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살던 집은 마당이 넉넉해서 나무도 많고 풀도 많고 푸성귀를 심어 먹기도 수월했던 그런 집이었는데, 

제일 먼저 하는 봄맞이 행사는 겨우내 먼지와 바람에 시달려서 너덜너덜해지고 누렇게 바랜 문을 떼어내

마당 가에 쭈욱 늘어놓고 손가락 넣어가면서 뽕뽕 뚫는 장난과 함께 창호지를 죄다 뜯어내 한 쪽으로 뭉쳐두고

문살에 남은 종이조각들은 일일이 수세미로 박박 밀어 나무 본래의 느낌만을 살려둔 다음 볕바라기를 시키고,

남은 한 팀은 창호지를 문살에 맞게 재단하고 풀을 발라 팽팽하게 당겨 붙이고 입으로 물을 뿌려

다 마르고 나서 손가락으로 튕겨보면 '탱!' 소리가 은은하게 울리는 그런 창문을 만드는 일이었다.

햇볕에 하얗게 반짝이는 창호지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둔 채로 몇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닥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서

뭔가 해야 할것 같은 강박관념에 휩싸였고, 그때 창호지 바른 그 정겨운 창문들이 생각났다.

봄맞이 청소를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마당에 다 내다 놓고 볕도 쏘이고 바람도 쏘이고 싶은데 마당이 없으니 그럴 수도 없고 하여

내가 선택한 것은 서랍 정리와 장롱 정리였다.

봄 옷을 꺼내고 겨울 옷은 빨아서 넣고 하는 동안 하는 김에 서랍장까지 손을 댔더니 일은 점점 커지고,

조카들 줄 옷과 갖다 버릴 옷들을 한 켠에 쌓아두고 옷 더미 속에 앉아 서랍 정리를 시작했다.

양말과 속옷들이 엉켜 있는 서랍을 정리하면서 아들놈이 써 놓은 반성문 몇 장과 명함들,

그리고 쓰지도 않을 거면서 일일이 구분해서 정리해 둔 화장품 샘플 들을 몽땅 쓸어서 쓰레기통에 넣고 보니

세 시간이 훌쩍 흘러가버렸다.

에고, 허리야..다리야. 혼자 궁시렁대면서 서랍을 정리하는데 짜잔! 백화점 상품권이 툭 떨어졌다.

누군가에게서 받은 것 같은데 날 안 주려고 몰래 숨겨둔 모양이다.

시치미 뚝 떼고..

"서랍 정리하면서 웬만한 거 다 버렸어. 그래도 되지?" 하고 물으니

"응..거기 뭐 있는 줄도 몰라" 그런다.

"그럼 거기 있는 거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거다?"

"뭐가 있었는데 그래?"

"응..반성문이랑 명함이랑 뭐 그런 거"

"알았어. 맘대로 해"

이야호..낄낄..청소한 수고비 치고 20만원은 나쁘지 않구만!

창호지야, 내 머릿속에 떠올라서 고맙구나.

네 덕분에 돈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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