>이다. (앨리스 먼로와 처음 눈을 마주친 순간이라 생각보다 더 큰 점수를 준 것을 인정한다.) <코리>나 <호수가 보이는 풍경>은 반전이 기다리고 있어 충격을 주었고 나머지 작품들도 고루 좋았다.
<일본에 가 닿기를>
<에코 엔서>라는 잡지에 시 두 편이 실리게 된 그레타는 파티에 초대되었고 그곳에서 '그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그 꿈은 밴쿠버 날씨와 흡사했다. 침울한 그리움, 비에 젖은 꿈결 같은 슬픔, 심장 주위를 서성이는 무거움.'(21쪽) 같은 감정을 갖게 만든 해리스 라는 남자를 알게 된다. 남편 피터의 일 때문에 그해 여름을 딸 케이티와 함게 토론토 친구 집에서 보내게 된 그레타는 출발 전 토론토에 있는 해리스에게 한 통의 편지를 쓴다.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유리병 속에 편지를 넣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바라죠. 편지가 일본에 가 닿기를.
유리병 속 편지는 누구에게 발견될 수도 있고 물결따라 그저 흘러가기만 할 수도 있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발신인도 적지 않은 그 편지가 해리스에게 닿기를, 그래서 신비로움을 간직한 동양의 '일본'처럼 그와 꿈꾸는 것 같은 시간을 갖게 되길 바라는 것이다. 기차가 역에 멈춰섰을 때 해리스는 그녀에게 다가와 처음으로 키스한다. 둘 다 결혼한 사람들이지만 그녀는 그저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릴 뿐이다.
그녀가 해리스를 만났을 때는 취한 상태였으므로 서로를 알아갈만한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었고 단지 그가 키스하려다 말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는데도 그녀는 그를 그리워했다. 그녀가 원한 것은 '그의 밝은 피부는 그녀처럼 붉어지지 않았고 햇볕 때문에 생긴 반점도 없었으며 어떤 계절에든 잘 그을려 있었다. 그의 생각도 그의 피부색 같'(11쪽)은 밋밋한 남편이 아닌 그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 다른 사람이었으리라. 그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자갈>에서 닐이 주인공에게 했던 말로 대변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142쪽) 혹은 <디어 라이프>에서 나왔던 이 말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416쪽)
시간은 쌓여 누군가의 인생이 되고 그 인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일본에 가 닿기를>, <아문센>, <기차>같은 작품에서 기차가 중요한 매개체로 등장하는 것은 그 당시에 기차가 흔한 이동수단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기차에 내리고 올라타는 행위가 누군가는 내 인생에 등장하고 누군가는 퇴장하는 것을, 혹은 내가 인생의 중요한 사건에서 비껴가거나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불어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결국엔 종착역에 내려야 하듯 삶 또한 종착역이 있다는 동질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