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뮤지컬 - 전율의 기억, 명작 뮤지컬 속 명언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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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정말 나같은 연뮤덕에게는 뎡말 엄청 베리베리 뜻깊은 책이 나왔다. 그 이름하야 #방구석뮤지컬. 와 진짜T_T!!! 출판계에선 맨날 미술전시 같은 책만 나와서, 왜 뮤지컬같은 공연 책은 안나오나 내심 불만이었는데, 크흡. 육아로 인한 휴덕중인 나지만, 그래도 연뮤덕으로써 이 얼마나 기쁜일인가!! 이건 뎡말 만세삼창을 해도 과언이 아니다. 꺄우!!





당장 내 눈앞에 보인 뮤지컬 음반 몇개 꺼내서 이 책과 같이 찍어봤다ㅋㅋㅋㅋ. 뮤지컬 관련 책이 나온게 얼마나 기뻤으면, 이런 사진까지 찍겠냐고요. 크흡. 맘같아선 각종 뮤지컬 리플릿이랑 티켓북까지 쫙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나열해서 찍고싶었지만, 아기보느라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없고ㅋㅋ. 실은 책 읽을 시간도 주고, 이런 사진까지 찍을 수 있게 도와준 우리 뿡뿡님께 그저 감사할 따름...히히히ㅣ히히히히히.




방구석 미술관이라는 책을 읽어본 사람라면, 이 책의 구성이 어떻게 될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각각의 뮤지컬에 대한 의미나 스토리등을 해설해주는 일종의 해설서랄까? 자, 그럼 구성은 대충 짐작이 되니, 중요한건 모다? 이 책이 얼마나 많은 뮤지컬을 담고 있는가!! 그 중에서도 덕간적으로 제일 중요한건,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을 얼마나 많이 담고 있는가!!!! 암, 이게 젤 중요하고 말고 ㅋㅋㅋㅋㅋㅋ



이 책속에 담겨 있는 뮤지컬은 총 30편. 라이센스, 창작, 대극장, 중극장, 소극장 모든 뮤지컬을 망라했다. 고로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 한, 두 편은 무조건 있다는 이야기다ㅋㅋㅋㅋ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도 꽤 많이 포진되어있어서 행복! 여기에서 플러스 점수를 더 준다면, 해당 뮤지컬 넘버 가사들도 수록되어있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넘버의 가사들이 수록된건 아니지만, 적어도 킬링넘버를 포함해서 한 열댓곡정도? 엌 이 정도면 거의 다 수록된건가 ㅋㅋㅋ 뮤덕들이라면 자기도 모르게 가사보면서, 넘버를 부르게 된다. 물론...내가 그랬고요^_*



그리고! 대체 어떤 뮤지컬을 봐야 잘 봤다고 소문이 날지 고민하는 뮤지컬 초심자들은, 이 책에 실려있는 30편의 뮤지컬 중에서 랜덤으로 한 개만 골라서 보러가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고 보장한다. 한마디로 이 책은 뮤지컬 초심자에게도, 뮤덕들에게도 여러모로 소중한 책...♡



이 책 「방구석 뮤지컬」에는 정말정말 내가 사랑하는 뮤지컬이 넘 많이 담겨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선정한 일부 공연에 대한 내용만 스윽 옮겨본다. 근데근데근데.. 이 책에 내 최애 뮤지컬 <베르테르>가 없는건 넘 슬포요......서희작가님..흑흑.



▶ 아름다운 부랑자의 노래, 노트르담 드 파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막이 오르자, 시인 ‘그랭구아르’의 노래가 울려 펴지며 대성당의 높은 벽이 펼쳐집니다. 이토록 장중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우리를 성당의 유리와 돌에 글을 새기던 대성당의 시대로 이끌며, 1482년 파리에서 일어난 특별한 연애사건을 들려주겠노라 합니다. p 014



이렇게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 대한 내용이 시작된다. 어쩜, 눈 앞에 정동하 그랭구와르가 나타나서 “아름다운 도시 파리, 전능한 신의 시대. 때는 1482년, 욕망과 사랑의 이야기♬(‘대성당들의 시대’)” 를 불러주고 있는 느낌적인 느낌. 크흡. 내 최애 뮤배가 홍광호 배우다보니, 노담은 나에게 특별하디 특별한 작품이다. 홍을 공연으로 처음본게 바로 2013년 노담이었으니까!!!!



뭐, 노담은 뮤지컬 초심자라도 대부분 그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초심자 입문 공연으로도 최적이 아닐까 한다. 노담을 모른다고? 하지만 분명 이즈니 애니메이션 <노틀담의 꼽추>는 들어봤을껄? 라떼's 어린시절 디즈니 애니메이션 시청은 국룰이니까 ㅋㅋㅋㅋ



에스메랄다의 안타까운 인생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는 다른 세 주인공의 감정, 고뇌, 인생이 대성당의 시대와 얽혀 비극을 빚어냅니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운명에 저항하기도 하고, 운명을 원망하기도 하고, 운명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각자의 삶을 빛나게 하는, 가치있는 무언가를 지켜내고자 분투하면서 말이죠.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루담」을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운명과 비극의 시대 속에서 몰아치는 감정을 웅장한 노래와 세밀한 연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p 024




▶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맨 오브 라만차


이야기는 세르반테스가 감옥에서 종교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직접 쓴 희곡 돈키호테를 연기하며 시작됩니다. 주인공 ‘돈키호테’는 사실 ‘알론조’라는 이름의 노인입니다. 그는 기사 이야기를 너무 많이 읽어 반쯤 미쳐버리고 스스로가 돈키호테라는 기사라고 믿게 됩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존경하고 섬기는 심복 ‘산초’를 데리고 모험을 떠납니다. 그리고 머물게 된 여관에서 부엌일을 하는 여자 ‘알돈자’를 만나게 됩니다. 돈키호테는 알돈자를 자신이 꿈에 그리던 여성이라고 믿고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는 뜻으 ‘둘시네아’라고 부르며 우상처럼 받듭니다. p 072



라만차는 내 개인적으로, 최애 뮤지컬 라인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배우가 인질이고, 넘버가 인질이다보니..... 볼 수 밖에 없는 뮤지컬이다. 그렇다고 안좋은 공연도 아닌데, 굳이 내가 최애 뮤지컬 라인이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알돈자의 상황에 대한 표현이 넘 성인스럽게 적나라하다보니, 하하하. 관람나이 제한도 없는 판에 그런 표현들이 내 맘엔 썩 내키지 않는다. 뭐, 같은 의미로 노담도 비슷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배우가 인질이고, 넘버가 인질이다보니 회전문을 돌긴 돈다.



특히 인질인 넘버 중 하나가 지킬의 사골 이순간과 함께 나란히 1,2위를 다투는 노래다. 노래를 좀 한다고 하는 남자들은 꼭 따라부르는 노래 ‘The Impossible dream’. 솔직히 너무 많이 들어서 질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홍이 부르면 나도 모르게 또 집중해서 듣는 그 노래..!!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아! 라만차의 재간둥이 ‘산초’를 빼놓으면 섭하지. 그냥봐도, 대놓고봐도 산초는 누가뭐래도 알론조 바라기인데, 그 와중에도 누가 산초를 연기하느냐에 따라 산초의 색깔이 또 달라진다. 내가 봤던 산초는 김호영 산초, 이훈진 산초였는데 크흡. 두 분 모두 매력 터지는데, 그 와중에 김호영 산초는 정말...ㅋㅋㅋㅋㅋㅋ 세상에세상에 이렇게 투머치토커 산초를 보았나. 같은 대사인데도 왜 더 말을 많이 하는 거 같지? 내 기가 빨려들어가는 느낌..뭐 그런 느낌을 받았더랬다.




연극은 새로운 결말을 맞이하고, 세르반테스는 재판을 시작합니다. 그의 연극을 지켜본 도지사는 세르반테스를 격려합니다. 세르반테스는 여러분 모두가 라만차의 기사라며 그들을 응원합니다. 죄수들은 모두 세르반테스를 향해 노래하고 그렇게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결말을 맞습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고전으로써의 영향력에 작가의 삶을 더해 신선한 상상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돈키호테의 기묘한 서사는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운 동시에 가슴을 뛰게 하는 모험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운명을 이겨낼 용기, 그리고 그 용기가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따는 사실까지. 돈키호테의 우스꽝스러운 행동 속에 감춰진 빛을 관객들은 어느 순간 마주하게 됩니다. p 079



▶ 날 할퀴는 사랑도 두렵지 않아, 시라노


17세기 파리, 훌륭햔 시인이자 검객으로 지혜와 힘을 두루 갖춰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하지만 그에게는 단 하나의 커다란 결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형적으로 큰 코로 인해 추한 외모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의 외무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록산’을 사랑하지만 마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록산은 시라노와 같은 영혼을 가져 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시라노처럼 자신의 세계를 아름답게 창조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여성입니다. 시라노가 콤플렉스에 사로잡혀서 고민하는 사이, 록산은 극장에서 록산의 가방을 훔친 소매치기를 잡아준 ‘크리스티앙’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크리스티앙은 시라노가 대장으로 있는 ‘가스콘 부대’의 대원으로 귀족 가문 출신이며, 시라노와 달리 잘생긴 외모를 지녔습니다. p 192



내 최!애! 뮤지컬 <시라노>. 진짜 한번보고 두번보고 세번보고 네번보라고 강력 추천하고 싶은 시라노다. 진짜 홍의 시라노는 정말 처연하고, 안쓰럽고, 흐엉ㅇ엉ㅇ엉T_T. 근데 또 시라노만 그런게 아니라, 록산이랑 크리스티앙도 짠내나. 하. 거기다 넘버 하나하나 전부 소중함♡



시라노 공연후기는 내 블로그에도 리뷰가 남아있어서, 간만에 리뷰를 다시 들춰봤는데. 우와. 이 책이랑 같이 보니까 진짜 내 눈앞에 시라노가 나타난것 같고, 시라노가 내 앞에서 “왜 남의 코를 쳐다봐! 코가 커야지 사람이 품위가 있는 법! 드 높은 콧대는 자존심이 세 당당할 수 밖에!” 하고 호통치고 있고요? 시라노 이 마성의 매력을 지닌 남자^_T.




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라노 넘버는 ‘거인을 데려와’, ‘가스콘 용병대’, ‘나 홀로’ 이 세 곡이다. 그도 그럴게, 이 세 곡으로 시라노를 완벽하게 이야기 할 수 있거든!! 하지만 그래도 역시 제일 최애이자, 킬링넘버는 ‘나 홀로’인듯!! 근데...공연을 보고 나면 이상하리만치 머리속을 맴도는 넘버는 ‘가스콘 용병대’ 라는게 함정 ㅋㅋㅋ



▶ 내가 사는 이유, 여신님이 보고계셔


국군대위 ‘한영범’은 특별 임부를 부여받고 인민군 네 명을 포로수용소로 이송하기 위해 부하 ‘신석구’와 함꼐 이송선에 오릅니다. 하지만 포로들은 배 위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기상악화로 이송선이 고장나면서 여섯 명의 군인은 모두 무인도에 고립됩니다. 한국전쟁 시기의 가상의 섬에서 배를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인민군 ‘류순호’뿐이었지만 그는 전쟁 후유증으로 제정신을 잃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게 됩니다.다른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점점 인간성을 잃어가고 영범은 인민군들에게 인질로 잡히기까지 합니다. 인질이 된 영범은 순호가 악몽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상상 속 여신님의 존재를 만들어 줍니다. 순호는 여신님을 상상하며 안정을 찾아갑니다. 배를 고치기 위해서는 순호가 필요했기 때문에 인민군은 영범과 순호가 만들어낸 여신의 존재에 함께 어울리게 됩니다. 그들의 작전은 ‘여신님이 보고 계셔 대작전’으로 그들은 가상의 여신님을 위한 규칙을 세우고 지키기 시작합니다. p 247



나에게는 대표적인 힐링 뮤지컬이었던 <여신님이 보고계셔>. 이 챕터의 앞부분을 읽는 순간부터 제목과 동일한 넘버가 내 귓가에서 맴돌기시작했다. “꿈이 아파 잠들지 못하는 밤, 작은 숨소리마저 아려와, 그림자 뒤로 숨고만 싶은 밤, 누군가의 온기가 필요한 밤, 홀로 외로운 날 받아준, 따스한 품이 간절해지는 밤♬”. 언젠가부터 대극장 회전문 도느라, 대학로 뮤지컬들을 꽤 많이 놓쳐왔었는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난 대극장보다는 대학로 연극, 뮤지컬을 참 좋아라했는데T_T. 거의 주말마다 대학로 출석체크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인데...!!!



여신님을 보던 그 시기는 내가 정말 대학로에 미친듯이 들락날락했던 시기다. 당시만해도 아무리 비싸다고해도, 대학로 티켓값이 대극장에 비하면 소소한 수준이었고, 심지어 할인도 정말 많이 풀어줘서 이 때는 정말 사의찬미, 난쟁이들, 덕혜옹주 등 매 주마다 가서 솔찬히 보고왔었다. 하지만 덕들이 호구라고, 언젠가부터 대학로 티켓값이 슬금슬금 오르고, 할인도 점점 사라지고... 그러느니 걍 대극장 회전문 돌겠어! 라는 생각에 발길을 끊게 된듯T_T.



그래도 대학로가 여신님 같은 힐링 뮤지컬도 있고해서 참 좋았는데. 뭐 어차피 난 강제휴덕중이니 대학로고 뭐고....흑..




▶ 선과 악의 가면을 벗으며, 지킬 앤 하이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스의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입니다. 1997년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현재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주인공 ‘지킬’은 영국 런던의 의사로 정신분열증을 앓는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지킬은 아버지와 같은 정신분열증 환자를 위해 인간의 성격을 분리하는 약을 만들고자 합니다. p 276



드디어 나왔다, 사골이순간의 중심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1인 2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지킬과 하이드를 오가는 홍의 연기를 볼때마다 정말 소오름 그자체였지. 지킬과 하이드의 연기가 제일 극한으로 달아오르는 넘버인 “confrontation”는 정말 언제봐도 소오름!!!!! 물론 지킬 유명넘버는 사골이순간이지만.....



근데 참 이상한게, 사골이순간은....결혼식 축하곡으로도 넘 많이쓰이는데, 대체 왜..........그럴까? 저얼대로 사랑노래가 아닌데, 대체 왜...? 진짜 결혼식장 갔다가 누가 저 노래 부르면, 그때마다 동공지진@.@ 지킬을 본적이 없기 땜에 결혼식장에서 부르는거겠지.....허허허. 



결혼식 날, 불안정하게 잠들어있던 하이드가 깨어나 지킬과 싸운 적 있는 ‘스트라이드’를 살해하고 엠마를 인질로 삼습니다. 엠마는 하이드의 뒤로 물러난 지킬에게 말을 걸어 순간적으로 하이드 대신 지킬을 불러냅니다. 지킬은 더이상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어터슨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합니다. 어터슨은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하지만 지킬은 그의 칼에 스스로 뛰어들어 버립니다. 지킬은 결국 다른 이들과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합니다. 더 나은 순간을 향해 나아가며 미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바람과 그의 비해 미약한 인간의 능력, 그리고 만연한 악을 통제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선함에 보내는 안타까운 찬사와 응원을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아름답고 깊이 있는 가사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p 286



책을 다 읽고 간만에 티켓북을 펼쳤는데, 크흡. 내 첫 공연이 2013년 홍광호 배우 첫 단콘이었네? 뮤지컬도 아니고 ㅋㅋㅋㅋ 홍배우 단콘이 첫 공연이었다며. 허허허..ㅋㅋㅋㅋㅋ 뭐 이 이후로도 홍 콘서트는 죄다 다녔고, 뮤페도 가고, 심지어 문감 단콘에 게스트로 출연할 것 같아서 거기도 가고(실제로 홍 나왔고 게스트로 나왔고ㅋㅋㅋ) 진짜 홍 따라서 열씸히도 다녔넹!



그렇게 티켓북 하나하나 살펴봤는데...............아유, 저 티켓값들 생각하면 돈백이 아니라 돈 ㅊ.........크흡. 심지어 회전문도 자주 돌아서(특히 홍광호, 지창욱 주연작^,^) 같은 극 티켓이 대체 몇개여. 거기다 지방까지 따라갔네??? 경남 진주가 왠말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회전문을 미친듯이 도는 나를 보며 주변인들이 혀를 끌끌 차기도 했는데, 하하ㅏ. 그때마다 아무리 같은 공연이라도 매 회차마다 느낌이 다 다르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더랬다.



같은 뮤지컬을 여러차례 보다보면,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회전문’을 돌다보면 주변에서 이런 질문을 듣고는 합니다. 도대체 왜 같은 공연을 또 보냐고요.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같은 공연”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무대에 오를 때마다 달라지는 배우의 연기와 오케스트라의 화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스태프가 만들어내는 순간의 감동과 전율은 매번 색다른 공연을 만들어냅니다. p 006




어쩜, 저자맘 is 내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저렇게 멋지구리하게 써주시면...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써먹겠습니다. 물론 강제휴덕기간이 언제 종료될지 모르지만요..하하 ^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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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9-26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로님 최애 뮤지컬이 ‘시라노‘군요
넘 좋죠!
시라노 넘버의 가사도 정말 좋더라고요.
저는 ‘나 홀로‘를 제일 좋아해요.

impossible dream
confrontation
홍광호
두 말할 필요가 없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넘버는
레미제라블의 ‘Bring him home‘ 입니다.

피로님 애기가 아직 많이 어린가요?
한 번씩 남편에게 애기 맡기고 관람 다녀오면 어떨까요?
어서 강제 휴덕기간 탈출하시기를요^^
저도 이 책 찜합니다**

피로 2022-09-28 11:33   좋아요 1 | URL
즈이 애기...이제 4개월이에요 엉엉엉엉 ㅠㅠㅠㅠㅠ
2020년초부터 코로나 때문에 공연을 멀리하고, 그 이후로는 임신, 출산으로 인해 지금까지 강제 휴덕이 되어버렸어요..흑 ㅜㅜㅜㅜㅜㅜㅜ

저도 레미제라블 엄청 좋아해요! 제 개인적으로는 Do you hear the people sing 이 넘버가 젤 좋드라구요>_<
 
오싹한 의학의 세계사 - 웃기고 때로는 속이 뒤집히는 질병들
데이비드 하빌랜드 지음, 이현정 옮김 / 베가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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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재미있는 세계사 책을 읽었다. 역시 세계사책은 통사보다는 이런 미시사가 훨 흥미롭고 재미지다. 아주 완전 내타입이야 내타입!! 더군다나 이 책의 주제가 ‘의학의 역사’인데, 때마침 요 몇년간 코로나19에 맞닥뜨리면서 많은 매체에서 의학의 역사에 대해 보고 들었단 말이지(말이 의학의 역사지, 고대중세근세로 가면 크...의학이 아니라 환자들 운의 역사일지도 ㅋㅋㅋ). 그래서 그런지 아는 내용도 꽤 나오고, 진짜 상상을 초월한 의술(?)도 나오고, 정말 2022년을 살고 있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무엇보다 세계사는 한 편의 이야기가 길면 이상하게 눈이 안가는데, 요건 1편당 길어야 몇 페이지정도. 짧게짧게 읽기에도 넘나 편한 것! 근데 실려있는 이야기 편수는 무려 118편. 아니 대체 현대의학이 들어오기전까지 이렇게나 많은, 기상천외한 의술(?)이 있을 거라곤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요 ㅋㅋ


한편한편 읽다보면, 진짜 흑사병 유행당시 저승사자같은 까마귀복장(?)으로 유명한 의사들은 암것도 아니었구나 싶고. 분명 118편이란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읽다보면 TV프로그램 서프라이즈에 나올법한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이 넘 많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권 후딱 읽게 된다. 뭐랄까, 킬링타임용으로도 제격인 역사책, 세계사책 이랄까?





읽으면서 정말 기상천외한 의학의 역사 중 일부만 아주 짤막하게 옮겨와본다.


▶ 손수레에 자신의 불알을 올려놓았던 사내들?


환부가 부풀어 오르고 딱딱해져 코끼리 피부처럼 변한다는 상피병. 놀랍게도 일부 상피병 환자들은 실제로 자신의 불알을 외바퀴 손수레로 옮겨야만 했다. 음낭이 너무도 크게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다. 신체 형태의 변질을 불러오는 불쾌한 상피병은 아프리카 곳곳과 인도, 남아시아 등에서 발견된다. p 032



▶ 왜 빅토리아 여왕의 탈장은 진단받지 못했을까?


제임스 리드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주치의가 된 것은 1881년이었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은 62세로 조금 과체중이었지만 전반적으로 건강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건강상태에 민감해서 리드와 빅토리아 여왕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생략) 그런데 빅토리아 여왕이 1901년에 사망하고 리드가 그녀의 시체를 검사했더니, 여왕이 탈장을 겪고 있었으며 자궁탈출증도 심한 상태였음이 드러났다. 이 두가지 병은 모두 진단된 적도 없었다. 왕실의 예의범절 상 여왕이 옷을 벗은 상태로 진찰받는 것은 금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왕이 사망하기 6일 전까지 리드는 여왕이 침대에 누워있는 것 조차 볼 수 없었다. p 073



▶ 바보와 등신의 차이는 뭘까?


간단하게 말해 바보와 등신의 차이는 ‘IQ25점’ 만큼이다. 적어도 예전에는 이게 정답이었다. 미국의 첫 IQ 검사에서는 바보나 등신이나 천치 따위는 비하가 아닌, 중립적인 용어로 쓰였다. 우선, 바보는 IQ가 51~70 사이의 성인을 일컫는다. 또 등신은 좀 더 낮은 IQ 26~50 사이의 성인이다. 마지막으로 천치는 셋 중에서 가장 지능이 낮은 IQ 0~25 사이의 성인을 의미한다. p 075



▶ 전쟁터에서 생긴 상처를 소변으로 씻어냈다고?


소변은 수 세기 동안 전쟁터에서 발생한 상처를 씻어내는 소독약 역할을 해왔다. 깨끗한 물이나 다른 소독약이 없었을 때의 이야기다. 물론 지저분하게 들리겠지만, 소변을 본 사람이 요로감염증만 아니라면 소변은 대게 살균된 상태다. 따라서 소변을 소독약으로 사용하는 것은 나름 효과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소변은 전쟁의 와중에서 얻을 법한 다른 연고들보다는 더 선호됐다. p 091



▶ 소독약은 누가 발명했을까?


영 괴과의 조셉 리스터는 ‘소독 수술’이라는 개념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수술실에 석탄산 용액을 뿌리고, 같은 용액으로 수술 도구와 붕대, 심지어 환자의 상처까지 소독하는 것이었다. 리스터의 위생개혁 덕분에 수술 후의 감염과 사망률은 극적으로 감소했고, 그의 주장은 널리 수용되었다. (생략) 리스터는 수술대 주위를 청결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수술실 전체는 병원의 다른 시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리스터 자신도 매일 같은 수술용 앞치마를 썼다. 앞치마에는 피가 두껍게 굳어있어 반짝거릴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오늘날의 수술은 ‘방부나 소독’보다는 ‘무균’의 원리를 따른다. 그러니까 단순히 수술과정에서 세균을 없애는 개념이 아니라, 미리 수술실과 도구들에 세균이 완벽하게 없도록 준비하자는 이야기다. p 150



▶ 실수로 환자의 불알을 자른 유명한 외과의?


로버트 리스턴은 19세기의 유명한 외과의사였다. 그는 복잡한 수술도 뛰어난 기술과 속도로 소화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따. 마취제를 사용하기 전에는 수술 속도가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생존율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는데, 리스턴은 다리를 절단하고 절단 부위를 봉합하는 데 단 90초면 충문했다고 한다. (생략) 하지만 속도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수술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일이 가끔 생겼다. 한 번은 리스턴이 환자의 다리를 겨우 2분 30초만에 절단했는데, 그만 그의 왼쪽 고환까지 잘라버리는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 또 절단 수술을 관람하던 관객들이 그가 조수의 손가락 두 개와 어떤 유명한 참관인의 코트 자락까지 한꺼번에 잘라버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저명한 관객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 뒤로 절단 수술을 받은 환자와 손가락이 잘린 조수도 상처에 생긴 괴저로 사망하고 말았다. 후일 위대한 의학 사가인 리처드 고든은 이 사건을 ‘역사상 치사율이 300%에 이른 유일한 수술’이라고 묘사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았다. p 149~150



▶ 아기들은 엎드려 자야할까, 아니면 똑바로 누워 자야할까?


미국 소아과 의사 벤저민 스폭 박사의 <유아와 육아의 상식>은 육아 부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 중의 하나다. 책에서 스폭 박사는 아기를 엎드려 재우라고 권유했다. 그의 논리는 아기들이 똑바로 누워서 자면 밤에 구토 할 때 토사물에 질식할 위험성이 더 크다는 거였다. 스폭의 책 덕분에 이 충고는 그야말로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 충고에 오류가 있음이 드러났다. 소위 ‘요람사’라 불리는 유아 돌연사 증후군 연구에 따르면 엎드려 자는 것은 요람사의 위험성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명쾌한 이유는 알려진 바 없지만, 추측성 이론들은 많다. 엎드려 자는 아기는 ‘반복 순환’되는 공기를 들이마실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한가지 이론이다. 이런 공기에는 이산화탄소가 더 많이 축적될 수 밖에 없다. 그런가하면, 아기가 엎드려 자면 스스로 질식할 위험성이 더 크다는 것이 또 다른 이론이다. 세번째 이론은 엎드려 자는 아기는 침대 매트리스에 있을지 모를 독성이나 곰팡이를 들이마실 위험이 더 크다는 것이다. p 167~168



이 외에도 이 역사책에서는 딸국질은 왜 하고, 어떻게 치료하는지, 껌을 소화하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보름달이 뜨면, 정말로 사람들이 미치는지 등 정말 기상천외한 의학의 역사가 줄줄이 사탕으로 끌려나온다. 만약 TV프로그램 서프라이즈 작가가 이 책을 본다면.... 서프라이즈 안끝나겠는데ㅋㅋ?



일단 확실한 건 과거의 의사는.....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사’는 확실히 아닌 너낌적인 너낌^_^. 그냥 환자들이 ‘병으로 빨리 죽느냐, 치료로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느냐’ 둘 중 하나를 골라야하는, 어떻게 죽고 싶은지를 고르는 듯한 선택지를 주는게 과거의 의사가 하는 의료인것 같달까. 하하하하ㅏ하하ㅏㅏ. 진짜 의료사고라고 칭하기도 어려울정도로 ‘의료인..가?’하는 것도 많고! 정말 내가 2022년을 살고 있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하는 생각이 미친듯이 몰려온다. 하하하하.



진짜 불과 백년 전까만해도, 조금만 심하게 아팠으면 바로 저세상 행이었다는게! 그마저도 아파서 죽는것보다 기상천외한 치료받다가 죽는다는게!!! 넘 무서운 사실인것이다..........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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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9-22 1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옮겨 주신 에피소드만 봐도 이 책 재미있겠어요.
피로님^^
 
조선왕실의 자녀교육법 - 혜경궁 홍씨, 인수대비, 사주당 이씨에게서 조선시대의 총명하고 어진 자녀 교육법을 배운다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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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꽤 오래전부터 우리집에 있던 책이다. 내가 학찰시절 산건지, 아니면 누가 준건지 당최 언제부터 우리집에 있었는지 알수 없는 책이랄까. 그토록 오래 있었는데, 읽어본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마.. 뿡뿡이를 낳았기 때문에 이 책에 눈길이 간게 아닐까 싶기도?




우리는 임신을 하면 그렇게나 ‘태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산모만 편하면 될것인데, 뱃속 아가를 위해서 고놈의 태교태교태교. 물론 나는 태교다운 태교는 하지 않았다. 산모인 내가 편하면 뱃속 아가도 편할텐데, 굳이 찾아나서서 태교를 할 필요가. 그저 내 취미생활인 독서를 계속했고, 틈틈히 블로그도 하고, 포켓몬고도 하고. 진짜 나 편한일만 했다............는 내 TMI. 우리나라에서 고놈의 태교를 입에 달고 있는건, 이 태교가 옛날부터 중요하게 여겨져서 그런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죽하면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최초의 임신태교 교육서까지 나왔다. 바로 사주당 이씨가 저술한 『태교신기』. 난 드라마 <철인왕후>에서 태교신기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냥 드립인줄 알았는데, 와- 진짜 있는 역사적 기록물이었다는게 너무 소오름이었다. 더 놀라운건 현대의 태교보다, 조선의 태교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아기를 갖는 과정조차도 엄격하게 따졌다. 우리가 아주 잘 알고있는 허준의 『동의보감』에서 조차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생각해보면, 사극에서 종종나오는 ‘합방일’이라는 것도 왕과 왕비사이에 아기를 갖을 최적의 날짜를 계산해서 합방을 하게 하는거니 말이다. 그래봤자 애바애라고, 성군될 놈은 성군되고 암군될 놈은 암군될 터인데. 허허허 ㅋㅋㅋ


아버지가 아이를 갖게하는 것과 어머니가 아이를 뱃속에서 기르는 것과 스승이 아이를 가르치는 것은 한가지이다. 훌륭한 의사는 병들기 전에 치료하고 잘 가르치는 사람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 가르친다. 그러므로 스승이 10년동안 가르치는 것보다 어머니가 뱃속에서 10개월간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10개월간 뱃속에서 기르는 것보다 아버지가 하룻밤에 아이를 갖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p 036 『태교신기』 中



자녀를 갖고자 한다면 부인은 반드시 월경이 순조로워야 하고, 남자는 반드시 정액이 충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욕정을 줄이고 마음을 깨끗히 하는 것이 상책이다. 욕정을 줄이면 함부로 교합하지 않아야 기운과 정액이 쌓인다. 그러다가 때에 맞게 교합을 하면 능히 자녀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욕정을 줄이면 정액이 충분해 자녀가 많을 뿐만 아니라 건강한 자녀를 낳을 수 있고, 오래 살 수도 있다. p 066 『동의보감』 中



조선시대의 임신한 여성에게는 수많은 금기사항들이 있었다. 임신 금기는 조선 왕실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다. 왕비의 안전을 위해 또 몸과 마음이 건강한 후손을 위해 임신 금기는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실의 임신 금기는 『동의보감』에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의보감』에는 임신 금기가 음식 금기와 약물 금기로 나뉘어 있다. 그만큼 임신 중 음식과 약물이 태아에게 중요하다는 뜻이라 하겠다. p 105



태교에 대한 조선 왕실의 목표와 신뢰는 『내훈』이라는 책에 잘 나타나있다. 이 책은 인수대비 한씨가 왕실 여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궁중 여성 교과서였다. p 109



조선시대 왕실을 비롯한 여러 계층의 여성들이 자녀 교육의 목표로 삼았던 문왕은 동양사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되는 인물이었다. 유학을 대표하던 공자가 존경해 마지않던 사람이 문왕이었다. 문왕은 중국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생각되는 주나라를 세운 창업자이며 완벽하게 인격을 연마한 성인이었다. (생략) 특히 조선 왕실에서는 명실상부한 제왕을 길러내기 위해 태교를 행하였다. 나라와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리기 위해서는 문왕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길러내야 하고, 그런 지도자는 태교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왕실 태교의 목표이자 신념이었다. p 112



조선왕실의 자녀교육은 태교에서 끝나지 않는다. 출산 후 교육도 포함이다. 왜냐? 왕이 되어야 하니까!


옛날 사람들은 나라의 세자를 교육하는데 더욱 신중을 기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세자가 위로 왕업을 이어받고 아래로 천하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세자는 지위와 권세가 한없이 높아 방종하기 쉬우니

미리미리 바르게 교육하는 방법을 더욱 시급하게 서둘러야 합니다.

-중종실록 권 27, 12년 1월 을미조



어쩌면.. 현대의 유별난 조기교육은, 조선왕실에 비하면 손톱의 때만큼도 따라가지 못할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왕실에서는 아이가 두세살이 되면(특히 원자라면 더더욱), 그때부터 기본교육에 들어가니 말이다. 심지어 원자를 가르치는 스승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 실제로 조선시대 원자의 스승은 삼정승이나 2품 이상의 고위 관료 또는 명망 높은 유학자 중에서 뽑았다고 하니, SKY 과외선생을 고르는 요즘 부모 유별나다할게 못된다.



근데 여기서 함정. 조선 왕실에서 정식으로 원자교육-제왕교육 루트를 밟고 왕이 된 사람은 몇명 없다는 것ㅋㅋㅋㅋㅋㅋ



고로 저렇게 유별나게 원자/제왕교육한다고 해도 쓸모가 ..........음, 쓸모가 있을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쓸모가 없지 않을까. 그나마도 조선왕실에서 저렇게 정식 루트 밟고 왕이된 사람들 보면 아주 소수만 성군이 될뿐 대체로 단명하거나, 암군되던데? 결국 애바애아닌가. 뎡말 예나 지금이나 애바애는 명언중의 명언인듯! 이래저래 작금의 유별난 태교열풍이나, 조기교육, 사교육 열풍은.......예로부터 내려온 유구한 전통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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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지나쳤던 우리동네 독립운동가 이야기
유정호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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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책장에는 한국근현대사와 관련된 역사책이 꽤나 많다. 그중 6할이 독립운동가,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다(나머지 4할은 일제잔재, 친일파, 일제강점 당대이야기 등). 해서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꽤나 많이 읽었고, 심지어 여행다닐때도 독립운동 또는 독립운동가에 관련된 사적지도 자주 찾아다니고 그랬다. 유독 다른 시대의 역사보다,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단 하나다. 기억하기 위해서. 



그어떤 역사든 왜곡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우리 근대사, 특히나 독립운동 관련해서는 왜곡과 침묵이 너무나 많다. 제일 큰 이유는 해방 후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친일을 했던 사람들이 그대로 부와 권력을 유지했기 때문이고, 그 다음 이유는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사상이라는 무거운 문제로 대립하게 되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두가지 이유는 서로 뗄레야 뗄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해방후 친일매국노들은 사상을 방패삼아, 반공을 외치며 우파 독립운동가 뒤에 숨어들어갔고, 사회주의사상 또는 중도 독립운동가들을 척살해나간다. 그들은 그렇게 부와 권력을 유지했고, 그 친일매국노의 후손들은 지금도 잘먹고 잘산다).



오늘 읽은 이 책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동네 독립운동가 이야기」는, 내가 이 책에 나온 수 많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를 몰라서 읽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에 실려있는 독립운동가들 대다수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이 책이 집필된 이유다. 바로 우리 동네에 세워진,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동상’이다. 수 많은 사람들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장군 동상은 단박에 안다. 동상의 안내판을 보지 않아도 말이다. 반면에 독립운동가 동상은 ‘아, 동상인가보다’ 하고 외면한다. 익숙한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나 도마 안중근의 동상 정도는 되야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진다. 물론..... 나도 그런 수 많은 사람들 중 하나다. 아무리 많은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알고, 독립운동사를 알고 있을지언정, 그들의 얼굴은 생소하고,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 그들을 기리고 동상까지 세웠는지 모른다. 실제로 이 책에 나온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동상’들 위치를 보면,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지역이 꽤나 많이 있었다. 분명 당시에도 나는 역사덕후였고, 꽤 많은 독립운동 책을 읽었는데도 말이다.



아직은 응애밖에 못하는, 사랑스런 내 딸이 생긴 지금. 내 딸과 손잡고 여행을 다니다가 독립운동가 동상과 마주한다면, 그 때는 과거처럼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관심을 갖고 보면서 동상으로 세워진 이 인물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였기에 이렇게 동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제대로 알려주고 싶다.



▶1천대 1로 싸운 조선의 총잡이, #김상옥

독립운동가 김상옥, 지금보다 몇십년전 과거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가 몸 담았던 독립운동단체가 #의열단 이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했던, #항일독립운동단체 였다. 따라서 의열단의 단장이었던 김원봉 역시도 몇십년전 과거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며, 조금 달라졌다.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했던 독립운동가들 이름이 하나둘 대중매체(특히 영화)에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이나, 이 챕터의 주인공인 김상옥이 바로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나 총잡이 김상옥은 SBS 프로그램인 꼬꼬무에서도 한번 다뤘기에, 꼬꼬무 시청자들에게는 조금 친숙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은 젊은이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우리나라 대표 문화의 거리다. 온갖 공연으로 볼거리가 가득한 이 곳 한 모퉁이에 동상이 하나 있다. 영화 <암살>과 <밀정>에서 모델로 삼았던 김상옥이 동상의 주인공이다. 두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김상옥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한편으론 일본 경찰 1천여 명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이면서 수십여 명을 사살한 게 사실이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게 한다. 그러나 두말할 것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p 056



김상옥의 동지인 전우진을 체포해 가혹한 고문을 가한 끝에 김상옥이 이혜수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본 경찰은, 1월 22일 새벽 다섯 시 중무장한 헌병대 1천여 명을 대동해 이혜수의 집을 포위했다. 깊은 숨을 내뱉은 김상옥은 마음의 정리를 끝내고 양손에 총 두 자루를 강하게 움켜쥔 채 일본 경찰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지붕에 올라가 김상옥의 동태를 살피던 일본 경찰이 마당으로 뛰어내리며 총을 발사하니 긴장된 정적이 깨졌다. p 062



마지막 총성이 울리고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일본 경찰은 김상옥이 죽었으리라 짐작했지만, 두려움에 누구도 섣불리 걸음을 옮겨 다가가지 못했다. 그들은 김상옥의 죽음을 확인하고자 그의 어머니를 총알받이로 내세워 조심히 변소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눈을 감지 못하고 부릅뜬 채 순국한 김상옥이 있었다. 세 시간이 넘는 교전 끝에 열여섯명의 일본 경찰을 사살한 김상옥의 마지막은 장렬했다. 김상옥의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일본경찰들은 김상옥 곁으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김상옥의 죽음이 확실해졌다고 생각하곤 김상옥의 시신을 옮겼는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김상옥의 몸에는 무려 열한 발의 총상이 있었던 것이다. p 063



나에게도 김상옥은 익숙한 인물이다. 각종 다큐, 책으로도 꽤 자주 접했던 인물이기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챕터를 읽으면서 당황했던 사실은... 그의 동상이 내가 자주 들락거리던 대학로에 있었단 사실이다. 난 역사덕후이기도 하지만, 연뮤덕후이기도 하다. 연뮤덕의 특징 중 하나가 회전문인데(^^..) 그 덕분에 대학로를 아주 제집 드나들듯 다녔는데, 그 앞에 있던 동상이 독립운동가 김상옥의 동상이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 애초에 누구의 동상인지 관심을 갖지도 않았었고 말이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나중에 대학로를 가게된다면, 김상옥 열사를 다시금 떠올려야지.



▶을사늑약에 개탄하며 죽음으로 사죄하다, #민영환

구한말, 우국충절의 대명사인 민영환. 그는 민씨 척족임에도 불구하고 부정부패가 아닌,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해 노력하다가 끝내 자결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의 절개는 백성들로 하여금 눈물을 짓게 하였고, 우국충절의 대명사가 되었다. 분명 다른 민씨와는 달리,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마음은 높이살만하지만,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생각한 끝이 자결이라는게 좀 안타깝다. 후술하겠지만, 민영환처럼 태어나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했던, 지체높은 양반가 석주 이상룡 집안이나, 민영환처럼 높은 관직을 역임했던 이회영 집안은 ‘살아서’ #항일무장투쟁 이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다. 선조들의 역사만봐도 민영환의 선택이 얼마나 씁쓸한지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발발전, 일본을 찾아갔던 황윤길과 김성일의 이야기는 꽤나 유명하다. 황윤길은 (일본과)전쟁이 일어날거라고 했지만, 김성일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7년간의 길고긴 임진/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났을때, 전쟁은 없을거라던 김성일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김성일이 민영환 같은 관료였다면, 자결하여 순국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성일의 선택은 달랐다. 김성일은 앞장서서 왜놈들과 싸웠다. 약 이백여년 뒤 이상룡이 그러했고, 이회영 6형제가 그러했다. 그렇기에.... 민영환의 순국은 그저 죽음으로 도망친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씁쓸하다.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당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민씨 척족으로 많은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민씨 척족 중 상당수가 부당하게 얻은 권력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나라를 팔아먹은 것과 달리 민영환은 쓰러져가는 나라의 국운을 걱정하며 자결했다. p 129



민영환은 여러 나라를 거치며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마주했지만,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조선의 풍습과 사고방식에 젖은 모습을 바꾸는 건 쉽지 않았다. (생략) 민영환은 2년 동안 제국과 식민지로 전락한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조선의 현실을 냉철한 눈으로 바라봤다.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았다. 그런 시점에서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설립해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부르짖었다. 서재필의 뜻에 동감한 민영환은 군부대신 겸 내부대신으로서 독립협회에 참가해 활동을 지지했다. p 132~133



민영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크게 변화되지 못했다. 대내적으로는 고정의 무능력과 친일파 득세가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지지했다. 결국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p 135



민영환은 일본 헌병이 조병세를 체포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며 본인이 소두가 되어 상소문을 재차 올렸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이번에는 민영환을 평리원에 구속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상소문의 참뜻이 전달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민영환은 목숨으로 뜻을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12일이 되던 날인 1905년 11월 3일 민영환은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칼로 자신의 몸을 찔러 순국했다. 민영환의 나이 45세였다. p 135



공개된 그의 유언서가 많은 이의 마음을 흔들었다. 나라를 운영한 관료로서 국운이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막아내지 못한 자신의 죄를 성토하면서, 이 나라를 포기하지 말고 독립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는 당부에 많은 이가 눈물을 흘렸다. 조병세, 송병선, 홍만식 등 전,현직 관료들이 민영환을 뒤따라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며 자결했다. p 136



관료로써 민영환이 참가한 독립협회. 여기에 대해서도 난 할말이 많다. 분명 독립협회 초반에는 고종의 지지가 있었고, 그렇기에 관료였던 민영환도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립협회에서 입헌군주제라는 안건을 이야기하자, 고종은 많은 돈과 인력을 들여서 강제해산시켰다. 고종이 직접 말이다. 입헌군제자라함은, 전제왕권이 아닌 체제이기에, 왕권강화를 원했던 고종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고로 고종이 원한 자주독립은 전제왕권을 기반으로한 자주독립이었다는 말이다. 이는 대한제국 헌법에도 명확히 명시되어있기도 하고.


거기다 독립협회 2대 회장은 친일매국노이자, 을사오적으로 유명한 이완용이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상의 업적, #이시영

부와 권력을 쥔 명문가에서 태어난 이시영, 그에게는 형제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이회영 6형제라 부른다. 대부분은 넷째였던 우당 이회영을 기억하지, 이시영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은 잘 언급되지 않는다. 그나마 대한민국 근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시영은 해방 후, 6형제 중 유일한 생존자였으며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이었기에, 이름이나마 알고 있을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시영이라는 이름자체를 모르는게 부지기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말할 때 보통 김구만 떠올린다. 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6형제와 함께 오늘날로 환산해 600억이 넘는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쏟아부은 이회영은 기억하지만, 동생 이시영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잘 알지만, 부통령 이시영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듯 이시영은 드러나지 않는 2인자였지만 평생 확고한 가치관과 의지로 나라를 위해 살았다. p 231



이시영은 간도로 떠나는 자리에서 “내가 이 문으로 다시 들어올 날이 없다면 자자손손이라도 들어올 날은 있으리라. 그리고 내가 이 문을 나설 이 시간으로부터는 별별 고초와 역경을 당하더라도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맹세했다. 굳은 결심으로 (간도)삼원보에 도착한 이시영은 교육과 상공업을 발전시켜 독립 기반을 마련하는 경학사와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신흥강습소를 세우는데 매진했다. 필요한 경비의 대부분을 제공했음에도 이시영은 직책에 연연해하지 않았고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인재에게 직책을 양보했다.p 234

>경학사 초대사장 이상룡, 신흥강습소 초대교장 이동녕



(3.1운동 이후, 임정 수립)초대 법무총장으로 참여한 그는 곧 재무총장이 되어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았다. 그리고 독립하는 날까지 임시정부와 함께했다. 임시정부 내에서 이승만 임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독립운동 방향을 두고 분열이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임시정부를 떠나 뿔뿔이 흩어졌지만 이시영은 묵묵히 임시정부를 지켰다. 국민의 염원과 희망으로 수립된 임시정부를 버린다는 건 이시영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p 235



나라를 되찾고자 인생을 바친 이시영은 1945년 77세 때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독립을 위해 만주로 떠났던 6형제 중 유일하게 한국 땅을 밟은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따. 그러나 이시영은 굴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임시정부 시절 사용하던 예전 직함을 그대로 사용했다. p 237



이시영으로 하여금 모든 일에서 손을 놓게 만든 일이 1946년에 발생했다. 여운형이 피습당하는 사건을 두고 좌익단체 민주주의민족전(민전)이 이시영이 위원장으로 있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에 부위원장 신익희가 이시영의 동의없이 민전을 명예훼손과 무고죄로 검찰에 고발하자, 이시영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과거의 동지들이 민주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정치이념을 가졌음에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하는 모습에 크게 실망한 것이었다. p 238



이 챕터의 주인공은 분명 이시영이지만, 난 이시영을 포함한 그의 형제들을 모두 이야기 하고 싶다. 이씨집안의 6형제는 모두 본인과 가족들, 재산 모두를 바쳐서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니까.


→ 첫 째 이건영은 형제들과 함께 1910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1926년 선산이 있는 경기도 장단으로 돌아왔으나, 일제의 감시 속에 살았다. 1930년 78세 일기로 장단에서 숨을 거뒀다.


→ 둘 째 이석영은 가장 많은 돈을 독립전쟁 자금으로 지원했다. 80세 된 1934년 끼니를 이을 돈이 없어서 굶어 죽었다.


→ 셋 째 이철영은 경학사 사장과 신흥무관학교 전신 신흥강습소 교장을 역임했다. 신흥무관학교 폐교 뒤 상해, 천진 등지를 떠돌다가 1925년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 넷 째 이회영은 동북항일의용군 창시자로 나선다. 이후 여순감옥에서 모진고문을 당하다 죽었다. 딸 이규숙이 시체실에서 눈조차 감지 못하고 순국한 이회영을 확인한다. 하지만 일제는 이회영이 삼노끈에 목을 매고 자결했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삼노끈이 어디서 낫는지 밝히지 못했다.


→ 다섯 째 이시영은 독립전쟁 뒤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키자 시민들과 함께 서울에 남아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으나, 대한민국 부통령이 북한군 포로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해 피난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이 한강교를 폭파하고, 심지어 양민까지 학살한하고, 거기다 국민방위군 사건까지 겹치면서, 이승만 정부에 실망할 대로 실망한 그는 그 길로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1953년 4월 17일 부산 동래에서 숨졌다.


→ 여섯 째 이호영은 다물단원으로 독립전쟁에 참여했다. 밀정을 색출하고 일제 잔당을 처단했다. 일가족 모두 일제에 몰살당했다.




재작년 (1945) 해방이 되었다고 할 때

38년 전 여러 형제와 오십여 식구를 데리고 국경을 벗어져 나갈 때와

충칭에서 만리장공의 몸이 되었을 적에

많은 동지의 가족을 이토에 묻고 오는 마음은 처량하더라..

-민중일보에 실린 이시영의 소회




▶조상의 위패를 뒤로하고 총을 든 성리학자, #이상룡

경북 안동, 유서갚은 유림 가문에서 태어난 석주 이상룡. 그는 나라가 위태롭자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문서를 태우고 일가족과 함께 만주로 떠났다. 유학자에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었다는 건, 자신은 유학자이기 전에 한 나라의 국민이기에 위태로운 나의 나라를 찾고자 함이다. 뼛속깊은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노비문서를 태웠다는 것도, 조선을 망국으로 가게 한 구체제가 내 나라를 찾는데 하등 도움될 게 없다고 생각했으며, 내 나라를 찾기 위해 필요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는 것이다.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

-석주 이상룡


역사를 통해 자신을 지킬 힘도 없는 나라는 결국 무너진다는 걸 잘 아는 이상룡은 다른 학문을 경시하고 성리학만을 고집하는 유생들과는 달랐다. 무(武)를 천대한 유림과 달리 이상룡은 여러 개의 화살을 발사하는 연노를 개량해 훗날을 대비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키우는데 전념했다. p 285



일본에 모든 면에서 열세인 상황을 극복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처절히 느낀 이상룡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렇게 얻은 결론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활용의 차이였다. 일본이 서구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여 기존 사회의 문제점을 바로잡았던 것에 비해 조선은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전통과 관습만 고수하며 변화를 거부했기에 뒤쳐졌다고 분석했다. 지금껏 서구 문물에 반감을 가졌던 이상룡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십살 나이에 사고의 틀을 바꾼다는게 매우 힘든 일임에도 이상룡은 사고의 유연성을 가지고 칸트, 홉스, 루소 등 서구 사상가들의 책을 읽으며 서구 문물을 우리의 현실에 맞게 적용하고 응용할 부분을 찾았다. p 286



독립군 기지 건설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토지 및 가옥 등 부동산을 정리한 뒤, 노비문서를 불태워 가노들이 모두 자유민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인근 유생들에게 학업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고는 1911년 1월 일가를 데리고 (간도)삼원보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이회영 일가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독립기지를 건설하는 데 애쓰고 있었지만, 참여할 독립운동가와 자금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때 북쪽의 매서운 찬 바람을 뚫고 도착한 이상룡 일가 150명은 아주 큰 힘이 되었다. 이상룡과 함께 삼원보로 망명한 김대락은 신흥강습소를 세우다가 1924년 순국했고, 김동삼은 청산리대첩의 주축이었던 서로군정서를 운영하다가 1937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p 287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하나의 정부만 있어야 한다는 이상룡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바꾸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으로 확대, 개편했다. 신흥학교도 무관학교로 개편해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는데, 1920년 8월에 2천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며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p 289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최고책임자인 국무령으로 취임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일을 계기로 내재되어 있던 갈등이 폭발하면서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원할 새 대통령으로 박은식이 선출된 상황이었다. 박은식은 문제가 많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 중심의 내각제로 체제를 바꾼 뒤, 초대 국무령으로 이상룡을 추천했다. 유연한 사고로 모두를 포용해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인물로 이상룡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p 291



역시나 TMI일지 모르지만, 석주 이상룡을 필두로 그의 부인 김우락,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손자 며느리 허은 까지 모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한마디로 그의 집안은 모두가 나라를 위해 자기 자신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또 씁쓸한 이야기가 있다면, 석주 이상룡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꽤 많아졌으나, 독립운동에 매진한 이상룡의 가족들 이름은 사람들에겐 생소하다면 생소하다는 것. 이회영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의 이름이 덜 알려진 것 상황과 매우 비슷하달까.



그저..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라도 이들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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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08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이하라 2022-09-08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로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즐거운 추석연휴 되세요.^^
 
동남아시아사 - 선사시대부터 21세기까지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후루타 모토오 지음, 장원철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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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자타공인 역덕(이면서 잡덕ㅋ)이다. 그러다보니 우리집 책장에는 역사책이 수두룩빽빽이다. 책장에 꽂혀있는 수 많은 역사책을 국적별로(?) 나눠보면, 그 비율은 한국사80%, 세계사20%정도이다. 즉 한국사가 압도적이란 이야기. 그나마 있는 20% 세계사 역사책도 더 세세하게 나누면 일본사60%, 그외 세계역사40%이다. 아무래도 역사를 바라보는 내 취향의 반영되다보니, 이런 쏠림현상(?)이 생겨난듯 하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외 세계역사 40%쪽에 각종 서양사(거시/미시사)와 중국사가 있다. 이쯤되면 그래도 왠만한 세계사책은 다 있겠거니 싶지만, 아니다. 정말 이상하게도 동남아시아 관련 역사책은 우리집에 단 한 권도 없다.  하다못해 남아시아에 속하는 인도(인도네시아 아님ㅋ) 관련 책도 있는데, #동남아시아 관련 책은 진짜 1도 없다. 정말 소오름! 나름대로 역사편식을 줄인다고 줄였는데, 아직도 편식중. 허허허.




동남아시아는 오늘날의 국가로 말하자면 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말레이시아·싱가포르·인도네시아·동티모르·브루나이·필리핀 11개 나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이 가운데 동티모르를 제외한 10개국은 아세안 가맹국으로, 아세안은 동남아시아로서의 결속을 국제 정치무대에서 과시하고 있다. (생략) 동남아시아는 자연 지리상으로는 대륙부(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와 도서부(말레이시아·싱가포르·인도네시아·동티모르·브루나이·필리핀)로 나뉜다. p 011~012



나에게 동남아시아는 그저 여름휴가 여행지 정도다. 물론 내가 여름휴가로 동남아를 가본적이 있는건 아니지만, 남들이 동남아로 놀러다니는 걸 많이 봤으니까. 심지어 요즘 심심치않게 동남아로 여행가는 방송들도 나오기 시작했고! 아, 아는거 또 있다. 한국사를 공부하면 당연히 알게되는 베트남전쟁! 그리고 작년에 발생한 미얀마 군사 쿠테타? 진짜 딱 요정도다.



우리 뿡뿡이는 나처럼 시작부터 역사편식하지않고, 폭 넓은 역사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남아시아 역사에 관심을 갖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게 바로 8월 역사책 신간인 #동남아시아사. 책을 받고보니 생각보다 두꺼워서 아주 쪼오금 거부감이 들었는데, 책을 펼치고보니 안심했다. 두꺼운 만큼 글자크기가 좀 컸기에 ㅋㅋㅋ 괜히 긴장했네!



동남아시아사에는 문외한이다보니, 목차부터 아주 차근차근 훑어보았다. 큰 목차로는 총 10개로 나뉘고, 각 목차별로 또 소목차가 나뉘어있었다. 약간 논문스타일? 결국 목차보고 다시 긴장해버렸다^_T. 나름 역사에 대해선 일반인보다는 해박한 쪽인데, 동남아시아사. 이야. 심지어 책이 너무나 논문스타일이다보니, 살짝 거부감도 들었지만...................그렇다고 평생 모를수없으니까! 이때아니면 언제 동남아시아사를 공부하겠나싶어서, 읽기 시작했다. 진짜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보다는, 공부한다고 생각하고 읽었다.



▶동남아시아란?


종교적으로도 다양해서 오늘날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국민 대다수가 신앙하는 종교를 살펴보면, 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가 남방 상좌부 불교, 베트남이 대승불교, 싱가포르가 대승불교·도교,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브루나이가 이슬람교, 필리핀·동티모르의 경우는 가톨릭교가 우세한 형편이다. 동남아시아 주민 대다수는 인종적으로 남방계 몽골로이드에 속하는 사람들이지만, 언어적으로는 좀더 다양한 편으로 말레이어·인도네시아어·필리핀어 등을 포함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 베트남어·캄보디아어를 포함하는 오스트로·아시아어족, 버마어 등의 중국-티베트어족·태국어등의 타이·까다이어족에 속하는 사람들이 분포하고 있다. p 013~014


동남아시아는 히말라야로 이어지는 산맥이 뻗어있는 대륙부에 큰 강이 흐르고, 풍부한 평야지대를 기반으로 크고작은 국가들이 생기긴 했으나, 통일국가로 이어가진 못했다. 인도양과 태평양 사이에 있는 도서부는 세계 여러나라와 교역을 하며 여러 국가가 번성했지만, 이쪽도 통일국가로 이어가지 못했다. 쉽게말하면, 한반도라는 하나의 땅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같은 여러 국가가 생기긴 했지만, 후에 통일신라나 고려 또는 조선같은 통일국가로 이어가지 못했다는 말이다. 




▶청동기 문화와 초기국가


BC2000년기에는 현재의 베트남 북부에 풍 응우엔 문화로 불리는 신석기 문화가, BC1500년 무렵에는 금속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BC5세기 무렵에 (중국)운남 지역에서 동고(청동 북)을 받아들여,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청동기 문화인 ‘동 선’문화가 성립되었다. p 017



오늘날 캄보디아에서 베트남 남부에 걸치는 메콩강 하류 유역에 1세기경 성립했고, 7세기 무렵까지 해양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번영했던 푸난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중국의 사서에 수록된 푸난의 건국 신화에 따르면 푸난 사람들은 본래 나체로 살았고, 유엽이라는 여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생략) 현재의 베트남·캄보디아 국경 지대에 있는 ‘옥 에오’는 푸난의 외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로마 금화·힌두교 신상·한경·일출 및 트라이던트 은화 등의 출토품은 바다의 실크로드를 활용한 동서 교역과 동남아시아 역내 교역으로 푸난이 번영을 누렸던 정황을 말해준다. p 024~026



2세기 말에는 일남군으로 한나라의 지배하에 놓여있었던 오늘날의 베트남 중부에서, 중국 자료에서 ‘임읍’으로 불렸던 국가가 자립하게 된다. 임읍은 영내의 산지에서 침향으로 대표되는 향료가 산출되었고, 남중국해와 타이만을 연결하는 교역을 통해 번영했다. p 027


내가 세계사를 보는 관점은, 해당 년도에 따라 우리 역사에선 어떤 나라가 있었는지를 비교하며 보는 것이다. 우리 역사와 비교하지 않으면, 당최 머릿속에 남지를 않다보니. 세계사를 보면서 머릿속에 남기기위해 내가 고심한 방법이다.



동남아시아에 청동기문화가 들어왔을 시기는, 대충 우리 역사에선 고조선이 있었을 시기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BC 4세기로 추정되지만, 멸망시기는 비교적 확실하다. 한나라(전한)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멸망했다고 중국 사서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 한나라가 당시 베트남 중부 지역에 있던 임읍(일남군)을 지배했던 것이다.



푸난이라는 국가는 중국식 발음이며, 크메르어로 프놈이라고도 불린다. 캄보디아 메콩강 하류 지역에 있었고, 임읍과 더불어 중국의 사서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던 국가다. 1세기에 건국되어 6세기에 멸망했다고 하는데, 동시대에 한반도에선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다. 고구려랑 백제가 7세기에 멸망했으니, 푸난도 꽤나 오래지속된 국가인듯 싶다. 다만, 학자들에 의하면 푸난의 경우 일종의 도시국가들의 연맹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푸난은 연맹국가치고는 꽤나 오랫동안 지속된셈이다. 놀라울따름. 참고로 푸난과 건국시기가 비슷한 백제나 신라는 연맹국가인 마한과 진한에서 시작되었다.




▶고대국가의 시작


7세기는 동남아시아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통일을 달성하고, 뒤 이은 당나라의 발전에 힘입어 거대한 중국시장이 출현하게 되었고, 동서교역이 활성화 되었다. 이것은 멀라까 해협의 이용을 촉진시켰고, 이 해협을 지남으로써 점으로 이어지던 항시국가가 아니라 해상교역로의 광대한 영역에 패권을 확립했던 스리비자야가 출현했다. 또한 이 시기에 인도에서 새로운 농법이 도입되어서, 캄보디아 평원·동북 태국·짜오프라야강 중유역·버마 평원에서의 국가형성이 진전을 보게 되었다. p 029




7세기에 기존의 육로교역에서 해로교역으로 루트가 바뀌면서 푸난이 쇠퇴하고, ‘스리비자야’가 번성했다. 8세기 후반에 이르러, ‘스리비자야’는 (인도네시아)자바섬에 기원을 둔 ‘사이렌드라’에 편입된다. ‘사이렌드라’ 는 지금도 유명한 (대승불교)보로부드르 사원을 건립한 왕국이다. 9세기 중반이 되면 ‘사이렌드라’도 ‘산쟈야’에 흡수된다.




크메르인에 세웠다는 첸라(진랍)는 6세기에 현재의 라오스 참빠삭 지방에서 시작했다. (생략) 681년부터 약 2세기 동안에 걸쳐서 해안부·메콩·델타를 중심으로 한 수첸라, 캄보디아 서북부·동북 태국을 중심으로 한 육첸라로 대립·분열하는 시대가 이어졌다. p 035



에야워디강 유역에는 1세기 부렵부터 10세기에 걸쳐서 쀼라고 불리던 집단의 세력이 번영했다. 쀼는 각 지역에 원형 혹은 타원형의 성곽 도시 유적을 남겼고, 밭농사와 소규모 관개 벼농사를 기반으로 한 사회를 형성하고, 인도에서 불교와 힌두교를 수용했다. p  036



쨔오프라야강 유역과 오늘날의 동북 태국에는 6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엽에 걸쳐서 몬족이 ‘타와라와디’라는 국가를 형성했다. 타와라와디도 쀼와 마찬가지로 타원형의 성곽 도시 유적을 남기고 있고, 은화가 출토됨으로써 교역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p 037



▶중세국가로 넘어가다


1000년 이상이나 중국의 지배가 이어졌던 것이므로 독립 당시 베트남에 있어 중국의 영향은 여전히 강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아서 10세기 베트남은 중국적인 중앙집권 국가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고 (생략) 그러한 베트남에게 중국적 국가 체제 도입의 길을 택하게끔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중국으로부터의 위협 때문이었다. (생략) 그래서 1009년에 성립한 리 왕조는 큰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규정을 세움으로써 1225년까지 존속하는, 베트남 역사에 있어 최초의 장기 왕조가 될 수 있었다. p 047


베트남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건 ‘베트남 전쟁’밖에 없지만, 그 와중에도 아주 살짝이나마 베트남, 그러니까 당시 안남국의 리 왕조에 대해선 알고있다. 왜냐? 베트남 리 왕조가 몰락할 때, 이용상 왕자가 탈출해서 도착한 곳이 바로 고려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있던, 왕건이 세운 그 고려말이다. 리 왕조의 이용상 왕자는 고려에 귀의해서, ‘화산군’에 봉해졌고 그렇게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현대 화산 이씨 종친들이 베트남에가면 왕족대우(?)를 받는다는 사실!



뭐 여튼, 리 왕조는 불교국가였지만, 토착신앙도 활용했다. 뿐만 아니라 공자도 숭배하였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다이비엣(대월)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고, 당나라에서 안남국왕에 책봉되어, 중국/한반도/일본과의 외교에선 안남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놀라운 사실은 이 국호가 왕조가 바뀌어도 계속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 뿐만 아니라 농업을 진흥하고 해양교역도 번성하여 국가로써의 국제적인 지위도 높았다.



바다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쟈바에서는 사이렌드라가 중국 시장이 폐쇄됨으로 인해서 쇠퇴해버리자, 중부 쟈바의 분지국가인 고 마따람 왕국이 산쟈아 왕가의 통치하에서 다시 부활했다. 10세기 전반의 신독왕은 왕도를 브란따스강 유역의 동부 쟈바로 천도했다. 이 신독 왕으로부터 13세기 끄르따자야왕까지의 시대가 ‘끄다리왕조’라고 불리고 있다. (생략) 11세기에는 중국·유럽에서 말루꾸군도의 특산물인 정향 등 향신료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대했던 시대였다. 특히 남송이 성립했던 12세기 이후로는 중국인 상인들이 동서 교역에 참여하는 수가 늘어나서, 끄다리와의 직접적인 조공 무역, 민간 교역도 크게 발전했다. p 059~061



멀라까 해협 주변에서는 10세기 이후 중국 쪽 자료에서 언급하는 ‘삼불제’가 빈번히 중국에 조공하고 있었다. (생략) 삼불제의 지리적 범위는 말레이반도 중부 이남, 수마뜨라섬의 북단으로부터 멀라까 해협의 연해지역, 서부쟈바, 그리고 서보르네오 지역 등으로 서아시아·남아시아 및 쟈바와 중국 사이의 교역로를 지배하고 있었다. 송대 중국에서는 동남아시아산의 침향과 서아시아산의 유향 등의 향료가 주요 수입품이었는데, 그 대부분은 삼불제를 경유해서 중국에 수입되었다. p 069


동남아시아의 고대국가가 중세국가로 발돋움하게 된 요인들은 아래와 같다.


1) (서양) 인도양에서 온 무슬림 상인들의 활동


2) (동양) 당나라 쇠퇴 후 송나라의 중국 통일, 중국의 도자기 무역 번성


→동남아시아는 무슬림 상인과 중국상인의 해상교역의 교차로가 되며 점차 발전하게 된다.




▶13~14세기 전환기를 거쳐, 15~17세기 교역의 시대로


동남아시아의 가장 유력한 수출품으로 떠올랐던 것이 후추였다. 후추의 원산지는 남인도였지만, 1405년 무렵에 북 수마뜨라에 묘목을 들여와서 동남아시아 각 지역에서 재배를 시작했다. 이후 본래 동남아시아 원산이었던 정향·육두구에 더하여 이 지역은 후추에서도 중요한 원산지가 되었던 것이다. (생략) 이러한 ‘교역 시대’ 동서 무역은 바닷길이 주류였으며, 그것이 동남아시아에 있어 교역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몽골제국이 14세기 무렵에 이르러 몇 개의 나라로 쪼개지고, 그 여파로 아시아·유럽 사이의 육로를 통한 교통이 곤란해졌던 상황에 더해, 13~14세기에 나침판의 보급이 확대되고 장거리 항해의 확실성이 증가했던 사정도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활성화된 교역 활동은 당시 신대륙·일본 양대 산지에서 공급되는 대량의 은을 결제 수단으로 활용함으로써 더욱더 촉진되었다. p 086~087


11세기~13세기, 유럽에서는 이 긴 기간동안 기독교와 이슬람교간의 십자군전쟁이 있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은 동방에 크나큰 관심을 갖게 된다. 13세기에는 칭기즈칸의 몽고(후에 원나라)가 대 제국을 이루면서 유럽땅까지 차지했다. 이로인해 본격적으로 서양과 동양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 



※13~14세기 동남아시아 및 세계상황※


 1) 몽골제국의 침략과 이로 인한 태국계 여러 종족의 남하(기존 대승불교, 힌두교 문화에서 남방 상좌봐 불교 및 이슬람 문화로 변모)


 2) 유라시아 대륙에 대제국이 출현함으로써 동서 교역 및 해양 교역이 활성화됨


 3) 14세기 페스트 대유행 및 지구 한랭화(기근이 빈발)



15세기가 되면 일명 ‘대항해시대’가 열린다. 유럽 각국에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신대륙을 찾아다니는등 동-서양의 해양루트가 활성화되었다. 특히 서양에서는 없어서 못사는 조미료(후추 등)이 동남아에서 나왔기에, 동남아시아와 서양의 해양교류가 본격화된다. 




▶근세국가로 넘어가다


18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친 시대의 동남아시아사는 ‘교역 시대’의 번영이 종언을 고한 뒤로, 식민지 지배하에 놓이기까지의 틈새 시기로 종래에는 별달리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근년에 이르러 이 시대를, 근현대를 직접적으로 규정하는 여러 요소가 형성되었던 시대, 즉 ‘근세’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정착하는 추세라 하겠다. 이러한 재평가의 계기가 되었던 사태의 변화는 20세기 말 이후의 동아시아·동남아시아의 경제발전이었다. p 133



꼰바웅 치세에는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랑군이 버마 목재 수출과 인도 면직물 수입등으로 번영했고, 육로를 통한 대중국  무역 루트도 활황을 이루어, 버마 면화 수출과 중국 비단 수입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외 경제의 발전에 힘입어 국내 경제 활동의 ‘화폐화’가 진척되었고, 은과 합금이 상거래, 납세 등에서 사용되게 되었다. 꼰바웅 왕조 치세에는 중앙 정권에 의한 지방 통치의 실효화도 진행되어, ‘묘’라는 지방 행정단위가 새로 설치되었고, ‘드지’라는 해당 지역의 지배자가 다시 그 수장에 임명되어, 징세, 징병을 담당토록 했다. p 150



응우옌 왕조는 그때까지의 왕조들과는 국토의 크기가 전혀 다른 위대한 국가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804년에 청나라로부터 ‘월남’(베트남)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았지만, 한편으로는 1838년부터는 종래의 ‘다이비엣’을 대신하여 ‘다이남’이라는 국호를 자칭하기 시작했다. 응우옌 왕조는 출발부터 다원성을 지녔던 국토의 통합을 위해서라도, 그 어느때보다도 더욱더 자국이 (인도차이나반도의) ‘중화’라는 점을 강하게 자기주장했던 것이다. p 155


근세국가로 명명되는 이 시기는 일종의 ‘낀 시기’여서 크나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요즘들어 재평가되는 시기라고 한다.



※18~19세기 초 동남아시아 및 세계상황※


1) 청나라의 번영과 그에 따른 아시아 내 교류의 발전(중국은 쌀, 설탕 등 식료품 및 은, 주석등의 광물자원, 면화등의 원료를 동남아시아에서 수입)


2) 대규모의 중국 상인들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며, 자리를 잡음(차이나타운 형성)


3)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영국, 인도, 중국의 삼각무역 활성화 (면직물:영국→인도, 아편:인도→중국, 차:중국→영국)




▶ 19세기 식민지배와 2차대전, 그리고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독립


이 시기는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내용이나보니, 읽는데 무리가 없었다. 해서 따로 내용을 발췌하거나 요약 정리할 필요도 없는걸로!


서양열강이 동남아시아 뿐만아니라 아시아 곳곳을 식민지배 한 것이나, 일제의 침략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과 민주화. 이는 한국의 역사와도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그 누가 읽어도 이 부분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거기다 극공감에 빡이 치는 상황(?)까지 온다고나할까. 고로 여기서부터는 공부하는 마음보다는, 가볍게 읽었다.



이래저래 동남아시아는 고대국가, 중세국가를 지나는 동안 강력한 통일국가가 만들어지지 못했고, 결국 전근대 이후에는 동남아시아 전반에 걸쳐 서구열강에 의한 식민지배가 시작되었다. 서구열강이 지나간 후에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이어졌다. 그 이후에는 동남아시아 여러나라가 독립을 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역시나 조금 어려웠다. 특히나 동남아시아 곳곳에 있었던 각종 왕가, 종교 기타등등에 대한 부분들 말이다. 일단 왕가의 명칭이 익숙하지 않았고, 자주 나온 종교인 불교도 내가 생각하던 그런 불교가 아니었다. 하하하하. 더군다나 동남아시아에대한 지도가 머리속에 잘 그려지지 않아서 그런가, 어느 강부터 어느 산까지 A국가, 그 옆에는 또 B국가 이런게 확 와 닿지않았다(한중일은 눈만감아도 지도가 그려지는데^_T;;). 또 우리나라와는 달리 국가 이름은 그대로 가되, 왕조만 바뀌는 행태라던가(우리로 말하면 왕조의 성씨가 바뀌는?)도 조금 어색했다. 그만큼 내가 동남아시아에 대해 잘 모른다는 이야기인듯하다. 하하하. 그래도... 나름대로 전반적인 세계사 흐름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T_T. 동남아는 예외였던걸로. 흑..



읽으면서 느낀사실은, 이 책은 만인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중서 형식의 역사책이라기 보다는 전공자들의 초기 입문서or개론서 또는 동남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역사책 같았다. 거기다 저자가 일본인이다보니, 19세기 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자연스레 자국과 빗대어(또는 비교하여) 서술하는 부분도 있었다. 특히 자국가 빗대어 서술하는 부분에선, 일본인 특유의 정신승리(?) 부분이 있기도 하는데 뭐, 그런건 귀엽게 넘어갈만하다.



확실한건 동남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매우 도움이 될 책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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