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전철을 타는 일은 고역이다.

특히 인천행 지하철을 탈 때는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밀릴 각오도 하고,

지금 같은 계절엔 더울 것도 예상을 해서 머플러도 풀고 겉옷도 적당히 얇아야

그나마 집까지 오는 길이 무사할 수 있다.

운전을 할 때 나만 열심히 교통법규 지킨다고 사고가 안 나는 게 아니라 방어운전이라는 걸 해야 하듯,

이렇게 기본적인 사양이 갖추어졌다고 해도 불쾌한 귀가길을 만드는 요인은 한두 가지씩 복병처럼 튀어나온다.

유난히 진한 향수를 쓴 여자 옆에 서는 것도 무척 짜증나는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화를 부추기는 것은

옆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이다.

이어폰이라는 좋은 발명품도 있거늘 자신의 핸드폰이 좋다는 걸 그렇게도 자랑하고 싶은지

볼륨을 있는 대로 키워서 드라마 속 인물들이 괴성을 내지르거나 까르륵 거리고 웃는다거나,

효과음까지 적나라하게 들려주는 판이니 책을 읽다가 방해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조용히 생각을 하면서 가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안 난다.

한두 번은 '저러다 말겠지' 했다가도 계속 들려오는 소리 때문에 읽던 곳을 두번이나 반복적으로 쫓고 있는

내 시선을 의식하자 울화통이 치밀어올라 쳐다보니, 깍두기 머리에 빨간 점퍼를 입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아저씨다.

뭐라 한 마디 할 성격도 못 되는 소심함을 탓하며 그저 힐끔거리며 시위할 수밖에.

다른 사람들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쳐다봤다가 얼른 고개를 돌리고야 만다.

일본에서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음악소리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 (메이와쿠)이라 하여

매년 시민단체들이 발표하는 '지하철 이용 꼴불견' 순위에 들어갈 정도라는데

이건 작은 음악소리 정도가 아니라 전철 한 칸에 있는 사람들이 몽땅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혼자 낄낄거리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 뉴스를 보니 그놈의 진단고사 성적 때문에 중학생들도 아침 저녁으로 자율학습을 받느라

더 고생하게 생긴 이야기가 들리던데, 그런 거 말고 제발 예의라는 것도 좀 가르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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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살던 집은 마당이 넉넉해서 나무도 많고 풀도 많고 푸성귀를 심어 먹기도 수월했던 그런 집이었는데, 

제일 먼저 하는 봄맞이 행사는 겨우내 먼지와 바람에 시달려서 너덜너덜해지고 누렇게 바랜 문을 떼어내

마당 가에 쭈욱 늘어놓고 손가락 넣어가면서 뽕뽕 뚫는 장난과 함께 창호지를 죄다 뜯어내 한 쪽으로 뭉쳐두고

문살에 남은 종이조각들은 일일이 수세미로 박박 밀어 나무 본래의 느낌만을 살려둔 다음 볕바라기를 시키고,

남은 한 팀은 창호지를 문살에 맞게 재단하고 풀을 발라 팽팽하게 당겨 붙이고 입으로 물을 뿌려

다 마르고 나서 손가락으로 튕겨보면 '탱!' 소리가 은은하게 울리는 그런 창문을 만드는 일이었다.

햇볕에 하얗게 반짝이는 창호지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둔 채로 몇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닥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서

뭔가 해야 할것 같은 강박관념에 휩싸였고, 그때 창호지 바른 그 정겨운 창문들이 생각났다.

봄맞이 청소를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마당에 다 내다 놓고 볕도 쏘이고 바람도 쏘이고 싶은데 마당이 없으니 그럴 수도 없고 하여

내가 선택한 것은 서랍 정리와 장롱 정리였다.

봄 옷을 꺼내고 겨울 옷은 빨아서 넣고 하는 동안 하는 김에 서랍장까지 손을 댔더니 일은 점점 커지고,

조카들 줄 옷과 갖다 버릴 옷들을 한 켠에 쌓아두고 옷 더미 속에 앉아 서랍 정리를 시작했다.

양말과 속옷들이 엉켜 있는 서랍을 정리하면서 아들놈이 써 놓은 반성문 몇 장과 명함들,

그리고 쓰지도 않을 거면서 일일이 구분해서 정리해 둔 화장품 샘플 들을 몽땅 쓸어서 쓰레기통에 넣고 보니

세 시간이 훌쩍 흘러가버렸다.

에고, 허리야..다리야. 혼자 궁시렁대면서 서랍을 정리하는데 짜잔! 백화점 상품권이 툭 떨어졌다.

누군가에게서 받은 것 같은데 날 안 주려고 몰래 숨겨둔 모양이다.

시치미 뚝 떼고..

"서랍 정리하면서 웬만한 거 다 버렸어. 그래도 되지?" 하고 물으니

"응..거기 뭐 있는 줄도 몰라" 그런다.

"그럼 거기 있는 거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거다?"

"뭐가 있었는데 그래?"

"응..반성문이랑 명함이랑 뭐 그런 거"

"알았어. 맘대로 해"

이야호..낄낄..청소한 수고비 치고 20만원은 나쁘지 않구만!

창호지야, 내 머릿속에 떠올라서 고맙구나.

네 덕분에 돈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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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웃는 모습에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얼굴을 보고 우는 어린아이가 있다거나, 누군가에게 첫인상이 너무 무서워보인단 얘기도 못 들었으니

그럭저럭 나쁜 인상은 아니겠지만, 나 스스로 느끼기에 너무나 차가운 건 사실이다.

차가운 인상 = 지적인 인상도 아니건만 왠지 그 말이 싫지 않았고 그걸 고수하려고 은근히 노력하고 있었던 걸까?

사실 쉽게 웃는 얼굴이 안 되는 게 제일 어려울 때는 사진 찍힐 때 뿐이었고,

그건 또 아주 가끔씩만 날 괴롭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고치려고 하지 않았는데.

오늘 '스펀지 2.0'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나서 (그것도 일 주일이나 지난 프로그램인데)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겨우 2주 노력했을 뿐인데 실험 참가자들은 웃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변해있었다.

얼굴 근육을 자주 사용해주고 아주 웃긴 단어만 연습해도 되는 쉬운 일이었는데

'개구리 뒷다리~'를 발음하면서 가능하면 '리' 부분을 길게- 그러니까 적어도 10초 이상-

유지하라는 게 주문이었다.

모델들처럼 '아에이오우'를 자주 하는 것도 근육을 푸는 좋은 연습이란다.

그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 한 세 시간 동안 개구리 뒷다리를 했더니 입주위 근육이 당길 정도지만

이런 연습을 통해 나도 아름다운 미소를 가지게 된다면 이깟 고통 쯤이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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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시아버님 제사를 지내는 게 처음에는 퍽이나 부담스럽더니 그것도 몇 해를 거듭하고나자

이골이 나서 이젠 혼자 장을 보고 음식을 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

철저한 반복학습에 의한 효과다.

퇴근해서 부랴부랴 옷만 갈아 입고 나물을 볶고 전을 부치고 적을 굽고 하는 동안

엉덩이 한 번 바닥에 부려볼 새도 없이 세시간 반이 지나갔고

서 있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내 다리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할 무렵에야 상을 차리는 일이 완료되었다.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는 게 그냥 나오는 말이 아닌게,

워낙 조금씩 장만해서 그런지 작년 같은 경우는 대략 10만원 선이면 해결할 수 있었는데

올해는 그걸 훌쩍 넘어 17만원 가량이 들어서야 장보기가 마무리 될 지경이니,

내가 작년에 안 한 새로운 음식을 올린 것도 아닌데 물가가 오르기도 참 많이 올랐다.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갈무리해서 냉장고에 넣다가 괜히 심술이 났다.

고사리는 드시는 것, 도라지는 안 드시는 것, 두부랑 동태전도 안 드시는 것,

적은 유별나게 돼지고기로 하라 이르시면서도 안 드시는 것, 조기도 안 드시는 것.

이렇게 안 드시는 것 투성이다보니 며칠 안 가 그대로 음식물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바엔 차라리 식구들이 먹는 음식으로 몇 가지 장만을 하고,

돌아가신 분이 좋아하시던 음식 한 두가지를 더 해서

깔끔하게 상을 차리는 게 낫지 않을까?

어릴 때 음식 버리면 벌 받는다는 교육을 받고 자라기도 했지만, 먹을 게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은데

하느라 힘들고, 안 먹어서 버리고 하는 이중의 낭비는 정말 아깝다.

나중에 시어머니 안 계시면 내 맘대로 제사상을 차리리라 다짐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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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준다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보기에도 아까워서 책을 펼쳐 가운데를 꾸욱 누르는 짓도,

감히 책장을 접어 읽었던 곳까지 표시를 하는 짓도,

더구나 연필로 밑줄을 쫘악 긋는 일 따위는 생각도 해보지 않은 거의 신봉에 가까운 책사랑 때문이었는데

그런 것들도 머리카락 새에 흰 색이 끼어들면서 조금씩 누그러져

친한 사람들에게는 더러 내 책을 대여해주기도 하는 걸 보면서

나 스스로는 굉장히 관대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구나 착각을 하면서 살았다.

그런 착각이 깨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는데 오늘 아침에만 해도 그렇다.

이 작은 방은 오로지 나의 서재인 양 아들 녀석이 들어와 잠깐씩 컴퓨터를 할 때나

남편이 메일을 확인해야 한다고 간청을 해야만 마지못해 컴퓨터 암호를 풀어주고 있는데

매일 바꾸는 암호를 어제는 깜빡 잊고 그저께 암호를 유지했더니만 사단은 벌어졌다.

자판에 비닐을 덮은 채 사용하고 있는 게 다행이지..

그 비닐 위에 김치 국물이 무려 네 군데나 떨어져있는가 아닌가!

밤늦게 라면 먹기를 즐기는 것까지는 좋은데 왜 하필 여기서 그러냔 말이지..쩝.

정말 화가 난다. 관대함이고 뭐고 다시 암호를 알려주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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