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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2
켄 키지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 책제목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지은이 : 켄 키지
◎ 옮긴이 : 정회성
◎ 펴낸곳 : 민음사
◎ 2021년 9월 30일 1판 25쇄, 525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타임≫선정 현대 100대 영문 소설, ≪뉴스위크≫선정 100대 명저라는데 일단 표지 사진부터 반갑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잭 니콜슨.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을 읽게 될 경우 문장 위로 배우들 얼굴이 둥둥 떠다녀서 방해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1977년에 개봉한 이 영화를 아직 안 본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읽어가며 내가 감독이라면 잭 니콜슨에게 어떤 배역을 주었을까 상상하는 재미도 있었고. (어차피 주연급 배우니까 고를 건 별로 없어도 화자인 추장일 것인가, 선동가 맥머피일 것인가)
2차세계대전 때부터 병원에 있는 가장 오래된 환자. 키가 2미터에 달하는 거구지만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무기력한 상태로, 귀머거리와 벙어리 행세에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빗자루 추장'이라 불리는 이가 이 책의 화자다. 그가 공포심에 타 버릴 것 같아서 입을 연다고 밝히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회복될 가능성이 있는 비교적 젊은 급성환자와, 평생 병원을 벗어나지 못할 만성환자 그룹으로 나뉘는 이 병원을 움직이는 건 랫치드 수간호사인데, 얼굴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으면서 교묘히 환자와 의사까지도 조종하고, 자신이 정해놓은 규칙을 어기는 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여자다.
기름칠 잘 된 기계처럼 돌아가던 정신병원에 새로운 환자 랜들 패트릭 맥머피가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카드 게임과 내기를 좋아하고 큰 목소리에 당당한 걸음걸이를 가진 붉은 머리 남자. 그는 작업 농장에서 싸움을 하는 바람에 정신병원에 갇혔으나 땡볕에 고생하느니 오렌지주스까지 주는 정신병원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고 놀러온 것처럼 행동한다. 맥머피는 웃음소리도 내지 못하는 환자들이 규칙에 따라 그저 그림자처럼 지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안개가 자욱해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 이제 나는 안다. 안개가 자욱할수록 그 속에 안전하게 숨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맥머피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안전하게 있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우리를 안개 밖으로, 발각되기 쉬운 탁 트인 바깥으로 끄집어내려고 계속 애를 쓴다.' (214쪽)
온갖 돌출행동을 일삼던 맥머피는 수간호사가 싸인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이곳에 갇혀 있을 거라는 얘기를 듣고는 고민에 빠진다. 그런데도 그는 거침없이 행동했고 수간호사가 정해놓은 규칙들을 이것저것 바꾸며 사람들을 데리고 바다낚시를 가기도 해서 , 추장 자신도 '맥머피는 구리선과 크리스털로 미국을 네트워크화하고 있는 '콤바인'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거인'. (421쪽) 으로 생각했으나 수간호사가 심어놓은 의심이 모두에게 퍼져 그는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인물로 낙인찍혀버렸다.
그러나 맥머피가 다른 환자를 도우려다 추장과 함께 전기충격을 받은 뒤 점점 더 환자들 사이에서 영웅시되자, 맥머피가 의식을 되찾을 때마다 수간호사가 전기충격요법을 쓸 것을 예상한 환자들이 그를 탈출시키려고 하지만 빌리와 약속한 대로 여자를 병동으로 불러들여 만나게 해준 뒤 가겠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 여자가 가져온 술과 약방에 있던 감기약에 취해 잠이 드는 바람에 맥머피는 탈출하려던 기회를 놓쳤고, 여자와 함께 자다가 들킨 빌리는 엄마와 친구지간인 수간호사가 엄마에게 말할 것을 염려하여 결국 자살하고 만다. 맥머피는 그를 비난하는 수간호사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라 결국 뇌전두엽절제술을 받고 식물인간이 되어 돌아온다.
'휴게실에 명찰을 붙인 채 이십 년이든 삼십 년이든 누워 수간호사의 체제에 도전하는 자가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는 견본'(510쪽)이 되는 꼴은 절대로 볼 수 없었던 추장은 그의 얼굴을 베개로 눌러버린 뒤 무거운 제어반을 들어 창을 깨고 바깥 세상으로 나간다.
'나는 사회에서 수치스럽게 여기는 어떤 습관에 빠져 버리고 말았어. 그래서 병에 걸린 셈이지. 습관 자체가 원인이 되어 병에 걸린 것은 아니야. 거대하고 공포스러운 사회의 집게손가락이 나를 가리키고 수백만 명이 입을 모아 '부끄러운 줄 알아. 수치. 수치를 알라고.'하고 외치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병에 걸린거야. 사회는 조금이라도 별난 인간이 있으면 그런 식으로 취급해 버리거든.' (486쪽)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잣대는 누가 만드는 것이며, 소수와 다수라는 이분법으로 사람을 갈라 놓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어릴 때 나는 누군가 정해놓은 '비정상'의 범위 안에 들까봐 엄청 불안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도 저 언덕 위 하얀 병원이란 곳에 갇혀 있을까봐 두려웠다. 모든 자유를 잃고 통제하는 대로 따라야 하는 그 삶이 겪어보지도 않았건만 싫고 끔찍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떤 상태를 살아있다고 할 수 있나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
이 병원에 있는 모든 환자들은 내가 두려워했던 그 삶 속에 있는 인물들이다. 정해진 시간대로 움직이는 건 물론이고 정해진 시간이 되어야만 이빨을 닦을 수 있고,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 주말에는 침실을 잠궈서 낮잠을 못자게 하고, 노인들은 안 들린다는 이유로 음악 볼륨을 최대치로 틀어놓아 괴롭힌다. 작은 보상을 주어 서로를 감시하게 하고 고분고분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약을 투여해 하루종일 몽롱한 상태, 제대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놓는다.
맥머피는 그 불 속에 뛰어든 한 마리 거대한 나방이다. 날개를 휘저어 산소를 공급하고 그들이 생각이라는 걸 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자발적으로 병원을 나가는 이들이 생겼으며 수간호사의 위치도 예전같지 않게 되었다.
'팅, 팅글, 팅글, 떨리는 발가락이여. 그녀는 훌륭한 고기잡이, 암탉을 잡아 우리에 넣고…… 철사를 둘러치고 자물쇠를 잠근다. 세 마리 기러기가 무리 지어 …… 한 마리는 동쪽으로 날아가고, 또 한 마리는 서쪽으로 날아가고, 나머지 한 마리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다……. OUT 라는 글자가 나타난다……. 기러기가 재빨리 내려와 너를 낚아채 밖으로 데려간다.'(450쪽)
추장이 할머니와 노래를 부르며 했던 놀이라고 한다. 뻐꾸기 둥지는 정신병원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니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뻐꾸기 둥지에서 낚아채 추장인 나를 정신병원 밖으로 데려간 기러기는 결국 맥머피인 것이다. 인디언 추장이었던 아버지가 정부에게 땅을 빼앗기고 결국 죽음에 이른 뒤 목소리를 내는 법도 잃어버리고 살아온 추장이 쫓겨난 인디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러 가겠다고 했으니, 그도 역시 또다른 기러기가 되어 뻐꾸기들에게 자유를 선사했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